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최우수선사 2세 혜심 깊이 존경혜심, 상경 요청 거절하며수선사 등에서 결사 이끌어시비득실 떠날 것 신신당부최우 초심 잃고 전횡 일삼아“세상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요, 사람의 목숨은 덧없는 것입니다. 들이쉬는 숨이 있더라도 내쉬는 숨은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꿈과 허깨비와 허공의 꽃과 같은데 애써 그것을 붙잡으려 괴로워하는가. 얻고 잃음을 모두 놓아버려라’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 그때그때 생각하고 깨달아, 번뇌, 망상, 집착을 없애면 그것은 더울 때 마시는 청량산(淸涼散)이 될
호넨의 전수염불 이은 신란유배 후 간토에서 염불 전법10만여명 아미타불에 귀의‘악인부터 구한다’는 이론에반도덕적 사건 발생 잇따라신란, 아들 보내 해결 모색오히려 왜곡해 갈등 부추기자부득이 아들과의 절연 선택“젠란은 내가 말한 적도 없는 것을 한밤중에 자신에게만 가르쳤다고 말하면서 간토(關東)의 동행(同行)들을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제 부득이 부모와 자식의 연을 끊을 수밖에 없구나.”1256년, 84살의 신란(親鸞, 1173~1262)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토록 믿었던 아들 젠란(善鸞, 1216?~1286?)이 불법을 어
천태학 일가 이룬 젊은 요세지눌로부터 은근한 참여 권유불교 세속화 우려 깊이 공감결사 참여해 돕겠다고 다짐2년간 팔공산 등에서 함께 결사정토사상·교화 대상 두고는 이견요세는 만덕산서 백련결사 개창양측 제자들 후대까지 계속 교류“파도가 어지러우면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室)이 깊어야 등불 더욱 빛나리. 권하노니 그대여 마음그릇을 가지런히 하오, 감로장(甘露獎)을 기울여 쏟지 말아야 하느니.”1198년 봄, 개경 고봉사(高峯寺) 법회에 참석한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법이 강설
천황 딸이었던 문인 쇼쿠시번잡한 세상 떠나 암자서 생활죽음 앞두고 호넨에 도움 요청관승 화려한 옷 벗어던지고백성들에게 염불 전하던 호넨그녀에게 갈 수 없는 상황에서쇼쿠시에 염불할 것 거듭 당부“쇼뇨보(正如房), 당신의 병환이 매우 위중하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당신의 청대로 꼭 한번 뵙고 싶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만남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리해서 만나면 스러져가는 육신에 집착이 생길 뿐이겠지요.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먼저냐 나중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남송 최고의 학자 장시랑경산에서 대혜와 첫 만남‘격물’ 법문 듣고 큰 감동비판적 견해로 유배 생활서신 교환하며 수행 지속유배 풀려난 후 계속 교유 “돌과 돌이 부딪쳐서 나는 불빛이나 번갯불과 같은 그 한 가지 일[一着子]만을 애착하고, 그 외에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다른 도리를 용납하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만약 (혜충국사의) 법성이 너그럽지 않았다면, 번뇌가 단절되지 않았다면, 불법으로 사리분별의 견해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윤회하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감히 그처럼 천하 각지에 머물며 진흙탕에 들어가고 물속에 들어가 사람
19살에 교장수집 발원한 의천20대 후반에 정원법사와 인연직접 송에 와 공부할 것 권유임금·어머니 만류 물리치고1085년 마침내 송 유학 감행50여 고승 만나 불법 공부3000여권의 불교전적도 모아“지난해 2월에 쓰신 편지 한 통과 손수 지으신 책을 받아들고 돌아와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법사께서는 제게 언어의 밖에서 종지(宗旨)를 터득한 그 뜻이 나의 마음과 같다며, 바람을 타고 와서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전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겨자씨를 맞히는 듯 기쁨이 클 것이라 하셨습니다.또 문하에 들어올 것을 권면하셨기
출가자 길 선택한 소년 양개깨달아 큰 은혜 갚을 것 약속금생에 몸과 생명 버릴 때까지결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양개 어머니 문간에 기대서서눈물로 출가한 아들 기다려마침내 아들 뜻 받아들이고깨달음 반드시 이룰 것 당부“어릴 때 젖을 먹이고 길러주신 은혜가 깊고 깊으니 온갖 재물과 좋은 음식으로 봉양할지라도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한량없는 부모님 은혜를 갚으려면 출가만한 공덕이 없을 것입니다. ‘자식 하나가 출가하면 구족(九族)이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강처럼 흐르는 생사의 애욕을 끊고, 번뇌 가득한 고통의 바
“아직껏 귀하를 직접 뵈옵지는 못했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해갑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롭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사의 존체에 만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저 엔닌은 대사의 어진 덕을 입었기에 삼가 우러러 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품어온 뜻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왔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 대사께서 발원하신 적산원(赤山院)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와 기쁨 이외에는 달리 표현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840년 2월, 엔닌(圓仁, 794~864)
“약속대로 진언(眞言)의 전수를 허락하신다니 한없이 기쁩니다. 변함없는 두터운 후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진언과 천태가 나란히 잘 전수되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념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의 배려까지 받게 되니 제 마음이 더 없이 굳건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인도하기 어렵고, 또한 국가가 출가자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제도는 너무나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진언과 천태의 양종은 서로 통할 뿐 아니라 궁극적인 가르침의 경지도 하나일 것입니다.” 일본 헤이안 불교 두 거목편지 주고받
“대덕화상이시여, 멀리 거센 바다를 건너 이 나라에 오셔서 참으로 저의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깨우침 없이 짐이 이 도다이지(東大寺)를 세운지 어언 10여년이 지나 이제 계단(戒壇)을 세우고 계율을 받아 지니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제부터 계를 받고 율을 전하는 모든 일을 화상께 맡기겠습니다.” 일본 45대 천황 쇼무(聖武, 701~756)는 종종 사는 게 버거웠다. 모든 사람들이 떠받드는 절대 권력의 자리도 때때로 부질없어 보였다. 아버지 몬무천황(文武天皇)은 그가 7살 때 세상을 떠났다. 마음의 병이 깊었던 어머니 미야코도
“작별한지 20여년에 흠모하는 지극함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리오. 구름 자욱한 머나먼 만리길, 바다와 육지가 천 겹으로 막혀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한하노니 그리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을 강연하고 법계의 무진연기를 드날리시어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익 되게 하신다니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이로써 부처님께서 여래가 입멸하신 후 불일(佛日)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돌려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할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나이다.”690년대 초 태백산 부석
“지난해 사신이 돌아와 정법장(正法藏)께서 입적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승의 입적 소식에 제 마음이 쪼개지는 것을 억누르려 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 배는 고해(苦海)에 침몰했고, 천신과 사람들 모두 눈을 잃은 듯합니다. 어찌 이리도 통한의 슬픔이 빨리 왔단 말입니까.”653년 여름, 장안 자은사(慈恩寺)에 머물던 현장(玄奘, 602~664)은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낮이면 여러 유능한 역경승들과 불경을 번역했고, 저녁이면 매일 2시간씩 학승들에게 경론을 강의했다. 자신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은 탓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