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정진 후 큰 진전…잠잘 때도 觀 수행하며 가정화목…대자유인이 꿈 다른 여러 일정이 있어 바쁘신 와중에도 붓다락키타 스님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각각 1시간 30분씩 법문해 주시며 정성을 다 해 수행 지도를 해 주셨다. 처음엔 몸에 붙지 않아서 그런지 중노동하다 몸살 하는 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고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고 했는데 십 여일이 지나자 점점 나아지더니 나중에는 앉아서 잠깐 눈 감고 있으면 누워서 잠자는 것보다 몸이 더 빨리 풀렸다. 선원에서는 하루 1시간 30분씩 하는 수행이었지만 스님의 법문을 듣고 꾸준히 해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늘 날마다 진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며칠씩 똑같은 것만 관찰되어지기도 하고 그럴 때는 답답하고 늘 새롭고 미
희한한 한약 된장국 대중공양 1962년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 부산 범어사 청풍당에서는 때 아닌 된장국 소동이 일어났다. 아침 공양에 모든 대중들이 함께 먹는 된장국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된장국 맛이 왜 이 모양이지?” “글쎄 말이야. 된장국에서 웬 한약냄새가 나는 거지?” “가만 가만. 이거 된장국 안에 한약이 들어 있잖아? 자 보라구. 이건 감초, 이건 당귀, 아이구 이거 된장국에 시레기 대신 한약 찌꺼기가 들어갔잖아?!”아침공양을 막 시작하려던 대중들 사이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된장국에 시레기는 들어있지 않고 한약찌꺼기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이봐 갱두, 자네 어떻게 된 거야? 조실 스님 아시면 자네 쫓겨나게 생겼네” 사찰에서 국 끓이는 소임을 맡은 사람을 갱두라고 부르
권태-번민 밑바탕서 수행 시작 경행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 발견 아주 어렸을 적 나는 늘 생각했었다. 난 누구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으며 저 해와 달과 별들이 무엇 때문에 빛나는지를… 또 한때 나는 이 세상에 가짜는 없고 다 진짜만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거짓말이나 농담은 잘 하지 못하는 고지식하고 진지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980년 어느 날, 내게 일어난 두 가지 일은 내 삶을 바꾸어 놓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하나는 광주사태 혹은 광주항쟁이라 불리는 역사적인 일을 겪었을 때와 또 한 번은 어느날 한 아주머니가 파 한 뿌리 무 한 개를 들고 가는 평범한 모습에서 받았던 초라한 인간상과 삶의 비애였다.
1. 불교의 근본진리인 연기(緣起)를 생멸(生滅), 거래(去來), 일이(一異), 단상(斷常)의 대립을 넘어선 팔불(八不)으로 해석하여 어떤 고정적인 견해에 집착하는 모든 것을 철저히 부정 타파하고, 이러한 공성(空性)이 바로 연기(緣起)라는 사실을 밝힌 논서는? ① 「중론」 ② 「회정론」 ③ 「대지도론」 ④ 「백론」 2. 용수 보살의 저서로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이면서 대승불교의 종합 정리한 책으로 불교 백과사전의 형태를 띠고 있는 논서는? ① 「대지도론」 ② 「십주비바사론」 ③ 「성실론」 ④ 「구사론」 3. 초기대승경전 성립이후 6~7세기경까지 성립된 중기 대승경전의 특징이 아닌 것은? ① 중기 대승경론으로 유식계통의 경전군과 여래장계통의 경전군이 있다. ② 대승초기 경전
초기경전과 팔리 주석문헌(청정도론 등)에 나타난 수행법은 상당히 다양하다. 다양한 수행법을 크게 나누면 사마타 수행과 위파사나 수행으로 나누는 것이 초기 및 남방 상좌불교를 포함한 불교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사마타 수행이란 4색계선과 4무색계선을 닦는 것으로 5신통 등을 얻는 이익이 있다. 위파사나 수행이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에 대한 통찰을 통해 열반을 얻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청정도론 근거로 지도 파욱 사야도가 지도하는 사마타 수행과 위파사나 수행 방법은 전통적인 남방불교 수행론에 대한 해설서로 유명한 『대념처경』과 『청정도론』에 근거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마타 수행법에 대해서는 『청정도론』의 40가지 수행주제에 근거해서 지도하고 체험하고 있다. 40가지 수
경전 쓰다보면 번뇌 절로 소멸 피 뽑아 쓰듯 한 사경 77점 전시 하룻밤 꿈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불교경전이 어느 순간 내 삶의 전부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경에 집중했다. 경전을 쓴다는 게 참으로 묘해서 언뜻 작은 글씨에 한 없이 답답할 것 같지만 실제 쓰면 쓸수록 환희심이 샘솟고는 했다. 거룩한 부처님의 말씀이 내 손끝에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속됨을 버려야 하는 사경의 세계는 한없이 광활해 보통의 노력으로 다가설 수 없는 아득하기만 한 경지였다. 나는 부처님께 끝도 없이 절했다. 나를 낮추고 낮추어 마침내 나조차 없어질 때 비로소 글씨가 성스러움 자체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반야심경』,『법화경』,
밥 대신 죽, 김장독엔 소금 1950년 겨울, 한국전쟁이 한참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피난지 부산은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 보루로 남은 부산으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너도나도 모여든 때문이었다. 상기된 제자를 직접 업고 제자 고향으로 가는 동산 스님의 모습은 숭고한 '자비'로 다가온다. 마지막 피난지 부산으로 모든 피난민이 모여들자 먹을 것, 잠잘 곳이 턱없이 모자랐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모든 백성들의 형편이 아사직전에 이르니 사찰의 형편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왜색 대처승들이 사찰의 운영권을 손에 쥐고, 청정 독신 비구승들은 대처승들로부터 양식을 얻어먹고 사는 지경이었으니, 부산 동래 금정산 범어사의 선방인 청풍당의 살림도 말씀이 아니었다.
필자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연구의 일환으로 태국과 미얀마 그리고 스리랑카의 수행처를 방문하며 수행법에 대한 조사를 한지도 8년이 넘었다. 당시 방문했던 곳의 대부분은 본지를 통해서 소개하였고, 지금은 한 번도 만나거나 방문한 적이 없는 스승과 수행처를 소개하고 있는 형편임을 독자들은 양해해 주기 바라면서 이번에도 만난 적도 없는 스승을 소개하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글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무엇인가 잘못 소개하고 있는 곳이 없는가 점검하여 혹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경책해 주기 바란다. 청정도론 수행법 고수 미얀마의 수행처를 조사할 때, 양곤을 중심으로 필자의 이해의 역량하에 여러 수행처를 다니고 스승들을 통해 직접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미얀마의 경우는 대부분의 수행전통의 중심도량이나
70년대 말 경찰생활하다 서예가로 10년 전 신비한 꿈꾸고 사경 시작 내가 붓을 잡은 지도 어언 30여년. 시인은 시에 갇혀 살고 소설가는 소설에 갇혀 살 듯 나는 붓에 나를 가두고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한 글자 한 글자 뼈를 깎아내듯 온갖 노력을 기울여 쓰고자 했고 또 때로는 희열에 젖어 글씨를 써 내려갔던 깨알 같이 많은 시간들. 번뇌를 덜어내기 위한 그 지난한 세월의 편린들을 모아 이제 곧 사경전시회까지 열게 됐으니 그 감회를 무어라 표현해야 될까. 내가 서예를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였다. 청원이 고향인 나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자라 나중에는 경찰관이 됐고 결혼도 했다. 그런데도 늘 무언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지나가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계에서 근무했던 탓에
백봉 거사와의 만남으로 수행에 박차 일년에 두 번 ‘7일 철야정진’ 십년째 대전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백봉 선생의 책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늘 큰 스승의 가르침에 갈증을 느끼던 나는 백봉 선생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수소문 하고 다녔지만 인연이 아닌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79년 부산에 내려가 며칠 묵을 기회가 생겼다. 백봉 선생이 부산 보림정사에 있다는 말을 들었던 나는 부산에 내려가자마자 전화번호부를 뒤져 보림정사를 찾아 전화를 걸어 백봉 선생을 만나게 해 달라 간절히 부탁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아침 마치 꿈만 같았던 백봉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백봉 선생은 나에게 예를 갖춰 대해 주었다. 현문과 우답이 몇 차례 오가고 나서 백봉 선생은 “
Q : 보임(保任)이란 무엇이고 왜 하는 건가요? A : 보임(保任)은 보호하고 맡긴다는 뜻입니다. 돈오를 얻은 사람이 일상사에서 혹시라도 마음이 유혹될까 조심하여 자성을 보호하는 것이고, 또한 행하고 일하고 걷는 것 등을 자성불에게 믿고 내 맡기면서 부처의 행을 익히는 것입니다. 원오(圓悟) 스님은 『심요(心要)』에서 ‘심(心)중에 한 물건도 남아있지 않으면 바로 목석과 같은 무심인(無心人)이 된 듯하여, 우치하고 둔한 것과 같아서 특별한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 이렇게 기르고 길러서 생사를 관하되 심히 일없는 한가로운 것과 같아 문득 조주, 남전, 덕산, 임제와 더불어 동일한 견지에 서야 되니, 간절히 스스로 보임(保任)하여 이 무생무위(無生無爲)의 대안락한 경지에 머물도록 해야 하느니라.’
형과 아우 죽음 이후 참선 수행 시작 헌책방서 찾은 백봉 선생 책에 감화 61년. 아홉 살 되던 해였다. 동생이 아프다며 징징대는 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다녀온 날. 여느때처럼 가방만 내팽개치고는 해가 저물도록 밖에서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동생이 죽은 것이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리 없는 나이였지만 모든 사람들이 우는 것이 분명 슬픈 일이었고 함께 장난칠 동생이 없어졌다니 나에게도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 두 살 터울의 형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뭔가 이상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던 형제들이 차례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