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명랑함 속에 깔린 산만함 인식 나와 남이 하나임을 수행하며 체득 글을 쓰려고 하니 우선 수행하기 전의 나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불교학을 전공으로 공부했지만 나는 이론이 아닌 수행이나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유 없이 부정적인 마음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래도 실제로 수행을 전혀 해보지도 않고 가르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순전히 그런 의도에서 시작된 수행은 내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수행하기 전의 나는 새벽별 보기 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았다. 대학 다닐 때도 새벽반 학원가고 학교 가서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도 몇 개씩 하면서 늘 바쁘게 살았고,
금강경 독송하며 마음 너그러워져 적연법사 법문 듣고 사구게로 생활 금강경을 독송하는 동시에 집에서 백일기도를 했다. 한 번은 관음정근을 마치는 과정에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배에서 끌어올라 나오는 눈물, 참회의 눈물, 두터운 업을 녹이는 눈물 등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금강경 독송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 보문품 백일을 마쳤고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백일 마쳤다. 또 홍산 스님께서 지장기도를 하라고 하셔서 『지방보살보원경』 백일기도를 들어갔는데 마장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집에 불이 두 번씩이나 날 뻔 했으며 그래도 다행히 불은 기적적으로 끌 수가 있었다. 두 번씩이나 일어나고 보니 백일기도를 마치기가 무서워서 스님께 말씀드렸다. 천도식을 해드리고 백일을 마치라고 하시면서 기도 중에는 지장 기도
6.25한국전쟁 후 운허 스님은 경기도 양주의 봉선사 주지 발령을 받아 봉선사로 돌아왔다. 봉선사를 떠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봉선사는 옛날의 그 봉선사가 아니었다. 6.25한국전쟁 통에 대웅전은 불타버렸고 절 모습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교사들 먹이려고 양식 탁발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운허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했던 광동중학교 역시 전쟁중에 폭격을 맞아 학교건물은 폐허로 변해 있었고 임시 가건물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살림이 어려워 교사들 월급도 주지 못하는 형편이라 교사들이 끼니를 굶어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봉선사의 살림형편도 말씀이 아니었으니 절에서 도와 줄 수도 없었다. 운허 스님은 드디어 비장한 각오로 양식 탁발에 나섰
세계의 수행자를 소개하는 본 코너를 통해서 처음으로 스리랑카 출신의 스님을 소개하게 되었다. 바로 헤네폴라 구나라타나(Henepola Gunaratana 1927∼)스님이다. 스님은 작년에 서울 보리수선원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셔서 약 한 달 정도 집중수행지도를 하셨고, 가양동 홍원사의 초청으로 10월 하순 다시 한국에 오셔서 7일간의 집중수행지도와 학술대회의 기조 법문을 해주실 예정이다. 미국에서 10만부 이상 보급된 『가장 손쉬운 깨달음의 길』(손혜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01)이라는 책으로 한국의 수행자들에게도 이미 알려져 있는 스님이다. 반테 지(Bhante G)라는 애칭으로 서양인들은 부르고 있는 이 스님은 1968년 이후 미국에서 머무시면서 전 세계에서 수행을 지도해 오고 있는 분이다. 197
고된 시집살이에 절로 관음보살 염불 神病 앓다 금강경 만나 10년째 독송 오남매에 외아들인 남편을 만나 스물여섯에 결혼했다. 시집을 와서 보니 시어머님께서는 신병(神病)으로 앓으시어 여름에도 이부자리를 개어 본적이 없었다. 시름시름 앓으시는 어머님은 늘 무당을 불러 굿을 하시면서 한평생 신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다. 시골에서 논밭일 밖에 모르시는 시아버님을 따라 논밭 일을 배우며 호미자루 들고 고추밭 고랑이 얼마나 길었던지 처음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밭을 매면서 어느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관세음보살님 명호를 찾으면서 일하다보면 일이 쉬웠고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불법의 인연이 있어 조그마한 암자에서 토속신앙과 기복으로 절과 인연을 맺어 7년 세월을 무언가에 쫓기듯
서른 살에 대학졸업후 미얀마행 몸-마음 관찰로 ‘자의식’ 깨달아 서른 살 여름, 10년 만에 늦은 대학 졸업을 한 나는 더 이상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경계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기대도 선후배들의 바람도 모두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렵고 불안했다. 점점 사람들을 만날 자신이 없어 골방으로 골방으로 몸과 마음을 숨겨갔다. 마침 주말 위파사나 수행을 함께 다니던 친구가 미얀마에 먼저 갔고 이내 나를 불렀다.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지금 수행을 해 보자. 그리고 미래는 그 다음에 결정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나는 동의했다. 그동안 수행은 나중에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내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운허 스님이 통도사에 머물며 후학들에게 교학을 가르치고 있을 무렵, 이 나라 불교계에서는 ‘왜색불교를 몰아내자’는 ‘불교정화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불교정화운동은 청담, 효봉, 동산, 금오 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청정비구가 이끄는 불교’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때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서울 안국동 선학원으로부터 운허 스님에게 연락이 빗발쳤다. 하루 속히 서울로 올라와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하라는 독촉이었다. 그러나 운허 스님은 초연한 자세로 오직 불교사전 편찬을 위한 원고작성과 후학양성을 위한 강의에만 전심전력을 쏟고 있었다. 그러자 선학원 측의 대의 스님이 운허 스님을 설득하기 위해 통도사까지 내려왔다. “나는 이쪽저쪽 다 자격이 없네”
산을 오르는 데는 여러 길이 있다. 길마다 특색이 있고, 오르는 사람도 각자의 일정과 등산 경험, 육체적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어떤 길을 따라 오르던지 정상이라는 목적을 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각기 다른 길을 가지만, 행복을 이루고자하는 공통된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하더라도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트야 나라얀 고엔카 부부(사진 왼쪽에서 첫번째와 두버째)가 도반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행복을 추구하는 직접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행복은 물질적인 행복이 아니라, 정신적인 행복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말고, 법
고3 때 반야심경 듣고 발심해 禪學 전공 마음 병 치료 위해 사회운동에도 관심 병들어 있는 나를 발견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병의 원인도 병명도 몰랐지만 때때로 분명하게 나타나 괴롭히는 증세로 난 심각한 병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마음의 병, 자의식이 너무 심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큰 장애를 가져왔다. 세상은 살얼음처럼 불안하고 물속처럼 무거웠다. 무기력이 습관처럼 찾아오기 시작했다. 심란함과 억눌림 속에서 보낸 고3 시절. 이때 불교는 내게 『반야심경』과 함께 다가왔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반야심경』을 읽고 또 읽었다. 입에서 나는 큰 소리는 귀를 압도하고 마음을 압도해 잡념을 없애 주었고 잠시나마 휴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사감선생님
금강경 독송할 때면 눈물이 ‘주르륵’ 애착-탐욕 없애나가는 게 삶의 목표 사십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라는 종교를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에 소개돼 있는 불교대학을 찾아 등록을 하고 기초교리부터 배우고 난 후 2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경전 전문반에서 공부하고 있다. 경전 속에 시설되어 있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초입에서 만난 업설을 받아 지니면서 나는 비로소 나의 업을 생각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을 거듭해 오는 동안 쌓였을 업의 높이와 두께를 감히 짐작이나 해볼 수 있을까. 금생에 지은 업만도 얼마나 많은데…. 사람으로 태어나 일생을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의 여부는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온 업보다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가
한글경전 시대를 열어준 스님 부처님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진지 어언 1600여년이 지났건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해 놓은 ‘팔만사첨 법문’은 ‘팔만대장경’이라는 한자(漢字)의 감옥에 갇혀 지내왔다. 우리말 우리글이 있으되 부처님의 경전이 한자의 감옥 속에 갇혀 있으니, 자연 불경은 물론 민초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불교는 ‘배우기 어렵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한문투성이’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세납 74세의 나이에도 운허 스님은 도선사 석불전에 올라 14일 동안 '역경불사 원만회향'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大雄殿’ 대신‘큰법당’ 민중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답답함을 절감한 백용성 스님이 1920년대에 불경의 한글화 작업에 착수했고, 그
어릴 때 ‘기복불교’ 보며 미신 간주 불교방송 들은 뒤 매일 금강경 독송 한 배 한 배 절을 한다. 온 몸을 바닥에 내려놓을 때마다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갖가지 욕심들로 뭉쳐진 커다란 덩어리의 한 귀퉁이가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108배의 참회기도를 마치고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심호흡을 몇 번 하고난 후 『금강경』을 독송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 신 새벽 거실에 울려 퍼지는 소리.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남서북방 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내가 불교를 처음 만난 것은 대여섯 살 무렵, 할머니를 따라 갔던 절에서였으니 45~46년 전쯤의 일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할머니를 통해 만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