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부산 홍법사에서 신행학교를 졸업하고 신행단체가 결성 되었다. 모두 초발심으로 알찬 신행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며 봉사활동과 일주일에 한 번 씩 사경하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뜻을 모았다. 그리고 스님을 모시고 입재식을 가진 지가 어느 덧 6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왔다. 시중에 나와 있는 사경 지를 활용한 펜 사경이 사경수행의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사경에 대한 지식과 개념이 없었다.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스님께서 사경수행법에 관한 책을 소개해 주셨다. 도반들과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며 사경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공부했다. 그렇게 사경에 대한 개념을 어렴풋하게 숙지하고 나니 전통 사경에 관한 관심이 생겼고, 그 관심이 붓글씨 사경을 배울 수 있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선생님의 지도 아래
참선을 시작하면서 다른 수행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하루 중 한 번은 반드시 시간을 내어 반야심경을 사경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암송한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집에 모셔놓은 부처님께 예를 다해 절을 올린다. 물론 불서를 읽는 일도 게으르지 않고 있다. 불서를 공부하면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무비 스님의 ‘임제록’과 ‘전등록’, ‘직지’ 그리고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이다. 이들 불서는 우리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보는 것과 듣는 것, 느끼는 것, 먹고 마시는 것에도 불성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무명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고 깨닫는 순간 세상이 바뀌면서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되고, 슬픔과 괴로움, 성냄, 탐욕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나는 제7일 안식교회를 다녔다. 한국전쟁 직후 먹을 것이 귀한 시절, 교회를 다니면 미군들이 주는 밀가루와 옷가지를 비롯한 구호물자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의 세대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지만 교회를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더욱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반면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절에 나가 부처님께 기도를 했다. 나는 이런 어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상에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배웠기에 법당에 밀가루를 뿌렸다가 어머님께 혼쭐이 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절에 다니고 있으며 지금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신다. 세월이 흘러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교회
나는 역학을 강의하는 강사이다. 나에게는 역학을 강의하면서 생겨난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오는 사주란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문제는 분명하건만 답은 어디에 있는지 늘 해결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 강의를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를 청강하시던 한 분이 서울 보리선원을 소개시켜 주었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호기심에 이끌려 강의를 듣던 학생들과 함께 보리선원을 찾아가게 됐다. 보리선원의 첫 느낌은 수행에 관심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여타의 사찰과는 다른 분위기에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처음이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화려한 우리나라의 절과는 다른 소박하고 정갈한 느낌의 법당에서 나는 안내하는 분의
절은 초하루와 초파일에만 가는 줄 알았다. 초와 공양미 올리고 가족건강, 소원성취를 기원하며 절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 이것이 내 불교 지식의 전부였다. 경전은 접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다라니를 한번 해보라며 권하시는 분이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많이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했다. 처음 법당에 와 앉으니 정진하는 모습이 참 한심해 보였다. 몇 시간씩 같은 것만 반복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렇게 하고 있는 보살님들도 이해가 안 갔다. ‘할 일이 없나? 시간이 남아도나? 도대체 왜?’ 온통 의문뿐이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할 일이 없는 보살이 돼 매일 정진에 동참하고 있다. 그것도 내 생활의 영순위로 두고 말이다. 다라니 정진처인 덕양선원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성적이지만 2
우리 부부는 향을 피우고 그 향내와 함께 좌복 위에 앉아 새벽을 맞이한다. 1987년 결혼 이후 매일 아침 이 향내와 더불어 서재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평생을 그렇게 하셨는지라 나의 남편은 일상사적인 것이 되었지만 법당에서 하는 기도 소리에만 익숙한 나에게는 그 의식이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고 다소 생소하기도 하였다. 스멀스멀 부처님의 염불소리에 익숙해져가던 199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일 년 상을 집에서 모시면서 나는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서재에 앉아 『금강경』과 『반야심경』, 『천수경』을 읽었다. 이렇게 서서히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그러나 간절함이 없었기에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절에 의무감내지는 책임감에 의해 다니기만 했다. 이러던 2008년 범어사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불교학생회에 가입하면서 맺게 된 불교와의 인연이 이제는 내 삶의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변에서도 나를 부르기를 유발승이라고 할 정도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런대로 잘 지녀왔다고 볼 수 있을까? 종교가 없던 이들이 나와 인연을 맺어 불교에 입문하는 경우도 많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변에 전하는 가장 쉬운 길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 믿는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교리를 배우거나 기도에 의지하는 것과 함께 수행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리라. 교리를 배우면서 입문하는 단계를 지나면 절대적인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기도라는 신행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는 불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되지 않는다. 불교를 믿는 궁극적인
“…어머님이 날 기르실 제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이시고, 젖은 자리 어머님이 누우시고 마른자리 자식 뉘어 키우시고 튼실하게 잘 자랐다는 말 한마디에 온갖 고통 잊으셨네. 청년 되어 집 떠난 자식을 생각하며 천 줄기 만 줄기 눈물 흘리시며, 어미 마음은 자식 따라 다니시네….” 오늘도 나는 『부모은중경』을 독경한 후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마음을 모아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해 첫 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 돌아가셨다. 유독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터라 어머님이 항상 그리웠다. 나도 자식을 낳아 키우기에 첫째 딸을 보면서 어머니 생각에 한 없이 울었다. 그야말로 고장 난 수도꼭지였다. 49제를 치르는 동안 어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라는 마음에 절을 시작했다. 당시 절은
아내가 허리를 다친 것은 20여 년 전의 일이다. 5년 전부터 다친 허리가 더욱 악화돼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하더라도 완치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만 아내는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 절을 다녔다. 부처님께라도 매달려 보려는 마음이었던 듯 했다. 한 번 고통이 찾아오면 한 달 가까이 누워 거동도 제대로 못했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조금이나마 편하게 절에 다닐 수 있도록 함께 법당을 찾기 시작했다. 그냥 그렇게 불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아내를 좇아 기도도 하고, 철야정진도 함께했다. 그렇게 시작한 신묘장구대다라니가 벌써 10만 독을 넘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아내 그리고 나의 가족은 부처님의 가피로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
내가 처음 염불을 만난 것은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에 의해서다. 할머니는 언제나 천주 염주를 손에 걸고 하루 종일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외우셨다. 할머니의 염불 속에는 가족의 안위와 안녕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글자 한자 읽을 줄 모르는 할머니였기에 어린 마음에 불교는 그저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무릎을 다쳐 2달간 쉬면서다. 지루한 시간을 보낼 양으로 『금강경』을 보게 됐는데 “항하의 모래 수만큼”이라는 뜻이 너무도 궁금했다. 그래서 더 많은 불서를 보게 됐고, 불교를 조금씩 이해해 갔다. 더욱이 『반야심경』, 『천수경』 등을 한자로 쓰고 그 뜻을 해석한다는 것이 나름대로 멋지게 느껴졌다. 그러나 불교는 그때까지 나에게 신
우리가 불교적 삶을 살고 수행을 하는 목적이 업장소멸과 지혜·복덕의 성취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하고 충족하는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갖고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신심이 청정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믿고 받아들이겠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아예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면 『금강경』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본 『금강경』은 어느 구절이 특별히 더 중요하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다. 모든 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 맥락과 하나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마음 깊이 새기는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도 취하지 말고 법 아닌 것도 취하지 말지니라. 이러한 까닭에 여래는 항상 ‘비구들이여
불교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군 복무를 마치고 새봄 학기의 복학을 앞두고 한적한 농촌의 고향에 머무는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어 동네 뒤편 산기슭에 있는 산사를 찾아간 것은 아마도 속세의 인연이 있어 예정된 수순을 밟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후부터 나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불교서적을 탐독하면서 마침내 참선이라는 것을 해야 하겠고, 화두참선수행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뜻을 두게 되었다. 나는 화두사상을 가진 재가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나를 화두참선이라는 정법(正法)으로 이끌어주신 이 땅의 무수한 선지식, 선사, 간화선 수행자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설사 훗날에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겪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화두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