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萬行)이란 ‘온갖 행위’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무상보리를 얻기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그 가운데 계・정・혜의 삼학이나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은 모든 수행을 포괄하는 말이므로 만행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로 간주된다.삼학(三學)이란 계・정・혜(戒・定・慧)를 일컫는데, 계행을 지킴으로써 선정에 들 수 있고 선정에 들 수 있음으로 지혜를 얻어 해탈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이 세 가지 배움은 불교수행의 요체다. 예불문 앞머리에 등장하는 오분향례인 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은 삼학이
어느 스님의 법문이 좋고 그분의 경전반 강좌가 좋아서 수년을 쫓아다니다 언제부턴가 스님 방으로 들어가 차까지 곁들이며 얻어듣는 소참법문 덕분에 절에 다니던 재미가 쏠쏠치 않다고 생각하던 한 처사님이 어느 날 갑자기 이 말, ‘자넨 아상이 아직 남아있어!’라는 말을 스님으로부터 들었다면 기분이 어떨지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법 경직되어오는 안색을 애써 숨기며 ‘내가 그리 건방졌나? 하심한다고 했는데…’라고 여기기 십상이다.아상(我相)은 국어사전에 ‘자기의 처지를 자랑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이라고 정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는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이를 북방불교에선 지(止, 사마타)와 관(觀, 위빠사나)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지관(止觀)수행은 북방불교에서도 중요한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지(止)란 수행함에 있어서 밖으로는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안으로는 일체의 생각에 흔들리지 않은 채 마음을 특정의 대상에 쏟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관(觀)이란 ‘지’의 수행을 통해 얻은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바른 지혜를 끌어내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가는 것을 말한다.
아주 오래전 중학교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부처님의 부왕과 숙부들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부처님의 조부인 사자협왕에게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부처님의 부왕인 정반(śuddhodana)왕이요, 그 아래로 숙부들에 해당하는 백반(śuklodana)왕과 곡반(droṇodana)왕 및 감로반(amṛtodana)왕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그저 한문도 아니고 범어도 아닌 단순한 한글발음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어귀 허름한 식당 여닫이문에 페인트로 쓰인 식당 메뉴문구를 보는 순간 부왕과 숙부
우리는 구구단이지만 인도는 십구단이니, 인도 학생들은 숫자의 곱셈을 아홉 단계가 아닌 열아홉 단계를 외워야 한다. 그러니 그 고행(?)을 견뎌내는 학생들은 정예소수의 인도 IT인재에 들어가게 되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수포자의 흐름에 들어가고 만다. 인도는 고대부터 숫자를 상상 이상의 큰 것까지 셈하여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한문역의 불교경전에 수록된 것만 해도 1에서 10의 59승까지 60단계에 이른다. 10의 59승은 범어로 안아비랍여(anabhilāpya, 정확히 말할 수 없는)이며 한문으론 불가설(不可說)이라 하는데, 물론 우리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온전한 이름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密多經)’이며, 그 원전에 해당하는 범어로는 ‘와즈라체디까쁘라즈냐빠라미따쑤뜨람(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m)’이란 긴 이름을 갖고 있다. 한문 이름을 해석하자면 ‘금강석(金剛)도 끊어버릴(能斷) 수 있는 지혜(般若)로써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波羅密多)에 대해 설해놓은 경전(經)’이 된다. 이 가운데 ‘반야’와 ‘바라밀다’는 범어를 그대로 소리옮김한 것이다.굳이 범어로 된 경명을 해석하자면 ‘와즈라(vajra)도
북극성을 중심으로 일곱 개의 별이 국자 모양을 한 채 변함없이 한 자리에서 회전하는 북두칠성은 어느 한 민족이나 한 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인도문화에도 중국문화에도, 심지어 중국문화권에 포함된 우리의 전통문화에도 제각기 고유한 칠성신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칠성신앙의 근원을 인도문화로 보는 까닭은 북두칠성에서 기인한 일곱이란 숫자가 문화전반에 폭넓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인도문화이기 때문이다.인도문화에서 숫자 일곱은 ‘영원성(永遠性)’을 상징하는데, 그 연원이 북쪽 하늘에서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영원히 회전하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모든 이가 슬픔에 젖었지만 마하가섭과 함께 유행을 떠났던 무리 가운데 나이 들어 출가한 수밧다는 “우리는 드디어 대사문으로부터 벗어났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경망한 발언에 내뱉게 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마하가섭의 주도로 부처님의 다비를 마친 후 바로 왕사성의 칠엽굴로 옮겨 500명의 비구들이 함께하는 제1차 결집이 단행되었다.제1차 결집으로 율장과 경장이 갖춰지게 되었다. 마하가섭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계율이 제정되었는가?’
앞서 제9회(세존)와 제27회(나한) 및 제13회(보살)에서 세 가지 명칭에 대해 이미 언급하였다. 여기에선 그 명칭들이 브라만교와 초기불교 및 대승불교에서 연관을 지니고 발생하게 된 상황을 살펴본다.한문으로 세존(世尊,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존귀한 분)이라 옮겨진 바가왓(bhagavat)은 ‘덕목(bhaga)을 갖춘(vat) 분’이란 의미이다. 브라만교에서부터 사용된 이 호칭은 ‘대지도론’에 덕목의 4가지 유형이 언급되어 있기도 한데, 예부터 바가왓이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다음의 6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절대적인 권능(權能)이
초심(初心)은 초발심(初發心)의 준말이다. 이는 깨닫고자 하는 최초의 마음이나 깨달음을 구하고자 처음으로 일으킨 마음을 가리키는데, 특히 불교에서 공부를 위해 처음으로 일으킨 마음이나 혹은 아직까지 그리 깊은 공부가 되지 못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그런데 초학(初學)이란 말이 단지 배움의 첫머리에 있다는 의미인 것에 반해 초심(初心)은 그 자체에 일체의 공덕이 다 갖추어져있어 내가 이미 부처라는 절대 확신을 갖는 단초가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초학자(初學者)라는 말에 비해 초심자(初心者)라는 말에는 동일하게 무언가를 처음으로 시작하
안다[知]는 것은 어떤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며, 그렇게 인지된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앎은 알음알이[知解]와 지혜(智慧)로 색깔이 입혀지게 된다.알음알이란 국어사전에 ‘약삭빠른 수단’이라 정의되어 있다. 어떤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약삭빠르게 내는 지식이나 분별심 등을 말하는데, 물론 이타적인 것이기 보단 이기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사고이기보단 다소 편협된 사고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를 한문에서는 지해(知解)라고 하는데, 지견해회(知見解會)의 준말로서 지식이나 분석력을 가리킨다. 오온(五蘊)과 연기(緣起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산스끄리뜨 표기는 ‘만주쉬리보디삿뜨와(mañjuśri_bodhisattva)’이다. 만주(mañju)는 아름다움을, 쉬리(śrī)는 행운을, 그리고 보디삿뜨와(bodhisattva)는 완벽한 깨달음의 상태에 이른 이를 의미한다. 만주쉬리는 초기에 만수실리(滿殊尸利)로 한역되었다가 후기에 뒷부분이 생략된 문수(文殊)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그 중간에는 만수실리(曼殊室利)와 문수사리 등으로 한역되기도 하였다.대승불교의 상징이기도 한 보살 가운데 한 분인 지혜의 문수보살과 우리 고대역사에서 화려한 활동을 펼쳤
학교에서 배운 우리의 고대역사는 어린아이의 머리로도 늘 미심쩍음이 일곤 했었다. 지금의 경상도 진한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며 내건 국명을 새로운[新] 그물[羅]을 펼치듯 널리 국력이 퍼져가길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신라(新羅)라 하였으며, 새로운[셔,설] 벌판[벌]에 도읍을 정했으니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고 들었으니 말이다.사실 신라와 서라벌 정도까지야 어린백성이 그러려니 하고 들었던 것이 사실인데, 나라의 왕을 뽑는데 떡을 베어 물게 하여 그 이빨자국이 큰 사람을 왕으로 삼았기에 그 명칭을 잇금 혹은 이사금이라고 했다는 말은 역
조계종단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는 공덕의 크고 작음을 견주는 비유가 등장한다. 즉 “갠지스강 모래알 숫자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들을 칠보로 가득 채워놓고 이를 여래께 보시하여 얻을 공덕”이 그 하나요, “‘금강경’ 가운데 최소한 사구게송 하나라도 받아 지녀 남에게 일러주었을 때 얻을 공덕”이 또 다른 하나다. 이 경우에 뒤의 공덕이 앞의 공덕보다 크다 하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칠보(七寶)로 가득 채워놓은 것이라면 삼천대천세계가 아니라 인천 세관창고 서너 개 분량만 되어도 어찌 경전의 게송 한 수 외워서 전해주는 공덕만 못하
현대의 불교에선 명상(冥想 혹은 瞑想)은 별도의 개념으로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남방불교의 위빠사나(vipaśyanā)와 북방불교의 선나(禪那, dhyāna)로 분류되어 발전해왔음은 물론, 특히 북방의 선나는 다양한 사상과 결합되어 다채로운 명상법으로 전승되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남방은 사제(四諦)와 십이인연(十二因緣)을 관하는 것, 무상‧고‧무아를 관하는 삼수관(三隨觀), 신‧수‧심‧법을 관하는 사념처관(四念處觀) 등의 초기불교 수행법이 상좌부전통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북방은 교종에선 천태의 일심삼관(一心三觀)과
유사 이래 불교의 나라였기에 일상생활의 말 가운데 녹아있는 불교용어가 많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익히 쓰던 어느 한 단어가 새롭게 확인되는 순간 ‘이 말도 그랬나?’라며 자못 흥미롭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생활 속의 불교용어는 대부분 한문에 기반하고 있는데, 최소한 일상생활의 용어인 경우엔 이미 의미만 충분히 전달되었으면 굳이 그 단어의 한문이 어떤지, 특히 불교의 교리적인 내용이 어떻게 담겨있는지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불교도이자 불제자라면 정말 다반사로 사용되는 용어 가운
옛날 왕사성에 부상 장자와 청제 부인은 외아들 나복과 유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자가 죽고 가세가 기울려고 하자 나복은 재산을 삼분하여 승가에 부친의 복덕을 빌 것과 집안에 쓸 것은 모친에게 맡기고, 나머지를 가지고 먼 지방으로 장사를 떠났다.청제 부인은 본심이 사특하여 아들이 떠난 후 승가에 공양도 않은 채 온갖 삿된 제사와 본인의 쾌락에 재물을 허비하였다. 이윽고 나복이 큰 재산을 모아 돌아오자 청제 부인은 미리 준비하여 아들을 속이려 하였으나 거의 탕진한 재산에 나쁜 물이 든 생활태도로 이내 들통이 나고 말았다.“
불교에서 형상화시켜놓은 세계의 모습은, 허공에 거대한 바람바퀴[風輪]가 휘감아 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그 위에 물바퀴[水輪]와 쇠바퀴[金輪]와 땅바퀴[地輪]가 세로로 쌓여져있고, 땅바퀴 위에 가로로 9산(山)8해(海)가 펼쳐져있으며, 그 중앙에 있는 산이 수미산이다. 수미산 위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하늘이 비상비비상천까지 세로로 펼쳐져있으니, 풍륜부터 비상비비상천까지를 하나의 수미세계라 일컫는다.그렇다고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모습이 바로 인도의 유일한 세계관인 것은 아니다. ‘위싀누뿌라나’란 책에 언급된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이
10여년 전에 나온 블랙코메디 영화에서 동네 폭력배로 등장하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사소한 일로 경찰에 구금되며 잡범 취급을 당하려하자 앞서 저질렀던 일까지 실토하며 자신들을 잡범이 아닌 중범죄자 건달로 취급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다. 깡패나 건달이나 그게 그거지 다를 게 뭐 있냐는 경찰의 말에 “멋있잖아요! 향기를 쫓아다니며 풍류를 즐기는 무리라는 게…”라고 답한다. 그들은 최소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행패와 난동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사전적인 내용보다는 ‘건달’에 대해 들은 바가 많은 것 같다.건달(乾達)은 산스끄리
흔히 ‘파라미타’ 혹은 줄여서 ‘바라밀’이라고도 일컫는 ‘바라밀다’는 산스끄리뜨어 빠라미따(pāramitā)의 소리 옮김인데, ‘피안으로[pāraṁ] 건너가는[√i] 상태[tā]’를 의미한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금강경’의 경명에도 나타난다. ‘금강경’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能斷金剛般若波羅密多經, vajracchedi kāprajñāpāramitāsūtraṁ)’의 줄임말로서, 그 의미는 ‘금강석도 끊어버리는 지혜로써 피안으로 건너가는 상태를 서술해 놓은 경전’에 해당한다.인도의 아리안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인더스문명은 그 활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