후쿠시마 원전폭발 10주년이 된 올해 일본정부는 2년 뒤에 방사능 오염수를 해양에 방류하겠다고 한다. 매일 평균 140톤의 오염수가 발생, 곧 137만 톤의 저장탱크 용량은 90%이상 차게 되어 시설을 확장하지 않고 싼 비용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애초에 원전 건설 또한 무공해 산업으로 값싸게 에너지를 생산한다는 사고에서 탄생했다. 이미 원전이 지구에 대한 재앙임은 35년 전 체르노빌참사가 보여 주었다. 사고 당시 피폭되어 수백 명이 죽었고, 이후 수십 만 명의 암 환자가 발생, 수만 명이 사망했다. 후쿠시마 원전 문제도 일본의
세계 가톨릭교회를 지배하는 로마 교왕청과 중국 정부 사이에 주교 임명권을 둘러싸고 이어져온 갈등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교왕청에서는 주교 임명이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지만, 중국 정부는 그 요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자신들이 선발한 주교 임명을 강행하고 있다. 교왕청과 중국 정부가 서로 “이번에 밀리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절박한 상황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갈등은 앞으로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중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면 다른 나라들에서도 비슷한 요구를 해올 것이므로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
기후위기를 비롯한 환경문제의 위기가 이제는 우리 눈앞의 문제가 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선거에서도 가장 큰 정치의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도 국회에서 기후위기 대응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는 등 이 문제의 해결에 합류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정치권에서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세력이 거의 없고, 구체적인 정책 제시도 없어 선언적인 의미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위기에 대한
노란 개나리꽃 같은 봄 햇살이 수줍은 살구꽃처럼 흩어진다. 나른하기는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다. 따뜻한 봄날의 오후다. 어딜 가도 꽃이니까 아무 데서나 봄이다. 속속들이 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봄을 노래하는 꽃들 가운데서도 벚꽃과 살구꽃을 좋아한다. 벚꽃은 다른 사람도 좋아하지만, 살구꽃은 나만 좋아한다는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벚꽃은 화려해서 좋고, 살구꽃은 예뻐서 좋다는 말로도 표현하고 싶다. 봄은 벚꽃과 살구꽃을 보유한 계절의 여왕이다. 신촌 금화터널 부근을 지나다 주택 담장 위로 살구꽃 가지 하나가 힘
터질게 터진 것이다.‘땅’하면 복부인, 졸부, 지게 짊어진 갑부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난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부정적인 단어가 아닐까 한다. 고급세단을 타고 모피목도리를 두른 돈 많은 사모님, 갑자기 개발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우리나라가 근대화 되면서 땅이 가장 먼저 투기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때는 그저 국가가 주도해 개발하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공공연하게 고급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고위 공직자들과 지역 토호세력이 연관돼 부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개발소식이 전해지면 이미 그 지역은 모모 의
총을 든 경찰과 군인들 앞에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는 시민들은 얼마나 두려울까. 무자비한 발포로 이미 3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 집안에 있는 어린아이들까지 비명횡사했다. 5·18민중항쟁 때, 이 땅의 군인들 또한 그랬다. 나라를 지키라고 쥐어준 총을 그 주인을 향해 들이대고 있으니 어찌 반역이 아니랴. 미얀마는 지금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그 터널 끝에는 담마(Dhamma)가 구현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햇살이 기다리고 있다. 알고 있듯이 미얀마는 불교의 나라다. 남부 몬 주는 옛날 인도에서 전륜성왕 아소카
2005년 인구통계조사 결과 10년 동안 개신교도 숫자는 1.6% 감소하고 가톨릭교도는 74.4% 증가한 것으로 밝혀져 개신교계가 충격에 빠진 뒤 이를 진단하는 세미나 ‘2005 인구주택총조사 그 이후,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 성장’에서 ‘가톨릭신자의 괄목할 만한 증가와 그 요인’을 발표한 오경환 신부의 발언이 내 머리에 오래 남아 있다.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일상생활 중에 관찰하면서 각 종교에 대하여 호감이나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이고, 아무리 신자들이 열심히 선교해도 호감을 갖는 사람만이 입
조선왕조 세종 때 조세제도 하나 바꾸는 데 25년이 걸린 일이 있었다. 세종의 뜻으로 시작된 일이었는데 중요한 사안이었던 만큼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고 과거시험의 제목으로 출제를 하여 좋은 견해도 찾고, 17만이나 되는 신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도 하였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치고 보완하여 시행을 하는데 그런 긴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절대왕정이라 할 수 있는 당시, 임금의 뜻인데도 그것을 고치는데 이렇게 신중하였던 역사를 보면 지금 정권의 졸속한 행정을 새삼 아프게 느끼게 된다. 정책과 제도는 한번 결정되면 국민의 삶에 엄청난 영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건강검진을 받는다. 겨울이 졸린 듯 하품을 하고, 봄이 막 기지개를 켜고 기상하려는 순간에. 어쩌면 나 또한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빌려 한 해 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의학적인 주문(呪文)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랬었다. 여태껏 봄은 언제나 ‘오는(生)’ 것이었지 결코 ‘가는(滅)’ 것은 아니길 희망했었다. 군대 가던 그해의 까마득했던 봄 한 번을 제외하고는…. 이날치 밴드가 ‘범’ 내려온다고 소리치며 흥겹게 춤을 춘다. 내 눈에는 ‘범’보다 먼저 ‘봄’이 내려 왔지만, 뭐 ‘봄’이나 ‘
내 오른쪽 어깨에는 커다란 우두자국이 남아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콜레라, 장티푸스 등이 지금의 코로나19와 같은 공포였다. 친구들이 며칠 씩 학교에 오지 않으면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고, 감염된 집은 붉은 깃발로 격리됐다. 예방주사는 팔이 짓무르도록 2~3일에 한 번씩 맞았다. 그래도 그 속에서 우리는 용케 살아남았다.이후로도 질병들은 새롭게 창궐했고 1990년대부터는 이름조차 생소한 조류인플루엔자(AI), 사스, 메르스, 신종인플루엔자를 비롯해 최근의 코로나19까지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혀 왔다. 원인이야 학자마다 다르겠지
배구계에서 촉발된 학교폭력 여파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기저기서 ‘나도 당했다’고 폭로되고 있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니 나 또한 폭력의 장 속에서 살아왔음을 느낀다. 어릴 때 집안에서는 부모님의 폭력,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폭력, 군대에서는 고참들의 폭력, 대학생 때는 경찰들에 의한 폭력의 세례를 받았다. 민주화 끄트머리에서는 죽고 싶을 정도의 육체적 폭력으로 인한 고통이 절정을 이루었다. 커갈수록 더욱 ‘쎈’ 폭력을 온몸으로 받은 셈이다. 하나하나가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로 각인되어 있다. 지난날 한국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1월27일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는 ‘만암당 종헌 대종사 제64주기 추모다례재’를 봉행하였다.스님은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뒤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하려 시도할 때에 만해·한영 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하여 맞섰다. 1916년 백양사 주지가 된 뒤에는 극락전 한 채만 남아 있을 정도로 쇠락했던 도량을 일으켜 대찰의 면모를 살려냈으며, 여러 학교(광성의숙‧심상학교와 불교전수학교‧정광중고등학교)를 세워 출가수행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에 앞장섰다. 또한 불교가 수행과 전법의 역할에 충실하려면 교단이 재정자립을 이룩해야 한다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이념적 요소를 가진 것이 바로 불교이다. 타 종교를 존중하고 타 종교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칙령을 내린 아쇼카대왕이라는 위대한 선배를 지닌 불교는 타 종교를 존중하면서 그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는 이념적 바탕을 제공할 수 있는, 여러 종교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에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선구적 종교라 할 수 있다.그렇지만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관용성 못지않게 공적인 영역에 있어서의 종교편향을 엄하게 금지하는 근본적 장치
오랜만에 지하철을 탈 일이 생겼다. 언제나 그랬듯이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 기사를 검색한다. 얼핏 눈에 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의리’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공직을 맡지 않고 외유를 떠나기로 했다는 대통령 측근이라는 사람의 기사였다. 순간 ‘의리’란 말 대신 퇴임한 대통령 곁에서 ‘말동무’라도 되겠다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왠지 의리란 말은 불편하게 들렸기 때문이다.누군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장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배신은 흔히 의리와 짝을 이루어 사용되는 경향이 있
어디 정인이뿐이겠는가. 우리 어른들의 잘못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희생당해왔다. 안전이 보장되어야할 학교 앞 건널목 교통사고, 가정에서의 아동학대, 성학대 등 나열할 수조차 없다. 그럴 때마다 우리 어른들은 분노했지만 한때의 호들갑으로 잊혀져갔고, 반복이 일상이 돼버렸다. 사적인 영역이라는 이유로, 내 자식이라는 이유로, 훈육이라는 이유로, 갖가지 이유로 우리 아이들의 인권은 침해당해왔다. 부모가 소유권처럼 친권을 내세워 막아서 오히려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이 인권의 사각지대가 되기도 한다.국회에는 아동 안전에 관한 법률이 90여개가
노동자의 고된 삶과 사회적 모순을 조명하고 있는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를 보면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평생 노동으로 살아온 부모님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가족들이 자본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삶이 너무나도 슬펐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종주국 영국도 노동자의 삶은 늘 불안하다. 주인공 리키 터너는 이 시대 모든 노동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가족들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가장으로서. 요양보호사인 부인 애비 터너가 보여주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둥지 같은 품은 우리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는 말을 귀에 따갑도록 들어온 사람들은 이제 “당연한 일인데,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종교평화라는 말 자체가 식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인류 역사에 숱한 피를 뿌리게 하니 문제이다.중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수업 시간에 배운 ‘중국 선교에 나선 가톨릭의 베네딕트 수도회와 예수회 사이의 차이점’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배운 대로 “베네딕트회는 배타적이어서 중국 당국과 문제를 일으킨 데 반하여 예수회
코로나19 환자가 1000명을 넘어가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직접 피해보다도 그것이 주는 파장이 훨씬 더 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피로감도 점점 늘어나, 그 피로감이 다시 반작용을 일으켜 피해를 증폭시키는 끔찍한 날들이 예상되기도 한다.질병이 세계를 바꾼 예로는 중세의 페스트를 들 수 있다. 인구가 격감하면서 봉건제도가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그것에 못지않은, 아니 그것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세계 인구 100명중 1명이 코로나 감염자라는 통
겨울로 접어들자 코로나19는 튼튼하던 한국의 방역체계를 한계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에서는 9·11테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매일 죽고 있다. 통계를 내고 있는 월드오미터 12월17일자에 따르면 전 세계 감염자는 7450만명, 사망자 165만명이라고 한다. 방역은 강화되고, 친구·친지들과 한 해를 마감하는 연말 소모임마저도 물 건너갔다. 새해가 온다고 해도 무엇이 새로울 것인가. 그래도 희망은 있어 각국 정부는 전 세계 제약회사로부터 백신이 공급되면 내년 이맘때쯤, 어느 정도는 국내외 질서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그러나
아래 문장은 원효 스님의 저술인 ‘발심수행장’의 한 구절이다. “한 시간 한 시간 흐르고 흘러 금새 하루가 지나가고/ 하루하루 옮겨가서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가며/ 한 달 한 달 바뀌어서 홀연히 한 해의 끝자락에 이르고/ 한 해 한 해 지내다 보니 잠깐 사이에 죽음 문턱에 마주하네.”벌써 12월, 2020년 경자년이 이렇게 저물고 있다. 한 해를 뒤돌아 볼 시점이다. 올 한 해 마음에 가장 깊게 새겨진 하나의 사건을 꼽으라 한다면, 필자에게 올해의 사건은 ‘도반 스님의 죽음’이다. 며칠 후면 49재가 돌아온다.같은 산중에 출가하여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