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염불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A :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어느 가정주부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인터폰 소리가 울리면서 남편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두말없이 반갑게 문을 열지요. 화면에 등장했던 남편은 본체만체 하면서 현관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자, 그럼 잠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은 진정코 남편의 실상일까요 물론 남편이라고 의심치 않으니까 문을 열겠지만 뭔가 미심쩍습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카메라의 눈을 통해 화면에 비친 사람을 남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화면에 나타났던 남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인터폰의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남편은 사라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자신의 눈을 통해 보이는
칼산지옥 해매다 40대에 佛緣 맺어 무진장 스님 법문 듣고 새 사람 돼 나이 40을 불혹(不惑)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나도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모든 유혹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실수와 후회를 끊임없이 반복하던 끝에 부처님을 만나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내가 40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제일 먼저 배운 것이 ‘나무아미타불’ 법장비구의 48대원이다. 처음엔 그저 무심히 극락세계를 그리며 염불하던 나는 ‘염불만일회’라는 야단법석을 만나 차츰 염불의 목적과 가피의 내용을 다른 각도록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처음에 “염불을 만일 동안?” 하며 한참을 계산해보니 27년하고도 넉달 25일이었다. 이 까마득하기만한 숫자에 아연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Q : 지난번에 석가모니불의 구도심을 인격화하여 법장비구라고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구도심은 위대한 분이니까 가능하지, 온갖 모순에 찌들어 사는 일반인들과는 사뭇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언제까지 중생으로 남아 있어야합니까? A : 전혀 그럴 이유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본인도 법장(法藏)이라는 자각에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공동이름은 다 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으로만 따진다면야 못나거나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니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불리는 이름과 나이가 다르다고 해도 법장으로서의 가치만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구원되어 만나게 되니, 언제나 부처와 부처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내
부천 석왕사 시흥장애인종합복지관(관장 이상호)이 장애아동의 진학에 대한 보호자 교육을 실시한다. ‘우리 아이 취학 및 진학 결정하기’란 주제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12월 10일 오후 2시 30분 복지관 1층 강당에서 열린다. 이번 교육에는 시흥교육청 방효인 장학사가 ‘시흥시 특수교육의 현황과 문제점’에 대해, 정왕초등학교 김선철 교장이 ‘특수학교 및 특수학급 장애아동 지도 사례’에 대해 강의한다. 시흥장애인복지관은 강의 직후 별도의 질의응답 시간을 마련 장애아동의 취학 및 진학과 관련한 보호자들의 어려움과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계획이다. 참여인원은 30명 선착순이며 참가비는 무료. 031)431-9114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아찬 마하부와 냐나삼판노(Ajaha Mahaboowa Nnasampanno, 1913~)스님은 태국불교의 숲 속 수행전통을 부활시킨 아찬 문(Ajahn Mun, 1870~1949, 법보신문 2004 7/7, 762호 참조)스님의 직제자 가운데 생존해 계신 유일한 스승이다. 아찬 마하부와 스님은 태국 동북부의 중심도시 가운데 하나인 우돈 타니(Udorn-thani)에서 1913년에 태어나셨다. 태국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어려서 출가하여 팔리경전을 공부하면서 수행도 겸행하였다. 하지만 수행을 지도받을 스승을 만나지 못해 혼자서 수행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9단계의 팔리 시험 과정 가운데 3단계를 마친 후, 아찬 문을 만나게 되었다. 29세 때 아찬 문 제자돼 아찬 마하부와가 29세가 되
불교대학 다니며 새로운 수행법 알아 직접 만든 수리정사에서 도반과 수행 삶의 도피처로 삼았던 부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 인과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불교대학에 등록을 했다. 불교를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불교 대학에서 만난 많은 도반들과 스님들 새로운 수행법들로 불교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중 내가 선택한 사불수행은 부처님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하면 할 수록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 색칠 공부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음 가는대로 손 가는대로 그릴 수 있는 창작미술도 아니었다. 학교 졸업 후 붓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잡아본 나는 얇은 종이 밑으로
불교 만난 후 깊은 상생관계 깨달아 삶의 도피처에서 알게된 인과의 도리 오늘도 나는 미명에 수리정사에 들었다. 사불에 들어가기 전 잠시 눈을 감고 옛일을 회상해 본다. 15년 전 내가 사는 아파트에 탁발승 세 분이 찾아 왔다. 아파트 동민들을 위해 기도해 주겠다며 아파트 아낙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있는 덕운사로 향했다. 처음에는 스님들의 행동이 재미있기도 하고 이웃들과 어울리는게 좋아 무심결에 따라갔다. 가서 절하는 법, 합장하는 법부터 배우고 부처님 일대기를 들으면서 불교에 대해 마음이 열렸다. 절에 가는 것이 마냥 좋아 그때부터 10여 년을 절에 가서 청소하고 스님들 공양을 돕고 빨래를 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절을 했다. 절을 하면서 내 밑바닥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뒤를 돌
Q. 맞닥뜨리고 있는 어려움은 뚜렷한데, “나무아미타불!”이나 하고 있는 게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니 염불하고 있다가, 공연히 짜증이 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염불을 해야 하나요? A. 세상적인 기준을 앞세우려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부처님과의 만남을 기꺼워하지 않습니다. 꿈꾸고 있는 사람이, 그 꿈에서 깨어나기를 싫어한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염불로 살아가는 사람은 남들에게 아부하는 말을 할 새가 없습니다. 자신의 참생명이 부처님생명임이듯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사람이나 모든 사건도 그렇게 대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칭찬보다 오히려 갖은 구박을 받기도 합니다. 한창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을 깨울 때,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알고 있다면
새벽마다 도량 찾아…아내도 이젠 동참 40일간 잠 안자고 수행…날마다 좋은날 새 생명을 찾게 해주는 『금강경』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고, 독송을 할 때면 저절로 지극한 공경심으로 『금강경』을 대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어디를 가나 항상 『금강경』을 모시고 다녔으며, 그러다보니 때로는 『금강경』만 펴놓아도 온몸에서 전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렇게 고통과 좌절로 숨막히게 했던 언어습관이, 자신의 죄업을 통감하고 부처님 전에 참회하며 『금강경』을 독송함으로써, 나를 괴롭히는 몹쓸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깨닫게 됐던 것이다. 정말이지 이런 호된 업장이 아니면, 어떻게 죄 많은 중생이 『금강경』을 만나 부처님의 호념부촉을 느끼고, 『금강경』독송을 통해 한없는 기쁨과 환희심을 맛볼
말 더듬는 습관 탓에 절망의 세월 보내 『금강경』 독송하며 업장의 깊음 깨달아 집안에서 7남매 중 막내로 자랐고,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으며, 현재 인문계 고교 교사로 재직 중이라면, 누구나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뒤돌아보면, 나름대로는 누구보다 더 지난날의 아픈 상처로 인해 무척이나 마음고생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 발단은 어릴 때부터 수십 년 동안 말을 더듬는 언어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너무나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때문인지, 이제는 아예 굳어버린 듯 아무리 고쳐보려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남을 지휘해야하는 장교생활과 아이들을 가르쳐야하는 교직생활을 해야 하기에 이러한 장애를 그냥 놔 둘 수가 없어서, 대학을 마치자마자 본격
우화 스님이 주석했던 전남 나주 다보사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지기 시작한지 장장 1천 6백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한국불교 1600년 역사에는 실로 수많은 스님들이 지나 가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 별만큼이나 많을 그 숱한 스님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의 스님들에 대해서만 빈약한 기록에 의해 그 모습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단편적인 기록이라도 남아있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설화처럼, 전설처럼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빈약하기 그지없는 단편적인 기록마저 없는 스님의 이야기는 세월이 흐를수록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져가고 있다. 누가 이 스님을 모르시나요? 이번에 특별히 단편적인 모습이나마 기록해두고 싶은 스님의 경우도 ‘잊혀져 가는 스님’이다. 이런 맑고 향기롭고 따뜻한 마음을
보타산에서 바라본 낙가산. 낙가산은 관세음 보살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낙가산 정상까지는 50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낙가산 원통전 앞 마당에서 순례단이 예불을 봉행하고 있다. 해수관음상 앞 광장에서 순례단은 삼배를 올린후 관세음정진을 했다. 현재 해수관음상은 보수중이여서 상세하게 볼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국불자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매일 수천여명이 관음상을 친견하고 있다. 보타산 해수관음상 1997년 10월. 보타·낙가산에서는 대규모 점안법회가 봉행됐다. 높이 33m의 해수관음상 점안법회였다. 1995년 묘선 스님의 원력으로 시작된 이 불사에는 보타·낙가산의 지역은 물론 전국의 불자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불자들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금목걸이와 금반지, 금팔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