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에는 집합이라는 개념이 있다. 집합은 대상들의 모임이다. 현대 논리학과 분석철학의 창시자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는 수학 기초론에 천착하여 집합론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날 러셀이 물었다.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것들을 다 모아놓은 것을 S라 하면, S는 자신의 원소인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고 하면 (즉 S가 자신의 원소라고 하면은) S는 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므로 ‘S는 S의 원소가 되지 않아’ 모순이 생기고,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즉 S가 S의 원소가 아니
수학에는 안과 밖에 대한 문제가 있다. 평면상의 연속 단순 폐곡선은, 즉 끊어지지 않고 중간에 만나지 않는 닫힌 곡선은 평면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는 정리가 있다. 한 부분은 면적이 유한하고, 다른 부분은 면적이 무한하다. 예를 들어 방바닥에 놓인 동그란 고무줄은 방바닥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소위 ‘조르단 곡선 정리’이다. 자명해 보이지만, 그 증명은 난해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평면상의 어떤 점이 주어진 폐곡선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결정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곡선이, 동그란 고무줄과 달리, 수학적 방정식으로 주어지기에 눈으
공을 평행이동과 회전이동을 이용해서 같은 크기의 공 두 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소위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이다. 이게 역설인 이유는 이렇다. 물체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거나 회전을 시켜도 부피는 변하지 않는다. 즉 입체를 모양을 변형시키지 않고 움직이면, 입체의 부피는 유지된다. 평행이동과 회전이동을 한다고 해서 부피가 변하지 않는다. 물체를 몇 조각으로 나누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돌려서 다시 조합을 해도 부피는 변하지 않는다. 자동차를 분해했다가 조립했더니 자동차가 한 대 더 생기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금덩어리를 몇
[1495호 / 2019년 7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1494호 / 2019년 6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게임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들이 작전을 변경하지 않을 때 자기만 작전을 변경해도 더 이익을 보지 못할 때, 이 게임은 내쉬 평형상태(Nash equilibrium)에 있다고 한다. 수학자 존 내쉬(John Nash)는 모든 유한 게임에는 이런 평형(equilibrium)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과연 모든 사람에게 각각 최선의 길이 있을까? 그 모든 길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는 종교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의 최선의 영적인 길들이 동시에 존재할
한 사람이 동료와 강도질을 하다 잡혔다. 따로따로 심문을 당하는데, 둘 다 범행을 부인하면 증거부족으로 1년만 살고 나오게 된다. 그런데 만약 동료가 자백을 하게 되면 동료는 수사에 협조한 공으로 풀려나고, 부인한 자기는 괘씸죄와 위증죄에 걸려 10년을 살게 된다. 완강히 부인하고 있지만,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다. 갈수록 경찰의 심문이 날카롭다. 뭔가 알아낸 게 있는가 보다. 잡히는 경우 잡아떼고 버티자고, 굳게 맹세를 했지만 슬슬 불안해 진다. 불안이 극에 달하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자백을 했다. 하지만 풀려나지를 못하고 5년
자연계는 수학과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학이 숨어있다. 수학이 의사결정에 관여한다. 즉, 동물과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게임이론(Game Theory)을 이용한다. 게임이론은 3자 이상의 다자간에 벌어지는 손익관계를 분석하는 이론이다. 자연계의 분쟁은 대체로 세 가지 원인으로 벌어진다. 자원부족과 탐욕과 의심에 기초한 선제공격이다. 증오도 있지만, 증오는 앞의 두 가지 원인으로 생긴다. 동물들의 경우는 첫째 이유이고, 인간들의 경우는 두 번째 이유가 첫째 이유보다 더 크다. 지구상의 전쟁은 대체로 왕과 집단의
유신론자들은, 신이 인간이 타락할 걸 알면서도 왜 인간을 창조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잘못된 길을 선택해 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자유의지란 여러 개의 선택지가 주어질 때 그중 하나를 선택할 능력을 말하며, 선택을 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느낌만 그럴 뿐이지 사실은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정해져 있는 경우를 배제하기 위해서 즉 결정론을 배제하기 위해서, ‘같은 상황에서 다른 걸 선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기도 한다.그런데 사람들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
나방은 왜 불에 뛰어들까? 여기에는 놀라운 수학이 숨어있다. 나방은 밤에 달빛을 나침반 삼아 날아간다. 달빛줄기 즉 월광선(月光線)에 대해 일정한 각도를 만들고 목표물로 날아간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정하고 길을 가는 것과 같다. 혹은 북위 30도 하는 식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달은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구에 도달하는 달빛줄기들은 서로 거의 평행이다. 그래서 그 빛줄기들에 대해 일정한 각도를 가지고 날아가면 목표물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목적지점과 출발지점을 잇는 선분이 달빛줄기와 30도
양자물리학자 폴리(Wolfgang Pauli)의 꿈에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의 관계가 실수(real numbers)와 복소수(complex numbers) 사이의 관계로 나타났다.사람들은 실수는 실제 세계에 존재하고, 복소수는 실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2의 제곱근은 한 변의 길이가 1인 이등변직각삼각형의 빗변으로 존재하지만, 음수인 -2의 제곱근은 어디 존재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실수에 대한 난제들은 복소수를 이용해 풀 수 있다. 실수만 이용해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복소수를 이용하면 풀린다. 이 점에
지난 회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을 확률은 거의 영이라고 말했다. 생물학적으로 봐도 그렇다. 지구가 생겨난 지 45억년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날 때까지 지구상의 생물 중에 깨달음을 얻은 자가 없었다. 종교인과 철학자들이 무수히 나타났지만, 무아론(無我論)을 얘기한 자도 연기론(緣起論)을 얘기한 자도 없었다. 모두 영혼을 믿었다. 신을 믿었다. 영혼과 신이 사람과 우주를 움직이는 존재라고 믿었다. 모두 현상의 이면에는 이를 주재하는 인격과 의지를 지닌 실체가 있다고 보았다.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실체가 없이, 상호작용에 의해 일
불교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맹귀우목(盲龜遇木)처럼 어렵다고 표현한다. 망망대해를 떠다니던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토막을 만나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이다. 깨달음(구경각·究竟覺·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깨달음이 없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지옥·아귀·축생으로 태어나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수라로 태어나면 싸움질 하느라 바빠서 그리고 천인으로 태어나면 낙(樂)을 즐기느라 바빠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니, 깨달음을 얻으려면 먼저 인간으로 태어
중세에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자연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연법칙의 존재가 신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만약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면 자연법칙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즉 입헌군주국의 왕처럼 법에 따라야 하므로.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자연법칙이 위배되는 것은 관찰할 수 없다. 물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든지,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으면 동상을 입는다든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 적도 없다. 구태여 일어난다면 과학기술 덕이다. 양수기를 이용하면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릴
안다는 건 무엇일까?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를 갖는 걸까? 두 사람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때, 둘의 앎은 같은 것일까?어떤 대상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더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지식이 더 낮다는 걸 알지만, 더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더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더 높은 지식을 가졌다는 걸 알기 힘들다.어떤 대상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더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지식의 한계 즉 ‘그가 어디까지 아는지’ 알지만, 더 낮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더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의 지식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유한히 살면서도 영원히 바뀌지 않기를 희망한다. 미모·건강·재물·수명이 영원히 유지되기를 바란다.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그가 자기들의 소원을 다 해결해 준다고 주장한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방법과 같다. ‘냉장고 문을 열고 집어넣는다.’ 작은 냉장고에 큰 코끼리를 어떻게 집어넣을 수 있는지 의문과 질문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냥 선언한다. 문을 열고 집어넣으면 된다고 선언한다.인간의 욕망은 유한하다. 몸도 마음도 수명도 유한하다. 그런데 무한한 능력을 가
유리수란 12/35와 같이 분자와 분모가 모두 정수인 분수를 말한다. 유리수의 집합은 자연수의 집합보다 크지만, 유리수의 개수는 자연수의 개수와 같다. 그 증명은 다음과 같다. 유리수 중에 분자와 분모의 합이 2인 것이 유한개밖에 없다. (즉, 1/1이다.) 여기에 번호를 붙인다. (1번이다.) 분자와 분모의 합이 3인 것도 유한개밖에 없다. (즉, 1/2와 2/1이다.) 여기서 그 다음 번호들을 붙인다. (2번, 3번이다.) 분자와 분모의 합이 4인 것도 유한개밖에 없다. (즉, 1/3, 2/2, 3/1이다.) 여기서 그 다음 번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인간은 설사 수명이 무한하다 해도, 즉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해도 매순간 그때까지 유한한 시간만 살았으므로, 무한한 시간을 살 길이 없다. 시간 속에서는 무한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설사 몸이 무한히 크다 해도 무한은 경험하지 못한다. 감각정보가 신경에서 뇌까지 이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생체전기에 실려 신경회로를 통해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이 무한히 크면 신경회로가 무한히 길고, 그에 따라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한히 먼 곳에 있는 발가락에 개미가
수학에는 미분과 적분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미분과 적분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물리학의 근본법칙들이 유도되었다. 케플러(1571~1630)는, 스승 티코 브라헤가 평생 축적한 화성 운동 관측 자료를 통해, 화성의 공전궤도가 타원이라는 걸 알아냈다. 소위 행성운동 3법칙을 발견했다. 그런데, 태양계 행성의 궤도는 모두 타원이지만, 어떤 행성은 거의 원에 가까워 관측자료만으로는 타원이라는 것을 확정하기 어렵다. 뉴턴(1643-1727)은 미적분학을 발명하고 이걸 이용해 행성운동 3법칙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즉 모든 행성이, 사실은 우주
20세기 초에 수학계를 이끌던 세계적인 수학자 힐버트(David Hilbert, 1862~1943)는 참인 명제, 즉 수학적 진리는 모두 증명 가능할 걸로 보았다. 하지만, 수십 년 후, 괴델(Kurt Goedel, 1906~1978)은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했다. “공리계 내에는 그 공리들만 이용해서는 ‘참이지만 참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는 걸 증명했다. 예를 들어 5개의 공리를 채택한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5개의 공리만 사용해서는 증명할 수 없는 참인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다른 말로 하자면, 특정 신학의 공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