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군모천지우도. 낮에도 밤에도 느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었다. 나쁜 짓을 하면 자신에게 들킨다고 경고했다. 인도로 불전을 구하러가는 현장 법사를 수행하는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원숭이가 그랬다. 손오공이라는 이 원숭이는 근두운 대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머리를 옥죄는 띠 대신 헬멧을 썼고 늘어나는 여의봉 대신 쌍절곤을 휘둘렀다. 머털도사가 머리카락을 뽑아 도술을 부리는 것처럼 털을 뽑아 신통력을 부렸고 약자를 도왔다. 명나라 때 오승은이 썼다는 ‘서유기’를 각색한 ‘날아라 슈퍼보드’ 얘기다. 어째서 원숭이가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졌을까. 두말 하면 입 아프다. 지혜롭고 총명하기 때문이다. 동작도 재빠르다. 나무 탈 땐
맛있는 음식의 유혹은 견디기 힘들다. 배가 주릴 때는 물론이고 음식 냄새나 빛깔에 취하면 절로 배가 고파진다. 배가 부른데도 눈과 코를 사로잡은 음식에 마음을 뺏기면 비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일찍이 부처님은 양을 비유로 들어 무명에 사로잡혀 쉽게 유혹에 빠진 경솔한 행동을 경계했다. ‘본생경’은 풀에 묻은 꿀의 달콤함을 탐내다가 산지기에게 덜미를 잡힌 양 얘기를 전한다. 이를 본 왕은 ‘조심성 많은 양이 적은 양의 꿀 때문에 잡혔다’고 생각하며 맛에 집착하는 욕심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잡보장경’에서는 성실한 여종 몰래 보리 한 말을 먹어치운 숫양 얘기가 나온다. 여종은 틈만 나면 양을 회초리로 때렸고 양도 지지 않았다. 그냥 들이 받곤 했다. 어느 날 양은 여종이 회초리를 들지 않은 모습을 보자 그
▲인달라대장 오신. 관세음보살은 자비 화신이다. 분노는 가당치도 않다. 헌데 분노에 치를 떠는 관세음보살 화신이 있다. 제도하기 어려운 중생의 번뇌를 부수기 위해 분노 띤 얼굴을 하고 있다. 말 머리를 한 관세음보살이다. 다른 이름은 마두관음(馬頭觀音)이다. 관음보살은 천(天),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등 6도를 돌며 중생을 교화한다. 6도에서 중생을 제도할 때 관음보살은 성관음, 천수관음, 십일면관음, 여의륜관음 등으로 현신한다. 보살이 마두관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축생도다. 마두관음은 사람 몸에 말 머리를 하고 한 손엔 창을 들고 있다. 분노하고 있는 표정 때문인지
▲상사뱀 이야기가 전해지는 청평사 공주탑. 다소 뚱뚱한 체형을 가진 개그우먼이 캐릭터 ‘출산드라’를 연기하며 다산의 상징이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연분만, 모유수유”와 “날씬한 것들은 가라”고 외치며 S라인 몸매에 열광하던 사회를 풍자해 높은 인기를 얻었다. 매끈한 몸을 자랑하고 여러 개 알을 낳는 뱀도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다. 허나 갈라진 혀와 독, 차가운 몸 그리고 징그러운 모습이 신과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탓일까. 뱀은 애욕과 복수 화신이나 한 서린 동물로 비유되곤 한다. ‘용재총화’엔 스님이 죽어 뱀으로 환생한 설화가 있다. 진광사 스님이 시골여인을 아내로 삼고 밤이면
▲통도사 금강계단. 불법을 수호하는 천왕팔부중은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다. 여기에 부모 속을 썩이는 자식, 애물단지가 있다. 입에서 불까지 내뿜는다. 게다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바로 용이다. 용이 왜 애물단지(?)일까. 아홉 마리 용 설화가 얽힌 사찰 이야기가 흥미롭다. 민오 스님이 1705년(숙종 31)에 엮어 간행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용이 등장한다.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 있어 불보(佛寶)사찰로 유명하다. 이 탑을 중심으로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다. 공교롭게도 계단을 조성한 곳은 용이 살던 연못이었다고 하
▲제등행렬 단골인 용형상 등.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상상 그 이상의 상상.” 이런 말들이 아깝지 않은 해괴망측(?)하고 무시무시한 동물이 있다. 머린 낙타와 비슷하고 눈은 토끼처럼 빨갛다. 귀는 소귀에 목덜미는 뱀과 같고 잉어 비늘을 몸에 둘렀다. 발은 호랑이 발에 발톱은 매 발톱이다. 거기에 머리에 달린 뿔은 사슴뿔을 닮았다. 온갖 동물 잡탕이다. 머리에 온통 뱀을 두르고 눈만 봐도 돌로 굳는다는 메두사보다 끔찍하지 않은가. 이 말도 안 되는 동물은 중국 고서 ‘광아’에서 표현한 용이다. 용은 희귀한 모습인 만큼 온갖 신통력을 부린다. 비를 내리게 하거나 구름
▲ 순천 선암사 토끼조각.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딘 사람은 부처님이다? 이런 발칙한 상상을 감히 할 수 있을까? 1969년 7월20일 미국 아폴로 11호에서 내린 이는 닐 암스트롱이다. 그런데 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가 부처님이라면 동네 개가 웃을까? 아니다. 흥미롭다. 토끼는 부처님 전생이었다. ‘본생경’에는 ‘토끼의 공양’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울창한 숲엔 토끼와 원숭이, 들개, 수달이 살았다. 그 중 토끼는 가장 품성이 너그러워 세 친구에게 진리를 가르치곤 했다. “보시를 행하고 계율을 지키며 포살을 행해야 한다.” 어느 날 토끼는 달을 살피다가 다음 날이 포살(布薩)임을 알고 친구들에게 계를
▲청량사지 7층 석탑. 다짜고짜 호랑이는 스님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기 일쑤였다. 목에 걸린 비녀를 빼달라는 거다. 어지간히 여인네들을 취한 모양이다. 그런데 꼭 처녀를 스님에게 물어다 놓았다. 스님을 유혹(?)하는 호랑이일까. 얘기는 기묘하게도 사찰 창건 설화와 얽힌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보다 멀지 않은 옛날이다. 신라시대 두운 대사가 소백산 기슭 동굴에서 수행할 때다. 가끔 호랑이가 물끄러미 보다 가곤 했다. 하루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낑낑댔다. 목에서 비녀를 빼주고 나니 척! 처녀를 스님 앞에 데려왔다. 스님은 아픈 처녀를 지극정성 보살폈다. 완쾌한 처녀가 어찌 가만히 있을까. 냉큼 절을 보시했다. 은혜를 갚아 기
▲ 호림산신도. 탱화장 브라이언 베리씨 작품. 짐승의 왕 호랑이는 죽는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다른 짐승에게 먹히지 않도록 온 힘으로 꼿꼿한 자세를 취하다 죽는다고 한다. 어둠 속에 먹이를 노릴 때 형형히 빛나는 눈빛은 매섭다. 날렵하고 균형 잡힌 몸매와 늠름함, 포효하는 울음소리는 공포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호랑이는 공공의 적이었다. 잡으면 나라에서 상을 내렸다. 울산 동구 마골산 불당골에는 착호비(捉虎碑)가 있다. 말을 키우는 하급관리 전후장이 영조 22년(1746)에 호랑이 5마리를 잡아 ‘절충장군’ 직을 받았다는 거다. 그는 호랑이 사냥에 일가견이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영조 33년
▲우두나찰. 통도사성보박물관. 소는 수행자와 자주 얽힌다. 보은과 경전 간경의 공덕을 기릴 때 심심찮게 등장한다. 수행자가 환생한 까닭부터 보자면 이렇다. 조선 성종 3년 지리산 쌍계사엔 우봉 스님이 살고 있었다. 스님은 지리산을 넘어 화엄사로 가던 중 몹시 배가 고팠다. 길가의 보리밭에 들어가 보리이삭 3개를 꺾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 먹었다. 이때부터 스님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주인 허락도 없이 보리이삭을 훔쳐 먹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복과 바랑을 벗고 바위 아래 숨겨두고 소로 변했다. 금생에 빚을 다 갚아버리겠다는 분연한 결단과 뉘우침에 따른 것이었다. 임자 없는 소는 보리밭 주인이 기르게 됐다. ‘업둥이’란 이름을 받은 소는 3년 간 부지런히 일
▲공주 갑사 공우탑. 사찰생태연구소 제공. 우직하고 성실함 때문일까. 아니면 선한 축생이라는 이미지 탓일까. 소는 사찰 창건 일등공신(?)이다. 사찰마다 창건 설화가 있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물이 바로 소다. 공주 갑사에는 공우탑이 있다. 죽은 소를 위해 세운 탑이다. 탑에 얽힌 소 이야기는 이렇다. 정유재란을 겪은 갑사는 화마로 앙상한 터만 남았다. 그러나 의상 스님이 화엄의 높은 교학을 펼쳤던 도량의 황량함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 인호 스님과 20여명의 스님들이 중창 불사의 원력을 세웠을 때였다. 뜻대로 불사가 진행되지 않자 인호 스님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꿈에 소가 나와 “불사를 돕겠다” 약속하고 사라졌다.
▲고구려 고분 오회분 5호묘 벽화의 염제. 농사의 신이 소의 머리를 하고 있다. 중국 전설에 ‘염제(炎帝)’로 불리는 신농씨는 불로 음식을 익히거나 구워먹을 수 있게 해주고, 쟁기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가르쳤다. 때문에 농사의 신으로 숭상 받는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있다.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란 얘기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 역시 예로부터 땅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우리나라도 신농씨를 떠받들며 농사가 모든 일의 근본임을 잊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 오회분 5호묘 벽화에서 염제는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손에 벼 이삭을 들고 있다. 이른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