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이 자주 눈을 감았다. 제자 원융은 스승이 혼침에 빠진 줄 알고 여쭈었다. ‘큰스님, 지금 경계가 어떠하십니까?’ 그 말에 성철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원융의 뺨을 후려쳤다. 열반에 들기 3일 전 일이었다. ‘가야산 호랑이가 죽지 않았구나.’”성철은 출가 후 줄곧 가슴에 쇠말뚝 하나를 박고 살았다. 거기엔 패(牌) 하나가 붙어 있었다.‘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세속적인 명리를 버리고 영원히 사는 길을 찾아 나섰다. 그 길을 불교에서 찾았고, 부처가 열었던 길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길은 곧잘 끊기고 어둠에 잠겨있
“성철은 견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망설이 퍼져있음을 가장 우려했다. 그것은 선종의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正脈)을 끊는 일이었다. 성철은 이를 바로잡는 데 일생을 바쳤다. 견성이 곧 성불임을 밝히는 것이 깨침의 회향이었고, 오도(悟道) 후의 불사였다. 돈오돈수 사상도, ‘자기를 바로보자’로 상징되는 법어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를 넘어 절대적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종교다. 그렇다면 그 영원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에서는 바로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니 마음을 보라고 했다. 마음을 보면
“‘종단이 이만큼 안정되었으니 우승(愚僧)은 종정직에서 사퇴합니다. 앞으로 부처님의 법에 의하여 종단이 운영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앞뒤가 분명하다. 성철이 종정을 사퇴하겠다고 하면 주변에서 종단이 안정 될 때까지만 머물러 달라고 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철은 부단히 종정이란 고깔을 벗어버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성철의 장좌불와와 동구불출 같은 초인적인 수행은 생전에 이미 전설로 회자됐다. 그렇다면 깨친 이후의 하화중생은 무엇인가. 성철은 불교를 기복신앙에서 참회와 발원의 신앙으로 바꿔놓았다. 불교 안의 비불교적 요소를, 선종
“‘내가 낳았지만 독사보다 지독하다.’ 이렇듯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원망하며 홀로 한 서린 세월을 삼켰지만 이덕명에게도 출가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석남사에서 윤회와 인과응보에 대한 인홍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마침내 성철의 도반 자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법명은 일휴(一休)였다.”시부모가 세상을 뜨자 고향집은 며느리 이덕명이 지켰다. 덕명은 출가한 딸을 기다렸다. 그러나 수경(불필 스님)은 오지 않았다. 성전암에 있는 성철을 찾아가 딸을 돌려달라고 악도 써보고 애원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성철은 쳐다보지도
“저는 육십이 멀지 않은 나이인데도 이쁘게 보이는 여자를 만나면 연연한 마음이 생기는 걸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떠신지요?” 서정주의 능글맞은 고백이었다. 성철은 소리 내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정주씨는 큰 시인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직 모르시오? 아 그러니까 중들은 날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께 예불도 하고, 불경도 배워 읽고, 참선도 하고, 마음을 바로 닦으며 지내는 것 아니요.”백련암은 가야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백련암(白蓮庵)은 이름처럼 흰 연꽃으로 피어 있었다. 성철의 법문과 오
“공부하다가 지견이 좀 생기면 고불고조를 뒷간 휴지쯤으로 취급하며 아만이 하늘을 찌르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허나 말만 그렇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출중한 변재와 지혜를 갖췄던 원오나 대혜도 오매일여에 미치지 못함이 병이라 했는데 네가 안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일러주지만 대부분 내 말을 긍정치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 중엔 돌아서며 욕을 퍼붓는 자들도 있다.”성철은 환갑을 맞은 해부터 자신을 퇴옹(退翁)이라고 했다. 스스로 물러난 늙은이라 칭했지만 성철은 여전히 강건했다. 그런데 왜 퇴옹이라며 물러나 있었을
““책 두 권 냈으니 이제 부처님께 밥값을 했다. 이 책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면 바로 나를 아는 사람이지.”원택이 상기병에 걸렸다. 참선에 들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상기병은 갈 길 먼 수좌들의 정신을 쪼아댔다. 선승에게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공포덩어리였다. 원택은 할 수 없이 스승의 법문을 들으며 공부해보기로 했다. 백일법문 테이프를 얻어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을 땐 뭔가 알겠는데 듣고 나면 그만이었다. 원택은 아예 법문을 노트에 받아쓰고 그걸 보면서 들었다. 그랬더니 이해가 빠르고 다시 볼 수 있어 좋았다. 보
“‘큰스님, 스님께서는 산중의 스님이 아니십니다. 이제 공인이십니다. 해인사 방장이 아닌 종정으로 모든 국민에게 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한문투의 법어는 세상사람 누가 알겠습니까.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원택은 이렇듯 ‘감히’ 고하고 불호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성철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제자의 의견을 선뜻 들어줬다. ‘그래? 그럼 내가 다시 써보지.’”1981년 조계종 종정이 되고 나서 첫 부처님오신날을 맞았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법어를 내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제자들은 이것마저 뿌리
“종교와 정치는 완전히 분리해야 합니다. 분리해야 될 뿐 아니라 종교는 정치이념의 산실이라고 봅니다. 정치이념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종교는 정치의 정신적인 근본 공급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어, 모든 정치 이념이 종교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산중의 ‘살아있는 전설’은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정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지만 가야산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일체의 현실을 살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1980년대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아픔이었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보듬는 시국발언을 고대했지만 성철은 이를 외면했다. 그러자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일컬음이었고, 그 안에는 중도사상의 진수가 들어있었다.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각 뚜렷하다는 것은, 깨끗한 거울 가운데 붉은 것이 있으면 붉은 것이 그대로 비치고 푸른 것이 있으면 푸른 것이 그대로 비치고, 산을 비추면 산이 그대로 비치고 물을 비추면 물이 그대로 비치어서 조금도 착오 없이 바로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성철의 글이 생애 처음으로 신문(‘불교신문’ 12월 21일자 창간호, 12월 28일자 제2호)에 실렸다. ‘한국불교의 전통과 전망’이란 제목의 ‘불교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려 했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외치며 나름 사회적 지탄을 받는 무리를 골라 정조준했다. 이때 ‘만만한’ 과녁이 불교였다.”1980년 10월27일 새벽, 군인들이 총을 들고 사찰에 난입했다. 스님과 불교계 인사 153명을 연행했다. ‘10·27법난’의 시작이었다. 명분은 불교계 정화였다. 10월 마지막 날에는 군인 3만 2000여명을 풀어 전국 사찰과 암자 5731곳을 뒤졌다. 군홧발로 법당을 짓밟았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까지 수색을 당했다. 조계종의 상
““돈은 너희 돈으로 샀지만 먹기는 농부들 정성을 생각하고 먹어야지. 반도 안 먹고 버렸으니 기도하지 말고 싹 다 가든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아놓은 수박을 다시 꺼내 먹든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하라.” 신도들은 너나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수박을 다시 집어 들고 먹어야 했다. 평생 소식을 했던 성철은 밥을 많이 먹는 행자들을 보면 혀를 찼다. “그렇게 먹고 배 안 터지나?”깨친 사람은 세속을 벗어나 홀로 고고한 은사(隱士)도 아니요, 신통력을 지닌 도사도 아니었다. 도를 얻었으면 하화중생(下化衆生)해야 했으니 결국 사람들 속에서 중
"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놀러와 춤추고 노래하며 재롱을 피울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아이들은 내 친구요, 꾸밈없는 천진함은 진불(眞佛)의 소식과 같다."성철은 가야산 백련암에만 머물렀다. 명성이 가야산만큼 우뚝해서 이름이 세간으로 흘러내렸다. 성철을 친견하려 사람들은 백련암으로 올라왔다. 그중에는 인생의 답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성철의 제자들은 성철의 법문을 듣고 감화를 받아 삭발한 경우가 많았다. 또 삼천 배를 하고 친견 했을 때의 ‘특별한 느낌’ 때문에 다시 찾아온 이들도 있다. 성철은 그들에
“지눌의 시대나 성철이 살았던 시대는 똑같이 민족의 암흑기였다. 나라는 외세에 휘둘리고, 백성은 고통 받고, 승단은 부패했다. 그럼에도 불교는 백성을 보듬지 않았다. 권력에 기대어 자기들끼리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이에 지눌은 정혜결사를, 성철은 봉암사결사를 주도했다. 정혜결사나 봉암사결사나 내용은 똑 같다.”성철은 보조의 점수사상을 공격했다. 돈오점수설로 선불교 전통이 정법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보조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다. 보조 지눌이 고려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지눌을 대신해
“성철의 돈오돈수 이론은 외적인 모순과 억압 속에 와해되어가는 승단의 재건을 위한 이념적 토대의 필요성이라는 한국불교의 시대적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현재·미래의 나고 죽음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를 건지고(人天小乘敎와 같음),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緣覺中乘敎와 같음),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大乘圓頓敎와 같음)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
“깨친 이후 성철은 돈오돈수를 설파했다. 찾아오는 납자들마다에게 이를 강조했다. 당시 전국 선방에서는 견성 못한 승려가 드물 정도로 ‘성불견성’이 넘쳐났다.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한 소식했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점검해보면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교(敎)는 말로 말을 전하는 이언전언(以言傳言)이지만 선(禪)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선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달함이 근본이다. 흔히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라
“본 종은 신라 도의 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 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公稱)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1976년 7월 성철은 ‘한국불교의 법맥’을 출간했다. 백일법문을 하면서 자신의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니고 선가의 본분을 버린 이론과 언설이라 했건만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문자를 동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답답하여 붓을 들었는가. 성철이 보기에 법을 잇고 등불을 전하는 사법전등(嗣法傳燈)에 삿된 것이 스며들어 한국불교의
“청담이 함께 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간절히 권유했지만 성철은 산중 수행승으로 남았다. 그것은 이 땅에 선풍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청담이 그릇을 제조했다면 성철은 그 내용물을 만들었음이었다. 정화운동 기간에 두문불출했던 성철을 두고 여기저기서 시비를 걸어올 때 이를 막아준 이도 청담이었다.” 성철의 백일법문은 달리 말하면 중도법문이었다. 방대한 불경을 중도로 꿰어 쉽게 강설했다.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깨쳐야하는지 알 수 없었던 후학들에게는 귀한 지침이 되었고, 불자들에게는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스님께서는 한국불
“불교는 가장 과학적인 종교였다. 불교는 늙고 오래되어 낡았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사실은 가장 새롭고 역동적인 종교였다. 성철은 이런 ‘과학 법문’을 오래전부터 준비했다. 동구불출하며 공부했던 성전암에서 성철이 메모한 수십 권의 노트에는 과학으로 불교의 근본교리가 밝혀지고 있음을 찬탄했다.”성철은 과학 이론을 통해 불교의 원리를 설명했다. 백일법문에서도 또 이후의 법문에서도 불교의 진리를 과학으로 풀어냈다.“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니라.(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는 중간이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만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이루고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했다. 율장 초전법륜편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세존이 다섯 비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