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덕성화 35년 전 쯤에 부모님께서 사기를 당해 숙식이 어려운 상황일 때 일이다. 방세와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재학 중인 학교 뒷산에 천막을 쳤다. 재학생을 비정하게 쫓아내진 않을 거란 생각에서 오빠와 둘이 의논해 부산대 뒷산에 천막을 치게 됐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모셔와 부모님과 함께 살며 산 속에 구덩이를 파서 콩나물을 키워 팔았다. 또 산에 병아리를 풀어 놓고 산닭을 키우며 생활하고 틈틈이 아르바이트해서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나마 있던 천막을 철거당했다. 하지만 산에서 모은 조그만 돈으로 집식구들과 내려와 3평 남짓한 단칸셋방에서 8명이 생활했다. 다행스럽게도 졸업 전 오빠와 나는 취직을 했고, 가족들 모두 푼돈을 열심히 모았다. 그 무
▲58·진여화 집에 와선 시간이 날 적마다 인터넷으로 염화실 카페에 들어가 계속 듣습니다. 복습을 하면서 한문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초등학생용 한문노트를 사다가 그려나갔지요. 그야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이었어요. 큰스님께서 번역하신 한글법화경(이것이 불교다)도 비교해 가면서 썼습니다. 영어법화경책도 구입해서 같이 써내려갔습니다. 한문노트에 한문으로 쓰고 그 밑의 칸에 비교해 가면서 영어로 써내려 갑니다. 금강경보다 소설 같은 느낌이 들어 재미있습니다. 한문학자인 Burton Watson씨가 한문법화경을 영어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배우는 한문법화경과 순서랑 내용이 같습니다. 모르는 단어 나오면 영어사전 찿고 모
▲58·진여화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금요일!! 무비 큰스님께서 법화경을 강의하시는 문수선원을 가는 날입니다. 물론 끝나고 보살님들과 남아서 사경도 하지요. 무비 큰스님께서는 탄허 스님의 법맥을 이은 대 강백으로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내셨고 범어사에서 수행하시면서 전국각지의 법회에서 불자들의 눈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너무 근엄하시어 처음에는 다가가기 조심스러웠지만 가까이 갈수록 인자하시고 자상하시어 자애로운 아버지 같으십니다. 경전도 이치와 시대에 맡게끔 정확히 설명해 주시며 법화경 사경시간에는 처음부터 한자 한자 뜻을 풀어주셔서 어려운 경전이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런 분 곁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큰 행복입니다.
대대로 유교적 가풍이 뿌리 깊은 야성 송씨 가문으로 출가해 농사지으며 1남4녀 기르고 교육시켰습니다. 40대에 접어들어서야 지역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절에 다녔습니다. 나름대로 가정을 위해 자식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염불하면서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때인가 마음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법회나 법문 같은 것은 몰랐습니다. 공양미를 이고 가서 부처님 전에 치성을 드리는 것이 신행생활 전부였습니다. 불교가 복 빌고 재수 빌고 하는 이런 것만은 아닐 텐데, 무엇인가 가르침이 있고 실천 덕목이 있을 텐데 하면서 지냈습니다. 마침 풍기장에 갔다가 불자 친구로부터 풍기불교법우회라는 신행단체에서 매주 금요일 법회를 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불교교리
다시 마음을 다잡고 ‘금강경’ 공부를 했다. 그런데 임신이 됐다. 사실 임신이 된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38세였다. 유전적인 문제가 있어서 조기 유산을 항상 걱정하던 터라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조기 유전자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도 웬일인지 예전처럼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누가 주신 아긴데 무슨 일이 있겠어?’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배짱이 생긴 것 같았다. 결과는 건강한 아기라는 판정이 났다. 이제 조산을 예방하는 수술을 해야 했다. 울산에서 대구까지 가서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어려운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공부를 그만 둘 수 없었다. 임신 기간 내내 누워서 공부했다. 워낙 고위험 산모라 예방차원에서 입원도 몇 차례 했었다. 출산 전에 ‘금강경’ 1만독이 빠
내 어린 시절 기억 속 불교는 정확히 말해 절에 간다는 것이다. 절은 향내가 가득하고 심심하고 재미없는 곳이었다. 물론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 그냥 엄마가 가자고 하니까 한두 번 따라가다 지겨워하며 돌아오는 곳이었다. 엄마는 도대체 절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참 궁금했다. 하지만 나에겐 너무나 딴 세상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이가 들어 어떤 문서에 종교를 적을라치면 항상 당연하다는 듯 불교라고 당당하게(?) 적고는 했다. 절에는 관광이나 가면서 말이다.남들처럼 학교 잘 다니고 어려운 대학시험도 한 번에 붙는 등 그리 힘들지만은 않은 20대를 보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고 나서부터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비슷할 것 같다. 사랑해서 결혼한다지만 결혼 하고 나니 상대가 그렇게 미워 보일 수
차 명상공부로 얻은 작은 깨달음을 나처럼 어둠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비심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공부가 익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노보살님 인연으로 호스피스교육을 받고 자원봉사를 하게 됐다.처음 시작한 호스피스는 환자에게 다가가기 어색했다. 아파하는 모습들이 눈물짓게 했지만 모든 것을 인연의 이치로 보며 이내 환자와 그 가족들과 함께 인연 따라 울고 웃으며 삶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했다.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부처님 법을 조금씩 전하며 호스피스 지도법사 정법 스님에게 수계를 받도록 안내했다. 호스피스 봉사 보람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돌처럼 굳었던 원한이 봄 눈 녹듯 녹아내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남편은 죽어가는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눈물로 용
해병대서 제대한지 두 달 된 작은 아들이 말을 걸어왔다. “엄마!” “왜?” “엄마와 난 달라.” “뭐가 달라?” “엄마는 사람이 된 것 같은데 난 사람이 안 된 것 같아.” 아들 말에 난 크게 놀랐다. “명상 중 일어난 현상들이 일상에서도 이어지는 지 늘 점검하라”던 지운 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이것보다 확실한 점검이 있으랴. 4년 전 내 모습을 되돌아보면 몸서리가 쳐진다. 어떻게 그리도 무명 업을 대물림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을까. 감정과 생각 그리고 느낌에 속아 사니 못사니, 잘났네 못났네 하면서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보며 분노했었다. 현재 이 순간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날을 보니 참으로 아득한 윤회의 시간들이었다. 많은 고통과 지독한 시련들은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밝은 지혜 빛을 얻기까지 내 스승
교리 공부를 마치고 기도가 무엇인지도 잘 모를 때 우연히 읽고 있던 책에서 “100일이면 몸이 바뀌고 1000일이면 생각이 바뀐다”는 글귀를 읽었다. 그래서 1000일 기도 뜻을 세웠다.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백겁 동안 쌓아온 수많은 죄악도 한 생각 돌이켜 소멸한다는 뜻이다. 한 생각 바꿔 보자는 큰 원을 갖고 기도를 발원한 것이다. 물론 1000일 기도 동안 두 아이가 입시를 치르고 대학에 진학했다. 또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해 ‘금강경’과 무상계를 매일 읽으며 49재를 올렸다. 기도를 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있었지만 1000일을 목표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다. 금강경 독송, 신묘장구대다라니 사경, 반야심경 사경, 광명진언 독송….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 초입에 있는 대광명사. 이곳 대광명불교대학에서 ‘열반경’ 경전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재가 하안거 수행 결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재가’, ‘하안거’, ‘수행’. 각각 단어 뜻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재가 하안거 수행’이라는 말은 생소했다. 도반이 책까지 사주며 “같이 해보자”고 권했다. 그 말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해보기로 작심했다. 1000일 기도 중이라 매일 사시 예불 뒤 ‘금강경’ 독송이나 “관세음보살” 염불 등을 하고 있었다. 도반이 “기도 중 자비도량참법을 한 권씩 읽으면 된다”고 하기에 별 부담도 없었다. 1000일 기도도 90일쯤 남은 시점이라 나름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그런 의미로 90일 동안 자비도량참법기도를 하며 1000
자기 자신에 대한 냉엄한 성찰과 치열한 구도정신, 수행만이 공부하는 참선인의 덕목이요 나아갈 길임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안타까움과 자책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참선 장소가 어디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있든지 내가 할 나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살들이 참선공부를 부러워 하길래 여건이 허락한다면 좋겠지만 주부라서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 쫓겨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입처개진이요 좌복에 앉아 주인공 노릇하며 참선하는 것이 바로 수처작주 아닌가요”라고 답하며 웃은 일이 있습니다. 선방에는 대다수가 보살인데, 저보다 참선 연륜도 오래고 정말 열심히 수행하고 있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보살들 중에서 앞으로 견성할 분
▲ 74·경각 제가 불법을 만난 지 30여년이 넘었지만 무늬만 불자이지 제대로 된 신행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7년 여름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다가 미타선원에서 공파 스님의 미타 사십팔원 강좌가 신행으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우연히 마지막 주 강의를 듣고 새삼 발심해 계속 사시예불에 동참했습니다. 선방 대법장, 정법안 두 보살의 간곡한 권유로 참선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해운정사 진제 큰스님으로부터 “부모 미생전의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받고 참선을 시작했는데 도저히 의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나의 면목이란 다름 아닌 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의 자리가 아닌가’라는 알음알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원 진불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