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술대회 일정 ·한국선학회 추계10월 18일 오후 2시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 ·한국선문화학회 추계10월 19일 오전 10시영월 법흥사 ·보조사상연구원은 월례10월 20일 오후 2시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추계국제10월 20일 오전 10시통도사 설법전 ·불교문화연구원 추계국제10월 26∼27일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불교학연구회 추계11월 10일 오전 9시동국대 덕암세미나실 ·보조사상연구원 국제11월 17일 오전 10시법련사 ·한국불교학회 추계11월 17일동국대 문화관‘수확의 계절’ 가을을 맞아 불교학회의 학술대회들이 연달아 개최되고 있다. 한국선학회는 10월 18일 오후 2시 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에서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한동민 수
2007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을 다녀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우리 시대의 통일해법으로 원효의 일심(一心)사상을 제시해 주목을 끌고 있다. 10월 7일 KBS스페셜 ‘남북 정상회담 특별기획-도올의 평양 이야기’에 출연한 김용옥 교수는 대학생 200명을 대상으로 자신의 시각에서 바라본 정상회담 소감을 전달하며 원효의 일심사상을 통일해법으로 소개했다. 원효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간의 문제를 일심사상으로 해결한 통일사상가였고 우리 한마음 속에 진리의 세계가 다 들어있다는 불교사상으로 통일 사상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언론에서 제기한 남북정상회담의 문제점들과 언론에 의해 잘못 전달된 회담 내용들을 지적하는 한편 자신이 생각하는 통일의 의미에 대해 1시간 동안에
2007 해외 상반기 불교학 박사논문올해 9월 일본 교토불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필원 씨의 논문 「아라한의 연구」는 초기불교 당시 부처님을 지칭하던 아라한이라는 용어가 불교 이전에는 어떻게 쓰였는지 그리고 부파불교시대를 거치면서 이 말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고찰한 연구이다. 이 씨의 논문에 따르면 『숫타니파타』에서는 아라한이라는 용어 대신 바라문, 무니, 붓다 등의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가 『담마빠다』가 성립할 무렵 불교에서 이상적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부파불교 시대에 들어서면 아라한의 개념에도 분화가 일어나 아라한의 우열이 논해지기 시작한다. 초기 경전 전반에 걸쳐 아라한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등장하는 심해탈과 혜해탈은 아라한의 최초 분화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씨는 “본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용성 조사께서 서대문 감옥에 계실 때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함께 수감돼 있던 목사님들이 한글 성경을 읽고 계셨기 때문이었죠. 불교가 들어온 지 1600여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한글로 번역된 불경이 없었기에 가슴을 치신 겁니다.” 법손인 죽림정사 조실 도문 스님의 용성 진종 조사에 대한 회고이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불경은 모두 한문이었다. 불자들은 복을 빌며 기도만 하는 기복 불교에 매달렸을 뿐,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길이 막막했다. 불경은 스님들만의 ‘전유물’이었다. 3·1 운동 당시 처음으로 독립운동과 민족의 상징물로 태극기를 쓰자고 제안했던 용성 스님은 한문으로 된 불경을 한글로 풀어쓴 ‘역경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세수 58세 되던 해인 19
“니가 승중(비구니)이 되어 잘해서 승중계에 혁명을 일으켜서 큰 중이 되면 안되나.”성철 스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출가한 청담 스님의 딸은 그로부터 13년 뒤 한국 최초의 비구니 강사가 되었고, 후일 봉녕사에 한국 최초의 비구니 율원을 개원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한국은 물론 세계 비구니사의 물길을 터가는 과정이었다. 국내 최초의 비구니 강사 한국 최초의 비구니 강사 묘엄 스님〈사진〉의 주강 50년을 기념해 봉녕사승가대학이 기념논총을 출간했다. 이 논총에는 묘엄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은 제자들과 인연이 있는 학자, 스님들의 논문 21편이 수록됐다. 해외에서는 한국 비구니승단이 남녀평등 승가의 상징처럼 추앙되고 있지만 사실상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한국의 실정 또한 ‘평등’을 논할 수준은 아니다.
“용성 큰스님께서 계속 보내주신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 주시어 만대 귀국 충절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하여 주셨나이다.” 때는 1945년 12월 12일, 일제 강점기에 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3·1 독립만세의 진원지였던 종로 대각사를 방문해 용성 조사의 영정 앞에서 흐느끼며 인사를 올렸다.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민족을 구하였기에 ‘겨레의 육신보살’이라 추앙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함께해 머리를 숙이며 눈시울을 적시었다. 3000리 금수강산을 터전삼아 살다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2000만 겨레를 구하는데 일생을 바쳤기에, ‘겨레의 육신보살’이란 호칭이 임시 정부 요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흘
2007 해외 상반기 불교학 박사논문올해 8월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천학(히메지독쿄대 준교수·사진) 씨의 논문 「일본화엄사상의 연구-헤이안기 화엄사기류(華嚴私記類를 중심으로」는 헤이안시대 화엄문헌 중 사기(私記)류를 통해 일본 고대말기의 사상적 특징을 고찰한 논문이다. 지금까지 일본사상사학계에서는 헤이안시대 화엄종이 다른 종파에 비해 쇠퇴했다고 평가해왔다. 그러나 김천학 씨는 “헤이안기 화엄사상이 쇠퇴했다는 평가는 일부 수긍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기존 학설을 부인했다. 김 씨는 그 예로 “교넨(凝然)의 『화엄종경론장소목록』에는 25편정도의 사기의 명목이 보일 정도로 어느 정도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또 “사기류의 사상을 검토한 결과 헤이안시대 화엄
옛 고승들은 국정책임자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대통령이 법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홍보가 전무해도 수백명의 스님이 호텔을 가득 채우고, 이교도인 대통령 후보의 후원모임을 앞장서서 마련하고, 대통령을 수행하는 이에게 줄을 대서 대형불사를 일으키는 우리시대 불교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라 평가했을지 의문이다. 대선을 앞두고 일부 정치승들과 권력층간의 결탁관계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동국대 김상현〈사진〉 교수가 신라시대 국왕과 정치, 불교의 관계를 조망한 논문을 발표해 주목되고 있다. 김 교수는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신라문화』 제30집에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정법치국론(正法治國論)-원효와 경흥의 국왕론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김 교수는 “7세기 후반 신라 중대왕실의 국왕들은
사명대사가 호신불로 모셨던 금동불상이 100년 만에 발견됐다. 현재 포항 대성사에 소장된 이 불상은 이번 달 말에 국고보물로 공식 지정될 예정이다. 포항시 북구 용흥동 대성사에서 발견된 이 금동여래좌상은 높이 9.4㎝ 규모의 고려말 조선초 양식의 불상으로, 최근 문화재청과 조계종의 문화재조사작업 도중 불상 내부에서 사명대사의 친필 원장이 발견되면서 사명대사 호신불임이 밝혀졌다. 조계종 문화부 이분희 행정관은 “불상 양식이 사명대사 생전보다 훨씬 앞서 조성된 시기인 것으로 보아 사명대사가 직접 조성한 불상은 아니지만 1913년 조선총독부 도록에도 이 불상이 사명대사 호신불로 명시돼 있다”며 “불상에 발견된 친필 원장으로 볼 때 사명대사가 이 불상을 소지하고 다닌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계종 문화부는 9월 18일 2007년 조계종 성보보존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성보보존위원은 총 62명으로 정책분과 11명, 동산분과 22명, 고고·건축분과 13명, 박물관·보존분과 7명, 무형분과 9명이다. 조계종 총무원은 지금까지 임기 4년의 성보보존위원과 임기 2년의 전문위원으로 분리 운영되던 제도를 올해부터 성보보존위원으로 통합하여 총 62명의 위원을 위촉했다. 이번에 개정된 성보보존회령은 성보보존위원의 임기를 2년으로 단축했으며, 성보유형에 따른 분과위원회를 둘 수 있게 했다. 조계종은 성보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포교적 활용에 관한 사항을 조사 심의하기 위해 1998년 성보보존위원회령을 제정하고, 성보문화재에 대해 전문적 식견이 있는 위원으로 성보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종단 성보문화재와 관련된
2007 해외 상반기 불교학 박사논문올해 7월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일미 스님〈사진〉의 학위논문 「전략적 제휴 : 일본불교와 한국불교의 복잡한 관계, 1877~1912」는 1877년에서 1912년 사이의 일본불교와 한국불교의 역동적인 관계를 재평가한 논문이다. 지금까지 개항기 조선에 침투한 일본불교는 ‘일제의 앞잡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민족주의, 일본불교는 제국주의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개항기불교는 해석돼왔다. 일미 스님은 이 논문에서 “(한반도에 건너온) 일본의 스님들은 자신이 속한 종파의 이익을 위해서, 때로는 정부와 투쟁하면서 활동했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또 “한국의 스님들 또한 한국의 정치적인 미래보다는 그들 자신의 개인적이고 제도적인 욕구를 보호하고 키우는데 관심이
“아버님! 이 물고기를 먹어 우리 가족들이 배부를 수는 있겠으나 그리되면 이 물고기는 생을 다하겠지요. 살아있는 것을 죽이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어린 아들의 기특한 자비심에 아버지도 기쁜 마음으로 고기를 방생한다. 낚시를 해서 애써 잡은 물고기를 방생하도록 아버지에게 이른 이 어린 아이의 자비심, 타고난 성품이리라.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고사리를 꺾을라치면 “고사리도 아프다”며 말렸고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보면 부모님을 졸라 양식을 보시하게 한다. 그 영특함 역시 인근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빼어났다. 용성 진종(白龍城) 조사의 어린 시절은 이렇듯 매사 주위를 놀라게 할 만큼 자비롭고 지혜로웠다. 스님은 세계 열강의 조선 침탈이 움트기 시작할 즈음인 1864년 음력 5월 8일 전라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