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바위에 새기는 사람, 흙에 새기는 사람, 물에 새기는 사람이다. 바위에 새기는 사람은 자주 화를 내고 화를 내면 오래 간다. 마치 바위에 새겨 바람이나 물에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흙에 새기는 사람은 자주 화를 내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마치 바람이나 물에 쉽게 지워지는 것처럼. 물에 새기는 사람은 거칠고 날카롭게 말하고 불쾌하게 말하더라도, 곧바로 화해하고 친목하며 친절하게 대한다. 마치 물 위에 새기면 즉시 없어지는 것처럼.”사람이 화내는 것을 바위·흙·물에
어느 국회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정치적으로 두 패로 나뉘어 ‘불체포특권은 폐지되어야 한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로 포기할 수 없다’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대로 포기하라’는 등 각기 다른 주장으로 온 세상이 소란스럽다.모든 만물은 앞 모양, 뒷 모양, 옆 모양, 바깥 모양, 안 모양이 각기 다른데, 그 다른 면에만 집착하여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고 다투어 본들 코끼리 다리만 만져 본 사람이 ‘코끼리는 기둥 같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처럼 껍데기 논쟁에서 헤맬 뿐 실상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각자가
올봄 나는 대학에서 ‘종교와 유튜브’라는 꽤 실험적인 제목의 강의를 시작했다. 유튜버도 아니고 유튜브 열혈 애청자도 아닌 나로서는 상당히 무모한 도전이다. 나는 문서나 책에 익숙한 세대에게 교육을 받았으므로 문자가 아닌 영상 매체는 여전히 내게 ‘주(主)’가 아닌 ‘부(副)’로 남아 있다. 나는 항상 글이 중심인 세상을 살았고, 글로 번역되지 않거나 그럴 가치가 없는 영상은 불신하고 내치는 데 익숙했다. 나는 글의 세계를 옹호하고 글의 세계에 속하기 위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고 있다. 텔레비전, 영화, 유튜브는 그저 여가
“문득 봄이 우리 곁에 왔다.” 사람들은 꼭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봄은 어느 날 문득 우리 곁에 나타나지 않는다. 매일 매일 온 대지 곳곳을 들추며 언 땅을 녹이며 새싹을 일구고, 들과 계곡의 찬기를 조금씩 밀어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단지 우리들이 무언가 자신의 일상에 함몰되어 다가오는 봄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살아가면서 관심사 밖의 일들에 대해서 정말 너무 무관심하다. 자신과 밀접하다고 여기는 친지들의 일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을 보면 언제나 누구나 “너 이렇게 많이 자랐구나!” 한다
아주 먼 옛날, 인도에서는 “어떤 것이 행복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 달콤한 소리를 듣는 것, 좋은 냄새를 맡는 것,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것,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는 것에 행복이 있다, 혹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쟁론은 격렬해져 천상까지 알려졌고, 무려 1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급기야 도리천의 제석천왕이 부처님께 천신들을 보내 무엇이 최상의 행복인지를 물었다.부처님은 “어리석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공경하는 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 유물 또는 고대 그리이스 유적 잔해가 전시되어 있다. 모두가 식민지 시대 야만적인 노략질로 가져온 침략의 흔적이다. 문화재에는 만든 사람들의 정신과 문화가 담겨있다. 그 문화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야만적 방법으로 절취․수탈해 이를 호화스런 박물관에 전시해 놓은들, 약탈당한 민족의 후손들과 제3자가 이를 어떻게 느낄까. 빼앗은 문화재를 마치 처음부터 문명국가였던 것처럼 버젓이 전시하는 것은 야만성과 비문화성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다행히 최근 들어 독일, 프랑스,
2022년 6월에 흥천사 종이 사찰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기사가 법보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종의 ‘소유권’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로 치환해 보고 싶다. 종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아니 불교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이 글을 읽고 독자들이 종의 적합한 위치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보면 좋겠다.조선의 왕 가운데 태조, 태종, 세조는 종을 만드는 데 꽤 집착했던 인물이다. 태조는 1395년에 경복궁 광화문 2층 문루에 종을 매달고, 1398년에는 운종가 종루에도 백금 50냥으로 주조한 대종(大鐘)을 매단다.
초유의 북극 한파도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따사로운 마음의 열기는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며칠 전 백설이 만곤건하던 제주의 폭설이 하룻낮에 다 녹아버렸다. 눈이 하늘 가득 내릴 때 많은 사람들이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이 눈 걱정 했다. 하지만 한나절 시간에 이렇게 눈도 다 녹아나고, 사람들의 번뇌도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작금의 우리 불교 현실도 눈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불경에 “보살은 인(因)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과(果)를 두려워한다.(菩薩畏因 衆生畏果)”고 했다. 보살은 큰 지혜로 살펴서 나쁜 원인을 미리 끊
토끼 한 마리가 숲 속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토끼는 어린 야자수 아래서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이 지상이 파괴된다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바로 그 순간, 잘 익은 나무 열매가 떨어져 큰 소리를 내며 야자수잎을 때렸다. 그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란 토끼는 온 힘을 다해 달리며 소리쳤다. “땅이 무너지고 있다.” 토끼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달아났다. 다른 토끼가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토끼를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으며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토끼는 숨을 헐떡거리며 묻지 말라고 대꾸했다. 거듭
25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이 인도 전역에 퍼졌다. 부처님 열반 후에도 아소카대왕의 불전결집을 통해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까지 포교됐다. 그러나 히브리와 아랍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상과 충돌하면서 페르시아, 아랍, 그리이스, 로마로 건너간 불교가 소멸되더니 드디어 불교의 본거지인 인도에서마저 불교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이래 1700년 동안 중국의 유교, 도교, 우리 전통의 선가 사상 등과 함께 동거했지만, 서로 이질적인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나는 가끔 종교란 아무도 끝까지 읽은 적 없는 책, 아니 아무도 읽을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책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종교는 완전한 독서를 거부하기 위해 쓴 기묘한 책, 즉 책 너머의 책 같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나의 독해는 항상 미완이나 실패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종교만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이런 종교로 인해 그만큼 나도 세상도 두꺼워지기 때문이다.사람은 나이가 들면 과거를 먹고 산다. 더 이상 미래가 맛있는 시간의 먹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 속에서 발걸음은 더뎌지고
사나운 호랑이가 물러나고 모두가 좋아하는 귀여운 토끼해가 돌아왔다. 토끼는 실물도 귀엽고 정겹지만, 우리에게는 더 정겨운 전설 속 주인공으로 다가온다. 아쉽게도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달나라 계수나무 아래 방아를 찧는 토끼의 이야기보다 달을 정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토끼의 신비감을 잃어버렸을지 모를 일이다.토끼해를 맞아 되돌아보면 문명 발달이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이 보름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만이 아니다. 전기의 발견은 우리에게 엄청난 문명을 선사했다고 하지만 그 대가로 잃어버린 것들 또한 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