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시작 후 가족갈등 대화로 해결 내면세계 완성이 사회정의 이끌어 몇 년 전 모 일간지 특집에서 “방하착”이란 화두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내 기준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깊은 뜻을 알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 위파사나 수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고 실천해야하는 것이 “내려놓고 버리는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관찰을 하면 그 굼틀거리던 것들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방하착의 의미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좀 가부장적이고, 폭력을 좋아해 타인에 대해 잘 보이려는 마음이 대단히 컸던 것 같다. 집안 식구들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얼굴을 먼저 찡그리고 폭력적인 마음이 나타나곤 했다. 결국 이러한 마
보리방편문 몸 속서 꿈틀대도록 정진 집착 남아도 평온하니 큰 내면의 혁명 청화선사 보리방편문 『일만송 수행일기』는 『아, 달라이라마, 지혜의 큰 바다』, 틱낫한 스님의『평화로움』등을 번역한 강옥구 시인이 ‘보리방편문’을 일만독송하며 자신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솔직 담백하게 기록한 수행서다. 1998년 5월 25일 ‘보리방편문’첫 송을 시작한 그는 매일 50번씩 독송해 갔다. 한문 200자가 채 안되는 ‘보리방편문’이지만 그속에는 “안팎으로 일어나고 없어지는 모든 현상과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덧없는 행동들을 마음이 만 가지로 굴러가는 아미타불의 위대한 행동 모습으로 생각하고 관찰하라”는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는 청화 스님이 준 텍스트와 해설을 대조하며 독경해 갔다. 처음엔
프라 몽콜 탭무니 스님이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프라몽콜 탭무니 스님. 전편에 이어서 프라 몽콜 텝무니 스님이 창안한 담마카야 수행법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 먼저 수행을 시작할 때, 사마타(마음집중) 수행의 방법으로 부처님의 덕에 대한 마음챙김(佛隨念)을 ‘삼마 아라한’이라고 마음으로 반복하면서 마음을 안정시킨다. ‘아라한’이란 부처님이 지니신 덕목 가운데 하나로 괴로움의 원인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탐진치 삼독(三毒)을 모두 없애버리어 공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삼마’는 ‘올바른’이라는 의미이다. 정신집중에 수정 활용 ‘큰 효과’ 부처님 덕에 대한 마음챙김은 위파사나 수행을 하기 전에 마음을 집중하고 안정으로 이루기 위한 예비적인 수행(네 가
다메크 스투파가 위치한 녹야원의 옛 사원터. 붓다는 이곳에서 다섯 수행자들에게 최초의 설법. 즉 초전법륜을 설했다 사르나트 고고박물관에 위치한 초전법륜상. 5C 제작. 다메크 스투파에 조각된 문양. 굽타 시대의 전형적인 꽃무늬와 기하학적 문양이 인상적이다. 6C 제작. 이 역사적인 순간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 끝에 여러 가지 관련 기록들 중 현장감 있고, 실감나게 초전법륜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칼루파하나 박사의 『싯다르타의 길』(재연 스님 역)을 인용하기로 한다. 비록 경전을 직접 옮긴 것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기술한 내용의 출처가 거의 팔리 경전이라는 점에서 장엄한 순간을 설명하는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특히 중도, 연기 등 불교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초전법문의 묘사가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회장 현성 스님)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자원봉사 한마당을 펼쳤다. 청교련은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청소년 70여명과 함께 10월 31일 광명 혜명양로원을 찾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목욕돕기, 네일아트, 발마사지, 주변 청소 등 쾌적한 생활 환경 만들기에 앞장섰다. 또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염주와 연꽃을 만드는 등 불심을 키우는 시간도 마련했다. 참가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끼를 발휘해 마련한 레크레이션시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어울리는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박주미 기자 jumi@beopbo.com
불교레크레이션협회(회장 운광 스님)가 어린이 법회 지도자를 위한 강습회를 개최한다. 불교레크레이션협회는 11월 14일 오전 9시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제 34회 겨울불교학교를 위한 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한다. 찬불가와 율동, 장식풍선과 마술 등 어린이 법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법을 강습한다. 강습회 참가비는 3만원이며 전화로 접수받는다. 02)738-7860 박주미 기자 jumi@beopbo.com
수행 시작 후 비로소 오랜 방황 끝마쳐 나는 원래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불교에 대해 조금씩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의 아내를 만나고 결혼을 한 후부터 서서히 발심을 하기 시작했으나 그것도 아내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방편중의 하나였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고,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듯이 나도 아내의 불심과 정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꽤나 미안했었고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인가 의문을 제기하면서 나 자신을 조금씩 뒤 돌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러한 미안한 마음을 없애보려고 금강경과 천수경 사경도 해보았고, 모 선원에서 삼천 배에 도전도 해보았다. 글쎄 얻은 것이라고는 불경에 나오는 한자를 지식으로 습득한 것과 절을 함으로써 나도 삼천
해인사는 고암 스님이 가장 오랫동안 주석했던 사찰이다. 화를 낼 줄 모르는 스님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 세 가지 큰 병에 걸려있다. 그 세 가지 큰 병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탐내고. 성질내고,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삼독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성불의 길이라 일러주셨다. 그러나 삼독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늘 다짐하면서도 순간순간 ‘아차!’ 하는 사이에 삼독심에 빠지고 마는 것이 바로 우리 어리석은 중생이다. 특히 어처구니없는 일, 못된 일을 당했을 때 화를 내지 않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우리가 늘 인욕바라밀을 강조하는 것도 억울한 일, 분한 일, 고통스런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는 인욕바라밀이
사경은 진신사리 모시듯 정성으로 수행 후 가정 평화-건강 되찾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남편과의 불화가 잦아졌을 때 직지사에서 운영하는 사경반에 들어 매주 화요일마다 사경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보살님들 하는 게 마냥 보기 좋아 한 것이었는데 하면 할수록 내 자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손에 펜 잡을 일이 드물었던지라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집안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당당해지기도 했다. 싫은 소리를 몇 번씩 해야 책을 보던 아이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는 저절로 책을 보는 습관을 갖게 됐고 텔레비전 보는 시간도 줄고 아이들과의 대화시간이 늘어났다. 사경 수행을 위해 붓글씨까지 배우는 것을
Q :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보면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라고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 아닌가요? A : 이런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말이 갖는 인식의 한계에서 말미암는 숱한 오해 중 하나가 돌출된 결과일 뿐입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자면 욕심을 버리는 것은 발원의 시작이며, 발원을 하는 것은 욕심의 궁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욕심과 발원은 삶을 가꿔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필수요소인 셈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무엇인가를 끝없이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의 연
사찰은 일찍 여읜 어머니의 넓은 품 부처님 발자취를 뒤따르듯 부처님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쓰고 그 환희와 고마움에 절을 올리는 일이 일상이 된지 벌써 5년이 다 돼간다. 이 생 끝날 때까지 이렇게 수행하면 부처님 같아질까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수행의 순간만은 내와 부처가 하나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어머니나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다 불자가 된 것에 비한다면 나는 아주 특별한 계기로 부처님을 알게 됐다. 20대 처녀시절에 한 친구가 결혼식을 하는데 예식장이 아닌 사찰에서 한다는 것이다. 신기한 마음에 따라가 보았는데 그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성스러움과 경건함 그리고 소박함이 배어 있었다. 소란스러움 속에서 15분 만에 끝나는 그런 예식이 아니었다. 그때
득남 기원하다 부처님 참 뜻 알고 수행 이웃과의 조화로운 삶 속에 ‘참나’ 있어 내가 불교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나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구 갓바위에 가서 늘 기도를 올렸고 그 공덕 때문이었는지 딸 둘에 이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는 아이 키우는 재미에 부처님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대구 팔봉산 갓바위에 가보니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있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보고 지나쳤을 것인데 그 날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2500년이라는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 갔는데도 사람들이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의 태어남을 저토록 찬탄하는 이유는 뭘까? 불교라는 것이 그저 현세구복적인 종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