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하얀 마음 찾아서/ 머나 먼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땀과 눈물로 찌든 때/ 마음으로 씻어내며/ 끝없는 길을 걷고 또 걷는다// 혼자 가는 외로움/ 빗물에 스며드는 험난한 길// 달빛으로 꿰매어/ 댓돌 위에 놓으니/ 바람에 낙엽 한 잎 들어앉는다// 깊은 밤 지새우며/ 가슴속을 떠나지 못하는/ 탐진치 삼독심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하얀 고무신’ 전문”사회복지법인 연화원 대표이사로 장애우들과 함께 세상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온 해성 스님이 자비와 인본주의를 바탕에 둔 시심을 길어 올려 ‘하얀 고무신’에 담았다. 시집의 제목
“마음의 경판에 보현행원을 새기자. 21세기에 새롭게 펼쳐지는 이 대장경불사는 부처님 마음을 불자들의 마음에 새기는 역경사업이며, 지금 이 순간 나의 행이 곧 부처가 되는 현장불사다. 이 실천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이 마침내 이 세상에서 완성될 수 있다.”천축산에 들어 연지에 나툰 부처님 형상을 본 심전일운 스님은 그 앞에 무릎 꿇은 또 하나의 인물을 발견했다. 그 모습이 마치 보현보살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러러 보는 선재동자로 다가온 순간, 지금은 부족한 게 많은 이 도량을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도량으로 만들겠다”고 발원했다. 보현
“매일 아침을 맞습니다. 그러나 어제의 아침과 오늘의 아침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어제 좋은 인연을 만들었다면 오늘은 즐거운 아침일 것입니다. 어제 그렇지 못했다면 오늘은 좀 힘겨울 것입니다. 인생 여정은 매일매일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 아침 내가 좋은 인연의 시작이 되겠다고 마음을 내 보세요. 내일 아침이 기다려질 것입니다.”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은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다며 괴로워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일매일이 정말 똑같은가요?’ ‘내가 화가 난 건 다 그 사람
삶이란 인연의 연속이고, 그렇게 소소한 인연의 연기들이 모이고 모여 사람의 성향을 만들고 삶의 방향을 잡아 준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사람과 내가 사용하는 물건 등 아무리 작은 인연이라 할지라도 그 소중함은 결코 무게가 가볍지 않다. 성민 스님은 이러한 인연관계를 소중히 여겨 늘 주위를 둘러보고 지금 서 있는 내 자리를 단도리 하려 애쓰고 있다. 스님은 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뗐으며, 그때 인연 맺은 ‘중용’은 지금도 삶을 관통하는 가르침 중 하나가 되었다.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서면서도 바랑에
“‘임제록’은 선어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인류가 남긴 가장 극렬한 ‘반역의 서(書)’라고 해야 한다.”중국 임제종과 조동종 계열의 대표적 공안송고평창집인 ‘벽암록’(전5권)과 ‘종용록’(전5권)을 역주‧해설했던 석지현이 주체적 삶을 강조했던 임제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임제록’을 역주‧해설하면서 한 말이다.‘선어록의 왕’으로 평가받는 ‘임제록’에서 임제 스님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진리가 될 것”이라며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강조했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지금 나의 생각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나’라는 존재, 생각 자체를 의심해 보아야만 합니다. 제대로 의심하게 된다면 열린 만큼 경험하게 되어있고, 깨어난 만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생각이 맞다는 주관적 확신을 갖는다. 그래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불신하고, 때론 그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생각이 당연히 맞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그래서 선방 수좌 원제 스님은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는 데서 한 발 더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는/ 인생은/ 자전거 타기다// 짐을 덜어야 할 나이에도/ 바퀴가 뭉개지도록/ 또 다른 짐을 싣고/ 신발이 벗겨지도록/ 페달을 밟는다// 가자/ 저 길모퉁이 해안선 돌아/ 붉던 해도 턱 괴고 쉬는/ 차안(此岸)까지는. -‘자전거 타기’ 전문”자전거로 인생을 말하는 시가 마치 사람의 한 생을 응축시켜 일러주는 선사의 한 마디 같다. 그래서 시는 나의 생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페달 밟기를 멈추는 순간, 삶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송환된다. 그래서 살아 있으니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삶이다.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생각은 자연 법칙에 맞지 않는 인간 신념의 흔한 예다. 신념은 그 자체로는 악이 아니지만 현실과 충돌할 때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극단적인 정치적‧종교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잔인한 행동을 저질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유가 아무리 고상해도, 그 끝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 질서나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었다.근래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다르지 않다. 그 중에 태국도 일찍이 무분별한 서구지향주의와 소비주의, 향락주의에 빠져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국가의
부처님은 북천축에서 아파랄라 용왕을 교화하고 중천축으로 돌아가던 중 녹색 숲으로 빛나는 카슈미르에 이르러 “저곳은 비파샤나를 따르는 자들의 제일가는 처소로, 내가 열반에 들고 백년이 지난 뒤 한 비구제자가 저 땅에 정법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때 부처님이 지목한 비구는 마드얀티카였다. 이에 아난다는 그에게 부처님 예언을 부촉하고 “카슈미르는 방사(房舍)와 와구(臥具)를 쉽게 구할 수 있을뿐더러 선정을 닦는데 제일가는 처소”임을 다시한번 강조했다.이 카슈미르는 북쪽과 동쪽으로 히말라야와 잔스카르 산맥, 서쪽으로 피르 판잘
‘가족이란 무엇인가’ 등 일생을 통해 만나게 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담아낸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세요’를 펴냈던 정화 스님이 대승불교의 인식론과 실천론을 기초한 ‘섭대승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정화 스님은 이 책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까?’에서 불교의 연기법, 곧 생명계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가르침을 기반으로 바라밀수행을 한다면 인식의 토대가 전환되면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섭대승론’은 4∼5세기에 활동했던 무착 스님이 대승불교의 요의를 정리한 것으로, ‘모든 요소가 드러나는 원천이
평범한 미국인으로 살던 중 십여 년에 걸쳐 우울증, 광장공포증, 자기혐오,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던 바이런 케이티. 그녀는 지나치게 술을 마셨고, 잘 때는 늘 매그넘 권총을 침대 밑에 두었으며, 밤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럼에도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자녀들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그 시련과 고난의 마지막 2년간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다 부질없는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침실에서 며칠씩 나오지 않았으며 심지어 칫솔질도 할 수 없었다.
매일 출퇴근 시간에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조금 빠르게 걷고 가볍게 달리면서도 힘들어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은 “체력이 많이 떨어졌구나”, 혹은 “몸 건강에 이상이 생겼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러나 ‘숨만 잘 쉬어도 병원에 안 간다’에서는 이런 경우 대부분이 ‘호흡’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건강을 위해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으면서도, 호흡에 대해서는 그저 깨끗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는 정도밖에 신경 쓰지 않는 현대인들을 위한 호흡법을 담았다.건강을 회복하고 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법의(法衣)는 여러 생에 걸친 원력의 막중함과 일찍이 심어 둔 지혜의 종자가 성숙되어야 입을 수 있다.”스님들 사이에 전해지는 가르침이다. 다생에 걸친 ‘숙연(宿緣)’이 있어야만 가능할 만큼 ‘삭발염의’의 지중함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새벽에 깨어나 씻으면서 삭발한 머리를 만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른 번뇌 망상만큼이나 자라난 무명초를 삭도를 들어 단박에 베어낸다. 입은 승복을 다시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 또한 수행인으로서의 자긍심이다. 그러면서 쌀 한 톨에 깃든 시주 은혜의 무게가 일곱 근이나 됨을
현대인들에게 수행과 명상이 큰 관심을 받고 있으나,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수행은 그 가치를 지니기 어렵다. 명상이나 마음수련은 삶을 초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해하고 무익한 것을 버리고 자신을 정화하여 더욱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일상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수행이 참된 것이라 말하는 이유다. 그래서 수행과 명상을 실천함에 있어, 참된 수행에 이르기까지 그 자세 또한 중요한 요소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명상이 마음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앉는 방법이나 자세가 명상의 필수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
인도 힌두교의 시바신은 소를 타고 다녔다. 소가 짝꿍인 셈이다. 그렇게 힌두교 시바신의 짝이 소인 것처럼, 다른 종교와 다른 나라에도 신들과 짝이 되는 동물들이 적지 않다. 신선이 타고 다니는 학이 있고, 산신이나 산신의 사자로 대접받는 호랑이도 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고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다.예불문에 ‘지심귀명례 대행 보현보살’로 부르는 보현보살은 중생을 부처님 세계로 인도할 원력을 세우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꾸준히 정진하는 보살이다. 이 보살의 짝이 되는 동물은 코끼리다. 거칠 것 없이 진리를 향하여 모든 장애를 헤
불교는 역사적으로 초기불교, 아비달마불교 혹은 부파불교 시대를 거쳐 대승불교로 전개됐다. 그 가운데 중심이 된 부파는 설일체유부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불교사에는 아비달마불교에 대한 연구 전통이 없었고, 일부에서는 이를 소승불교로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설일체유부의 유론(有論)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대승의 공론(空論)은 성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 아비달마불교를 배제한 불교교학 연구는 큰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경량부 연구’는 아비달마 연구의 전통이 살아 있는 일본에서 이 분야 권위자인 카토
해남 대흥사에서 수행한 초의 스님은 조선후기 최고의 지성을 갖춘 수행자 중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불교, 문학, 불화, 차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차문화에 끼친 영향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초의의 영향력이 수행력만으로 이룩된 것은 아니다.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처럼 때때로 만난 인연들의 도움 속에서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그 인연들 가운데 다산은 초의의 학문적 발전뿐 아니라 곳곳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만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아들 정학연은 실질적으로 초의의 지지기반을 확대해 준 인
“세상이 못 살게 굴면 나라도 나를 내버려두어야 한다. 멀쩡하게 살면 그게 부처님이다. 이걸 알자고, 참 멀리도 갔었다. 왜 그랬을까. 하도 괴로워하니까, 끝내 마음도 나를 포기해 그냥 죽어버리라고 한 것도 같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삶이 계속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렇게 됐다. 결국, 나를 좀처럼 달가워하지 않는 삶에 크게 의미를 두지 말자는 것이 내가 얻게 된 삶의 의미다.”세상 참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아니, 버티고 있다. 우울증을 비롯해 마음 아픈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깊은 사유의 결과물을 끌어
“임금님의 상투를 튼 선비가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친 것이 알려지면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임금님 귀가 크기 때문에 백성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큰 귀를 창피하게 생각했던 임금님은 백성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신의 귀를 가리고 있던 두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귀가 큰 이유는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들으라는데 있음을 깨달았다.”전래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대략적 내용이다. 어린이들은 이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런
“한 생각에 의해 한생을 살자면/ 한생이 한마음 보지 못하고// 마음이 한마음 보면/ 말티재 넘어가는/ 저 햇님도/ 한자리에 머물러/ 해와 달빛 하나 되어/ 세세생생 없이/ 문장대 아래 있으리. -‘말티재를 넘으면서’ 전문”문장대는 법주사가 있는 속리산의 바위다. 법주사는 상인 스님이 수행의 첫 연을 맺은 자리이고, 만행의 출발점이기도 한 곳이다. 그렇게 시작해 출가 50여 년 동안 마음거울을 닦아온 수행자가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들이 좋아서 잡아놓은 것들을 한 권 시집으로 엮었다. 법주사에서 출가해 인각사, 정방사 등을 거쳐 충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