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들불처럼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됐던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장성 죽림정사를 비롯해 부산 등 전국 곳곳에서 진행됐다. 죽림정사, 용성 스님 추모부산불교계도 ‘독립’ 재연 부산종교인, 부산역서 만세금정중, 추모 다례식 봉행장수 죽림정사(조실 도문 스님)는 경내 용성교육관에서 제98회 3·1절 기념법회를 열었다. 백양사 방장 지선 스님을 비롯해 죽림정사 조실 도문, 주지 법륜, 정토회 지도법사 유수 스님 등 사부대중 1000여명이 동참해 용성 스님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평화통일을 발원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백초월-독립운동가…’ 펴내 일제강점기 불교계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옥중에서 순국한 백초월(1876~1944) 스님의 삶을 조명한 ‘백초월’(민족사)이 출간됐다.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2009년 서울 진관사에서 초월 스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 ‘자유신종보’ ‘신대한신문’ 등 독립운동 자료가 발견된 이후 연구에 박차를 가한 그는 20년 동안의 연구 성과물을 한 권으로 묶었다.초월 스님은 용성·만해 스님과 더불어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20대 후반에 강백을 역임할
독립기념관·국가보훈처 주관초월 스님 자료 15점 전시진관사도 관련 학술대회 개최 용성·만해 스님과 더불어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백초월(1878~1944) 스님이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독립기념관은 이를 기념해 6월1일부터 30일까지 야회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초월 스님 가족사진 등 관련 자료 15점을 전시하며, 서울 진관사도 6월10일 오전 11시 진관사 경내에서 추모재 및 학술대회를 개최한다.초월 스님은 서울 진관사를 근거지로 삼아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항일
“용성 큰스님께서 계속 보내주신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 주시어 만대 귀국 충절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하여 주셨나이다.”(백범 김구, 1945년 12월12일 종로 대각사 용성조사 영정 앞에서)정토회, 3월1일 기념법회 봉행 5월29일 사상계승 심포지엄도독립선언문 등 3·1운동 견인백범 김구 “광복에 큰 이바지”일제에 맞서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겨레의 스승 용성조사 탄신 150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기리는 행사들이 잇달아 열린다. 정토회(지도법사 법륜 스님
지난 5월 26일 오전 8시50분 서울 은평구 진관사. 이곳 칠성각을 해체 복원하던 중 벽 속에서 낡은 보따리 하나가 발견됐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보따리에 온통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다. 보자기로 사용된 태극기 1점을 비롯해 신대한신문 3점, 독립신문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자유신종보 3점, 경고문 1점 등 총 6종 17점 등 귀중한 독립운동 자료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관사(주지 계호)가 12월 3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는 지난 5월말 발견된 독립운동 자료의 가치와 의의를 비롯해 진관사와 한국독립운동의 연관성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를 하는 자리였다. 이날 학술세미나는 역사학계 원로인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이번 자료
부산의 6대 종교 지도자들이 한 목소리로 8 15 광복의 환희를 재연했다. 공동선 실천 부산종교지도자협의회(회장 정여)는 8월 13일 부산 여여선원 법당에서 건국 60주년 기념 광복절 평화기도회를 가졌다. 회장 정여 스님을 비롯 천주교 부산평화방송 사장 김승주 신부, 개신교 부산지방경찰청 교회 황성민 담임목사, 원불교 덕천종합사회복지관장 김영회 교무, 유교 성균관 유도회 부산본부 신준성 회장, 천도교 대연교구 김성수 도훈 등 부산의 6대 종교지도자와 사부대중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광복의 기쁨을 함께 했다. 부산=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아버님! 이 물고기를 먹어 우리 가족들이 배부를 수는 있겠으나 그리되면 이 물고기는 생을 다하겠지요. 살아있는 것을 죽이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어린 아들의 기특한 자비심에 아버지도 기쁜 마음으로 고기를 방생한다. 낚시를 해서 애써 잡은 물고기를 방생하도록 아버지에게 이른 이 어린 아이의 자비심, 타고난 성품이리라.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고사리를 꺾을라치면 “고사리도 아프다”며 말렸고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보면 부모님을 졸라 양식을 보시하게 한다. 그 영특함 역시 인근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빼어났다. 용성 진종(白龍城) 조사의 어린 시절은 이렇듯 매사 주위를 놀라게 할 만큼 자비롭고 지혜로웠다. 스님은 세계 열강의 조선 침탈이 움트기 시작할 즈음인 1864년 음력 5월 8일 전라북도
시위주도·불온문서 유포죄재판서 1년 2개월 실형 선고 봉선사 3·1운동 기념비. 성숙 일행이 주도한 광릉천 시장에서의 만세운동 시위 군중이 1000명을 넘어서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더욱 늘어나자,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던 일본경찰이 급기야 총을 쏘면서 진압에 나섰다. 일본경찰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비무장의 시위군중은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성숙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 것을 주문했고, 광릉천 시장에서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성숙과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 봉선사 대중을 비롯해 시위군중의 선두에 섰던 각 동리의 이장 등 상당수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1999년 3월 30일 광릉천 시장
장승부락 다리서 일경 대치시위군중 시간 갈수록 증가 봉선사를 중심으로 한 3·1만세시위운동의 거사 일을 3월 30일로 정하고 동민들에게 뿌릴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명의의 격문 내용까지 완성한 성숙 일행이 29일 야밤에 봉선사 서기실에 있던 등사기를 짊어지고 간 곳은 산 속 약수터였다. 성숙을 비롯해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 4명은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데 기여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며 이 약수터에서 격문 300여 장을 인쇄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다시 세웠다. 당시 봉선사 농지를 관리하며 진접면 일대에서 100여 석의 곡식을 거둬들이고 충청도에 있는 토지까지 관리하는 농감 역할을 하던 이순재는 각 동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군중 속에서 대중 염원 읽고만세운동 이어갈 방법 모색 3·1독립운동을 하루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청년학생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만해 스님은 독립운동의 준비과정을 비롯해 불교계의 참여와 역할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인쇄된 독립선언서 3만 매를 각 교단에서 1만 매씩 배포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청년학생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며 각각 경성과 지방에서 배포하도록 했다. 만해 스님은 또 “각 종교단체의 지도자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결연히 나섰으나 아무런 득도 없고 회한도 없다”며 “청년학생들도 이러한 뜻을 동포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완성에 매진하고, 특히 서산·사명의 법손임을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고 독려했다. 청년학생들은 만해 스님의 지시를 받아 각자 선언서를 갖고 서울과
만해백일장 역대 수상작 모음집 3월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 삼일절일 게다.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삼천리 방방곡곡의 민중들이 함께 외쳤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 그 함성의 원동력이 되었던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자 만해 스님. 이 책은 지난 '79년 만해 스님의 자주 독립 정신과 고결한 문학정신을 기리고 잇기 위해 대한불교청년회가 매년 3월 1일 열리는 만해백일장의 17회('96년)까지 역대 수상작을 모았다. 1회에서 8회까지의 수상작 일부가 조계종 개혁의 와중에서 소실되어 실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14회를 제외한 수상작 중 우수상 이상의 작품 총 1백28편이 실려있다. 이 수상작품집을 펴낸 대한불교청년회는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전국 유일의 권위있는 전국만해백일장의 기틀을 세
조계종 기틀 다진 淨化佛事 주도 하룻밤 破戒로 10년을 맨발 참회 “갈증이 심했나 보군. 그러나 마음이 타는 것은 물로 식힐 수는 없는 법.” 뜨거운 여름날, 진주 서장대(書藏臺) 기슭에 앉아 흘러가는 남강을 바라보던 한청년이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호국사에 들러 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마시자 이를 지켜보던 한 노승이 중얼거리듯 한 마디 내던졌다. '타는 마음은 물로 달랠 수 없는 것이라 … .' 전율처럼 다가온 노승의 말에 청년의 등줄기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 스님, 그러면 이 마음이 괴로울 때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 마음을 이리 내어 보게. 그러면 내가 고쳐 줄테니.” 뒷날 한국 현대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청년 찬호(청담의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