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던가? 고등학교 때 친구가 다니는 절에 처음 가기 시작했다. 스물이 넘어서 참선을 하게 되었고 또한 세월이지나 초기불교와 위빠사나 수행을 접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호흡을 바탕으로 하는 선정수행을 주로 하고 있다.호흡으로 선정 얻는 수행성과 원하는 마음이 장애놓아버리는 방법 알아가며호흡수행 참 면모 깨달아호흡수행을 하게 된 계기는 부처님 성도 과정의 일화와 관계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시고 나서 두 스승을 만났고 두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버리고 6년간 고행했다. 또한 그것을 버리고 태자시절 기억을 떠올려
사경삼매 기도로 생활한지도 한 해가 다되어 간다. 수년간 몸이 좋지 않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전전하고 다녔다. 병명도 몰라 고생했고, 신경성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약과 스트레스에 악화되기만 하고 육체와 정신은 더욱 황폐해졌다. 그리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인 모를 증후군에 고생절에 다녀도 한숨만 늘어미소원 법당이 삶 전환점광명진언 사경으로 평화좋은 법문을 듣고 편해지고 싶어 이절 저절 다니던 어느 날 대광명사에 정착했다. 절에서는 언제나 보살들이 반가이 맞아주고 주지스님은 좋은 법
윤택한 가정과 낙천적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다. 결혼 후 부모 도움을 일체 거절하고 무일푼으로 독립하여 식료품 가게를 창업했다.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더 큰 사업과 일을 하려고 보니 성실, 건강, 재력, 인격을 갖추어야 되는데 인격(인품)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마음공부를 시작한 것이 30대 초반이다.확장하던 사업에 승승장구국제금융위기로 결국 부도대비주 고성염불 전율일어거주하던 구미에 법회창립도인으로 명성이 높은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시작했다. 불교 공부는 물론 심신수련에
두 번째로 원했던 서울대 병원 면접과정에 떨어졌다. 낙담했다. 그런데 정말 좋아해서 감히 바라지도 않은 세브란스 병원에 최종 합격했다. 출근 연락 때까지 감사수행도 하고 1만배도 회향해 예쁜 법명도 받았다. 원하던 병원에 합격도 했고, 법당에선 젊은불자가 절도 예쁘게 한다고 예뻐해 주고, 스스로 갈증도 해결했으니 자신만만했다. 곧 다가올 쓰나미를 모른 채….간절히 원한 간호사 생활병원근무, 공포로 다가와도망 뒤 3천배 21일 기도재취업 성공…자신감 얻어병원에서 출근하라는 소식이 왔다. 첫 상경 길에다 첫 사
“ātāpī sampajāno satimā(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하고 있는가? 불교에서는 우리네 삶을 고해(苦海, 괴로움의 바다)로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다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가 열반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와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들기 직전에도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洲, 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洲), 法燈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歸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아이가 돌이 지나면서 근육병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별한 치료법도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이 점점 굳어진다는 비관적인 병이었다. 아이의 행복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뒀다.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던 중 손윗동서 형님 덕분에 부처님을 알게 되었다.근육이 굳어지는 아이직장 접고 수행·기도 매진대비주수행에 가족 변화고통은 곧 가피 오는 통로참선과 절수행을 하면서 아들의 병은 수행에 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다. 매일 절을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3000배를 다녔다. 그런 중에 임신이 되었고 당시 사찰의 스님께
결혼하고 시어머니와 살면서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힘든 날들이었다. 우연히 지인이 신청해준 해인사 백련암에서의 교사불자연수에 일탈의 기분으로 참가하게 됐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삼천배를 하는 연수였다. 집 떠난다는 즐거움으로 책 한권 달랑 챙겨 갔는데 삼천배는 당황스러웠다. 무작정 몸을 맡겼다. 죽비소리에 맞춰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고 온 몸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됐다. 매일 들었던 법문은 왜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이 났던지…. 보살계를 받고 성철 스님이 지어 놓으셨다는 법명을 받고, 집에 돌아가 남편 부처님, 시어머
빨래가 생각난다. 내 빨래는 밤바람에 나부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가기 전 빨래해서 긴 장대 꽂은 빨랫줄에 널어놓고 가면 해지고 야간 자율학습 마치고 집에 오면 그 때까지 내 옷들만 펄럭이고 있었다. 때론 비오는 날에도 가로등에 비춘 내 얇은 속옷이 내 속살 인양 부끄러웠다. 서둘러 빨래를 걷어 집 안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렇게 새엄마는 내 옷만 남겨둔 채 다른 빨래들을 걷었고, 내 마음엔 빨랫줄에 남은 내 옷가지들처럼 서운함이 하나 둘 늘었다.태어나면서 익숙한 엄마 냄새는 할머니가 채웠다. 잠자는 나를 가만히 어루만져 아늑한 꿈
나는 신이었다. 30대 중반에 남편이 먼저 떠나고 홀몸으로 어린 아들 삼형제를 키우며 살았다. 그러다 42세에 신을 모시는 몸이 되었으나 집안은 여전히 편안하지 못했다. 큰아들이 우울증과 정신질환으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고, 엎친 데 덮친다고 작은 아들까지 우울증과 영가장애가 왔다. 두 아들을 고쳐보겠다고 갖은 방편을 다 하다 보니 집안 형편은 자꾸 기울어 갔다.30대에 남편과 사별하고접신한 채 삼형제 키워두 아들 정신질환에 고통죽을 각오로 수행해 가피2013년 1월, 둘째 아들이 꿈속에서 대비주 기도를 하였다고 했다. 보름이 지
단언하자면 남은 생의 원력은 일심으로 정진하여 화두를 타파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수행할 수 있고 수행의 시간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절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법 만나기를 발원하며 부산에서 남해 보리암까지 다녔다. 그렇게 3년이 되던 해, 소림사 참회 산림 법회에서 홍제사 회주 혜국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내 남편, 내 자식만 챙기며 모두들 자신의 것만 찾는가?”라는 스님의 호통에 의심이 턱 하고 가슴에 붙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갈
내가 처음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리게 된 것은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아버지의 49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뇌경색으로 10년을 고생하다가 겨울나무 수피같이 차가운 몸으로 내 품에서 임종하는 모습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생로병사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 무렵 내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고 위로해주던 도반의 소개로 불교방송에서 ‘대승기신론’을 강의하시던 원허 지운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법문 중간 중간에 스님께서는 늘 법문 듣고, 사유하고, 수행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때까지 난 수행은 큰스님들이 산
지난 삶은 파괴적 습관과 분노의 독약을 품고 우울하고 슬픔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마치 전쟁터와도 같았다. 2009년 가을, 지인의 소개로 덕양선원의 대비주수행을 만나게 되었다. 암투병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는 금요철야 108독 정진이 나에게는 너무 무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비주 수행 중, 스님의 목탁소리가 내 온 몸의 세포 속으로 파고드는 체험을 하였다. 그 후로부터는 극심한 피곤함이 서서히 사라졌다.슬픔 만들며 매일 전쟁 분노 독약 품고 살아와다라니 20만독하며 참회수행으로 여여해진 일상BBS불교방송 대비주 순례로 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