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직원 영향으로 발심역경 속에서 매일 삼백배하심 하는 마음 배우면서고통 줄고 행복을 되찾아 ▲정심화·59 불교를 접하게 된 건 신심 깊었던 시어머니(공덕월 보살님)의 영향 때문이었다. 40대에 홀로되신 시어머님은 4형제를 키우면서 그 가난하고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불심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려운 살림에도 절에 불사가 있을 때면 보시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탓에 당대 큰스님으로 알려졌던 금오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았고 가까이에서 시봉하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염불을 놓치지 않으셨다. 아침저녁으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도 염주를 돌리는 것을 자주 보았다. 새벽마다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셨고, 금강경도 열심히 읽으셨다. 그러면서
나보다는 남을 의식해시비·분별심으로 고통참선 수행 접한 뒤로나를 알아가는데 집중 ▲선혜일·53 어렸을 때부터 50이라는 숫자와 함께, 화장기 없는 얼굴에, 어딘지 모를 어느 법당에서 법복을 입고 합장한 채 부처님을 향해 다소곳이 서 있는 내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부처님밖에 모르고 사시던 어머니 밑에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 그런가 보다 생각하기도 하며, 늘 내 미래가 궁금했었다. 그래서 살다가 힘들 때마다 얼른 50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처님 앞에 서 있던 ‘나’는 지극히 편안하고 고요한 모습이어서 인생에서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더 이상 구할 게 없는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안
회사 위기로 미래가 불안불력회 알고 절수행 시작매주 3000배 실천하면서삶 참회하고 자신감회복 ▲진연화·47 살아보지 않은 앞날을 어느 누가 미리 알 수 있을까마는 나의 삶에서 이런 시간과 마주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오빠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며 회사의 성장과 나의 미래를 연결시켜 생각해 온 내게 회사의 위기상황은 내가 계획했던 앞으로의 시간과 삶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진행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패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조급함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마음은 거칠어지고 부정적이 되었으며 좁디좁아졌다. 나라고 믿어왔던 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행의 필요성을 느꼈다. 할아버지
야근·출장에 심신 쇠약부정적인 마음까지 일어하루 천배 100일 기도로삶의 새로운 의미 되찾아 ▲고결·51 8년 전이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은 늘 시간에 쫓겨 살아야 했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했으며, 취재 때문에 자주 출장을 떠나야 했다. 몸이 피곤한 것도 문제였지만, 마음이 지쳐가는 것은 더 큰 걱정거리였다. 직업의 특성상, 늘 PD로부터 부정적인 비판을 들어야했고, 작품이 방송되고 나면, 일부 시청자들의 악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마음은 끝도 없이 부정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우주의 법칙은 정확했다. 내 마음이 시커멓게 먹구름으로 변하니, 과연 먹구름
지나온 삶 되돌아보니후회·안타까움만 남아참선접하고 새삶 찾아10안거 원만회향 발원 ▲일심법·54 마흔 아홉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정초부터 급성충수염으로 수술을 받았고, 실밥도 빼지 못한 채 무리를 한 탓에 설을 앞두고 심한 방광염으로 며칠을 드러누웠다.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새해를 맞았다. 병상에 누워 생각하니 결혼하고 20년 세월, 뭐가 그렇게도 바빴던지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 무상하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허탈한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아들 둘이 부산 남산중학교를 나온 탓에 안국선원을 짓고 있을 때부터 무수히 그 앞을 지나다녔건만, 인연이 없었던지 법당 참배조차 하지 않고 지나갔었다.
IMF 사태로 회사부도가족과 돌연 중국이민인터넷서 경전 접한뒤삶의 역경서 희망찾아 ▲ 수연정·58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어린 시절부터 새벽마다 아버지의 목탁소리를 들으며 하루일과를 시작했고,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관음정근을 들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신심 깊었던 집안 어른들과 달리 어린 시절 의무적으로 절에 다녔을 뿐 불교공부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불교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명 ‘깨달음’에 있는 데 법회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고, 맹목적으로 무조건 믿으라는 기복신앙으로 흘려가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주 보는 경전도 과장이 많은 것 같아 정말 제대로 경전공부를 꼭
세번 암수술에도 재발치료 거부하고 참선죽음 놓아버린 순간삶의 참 행복 찾아와 ▲ 상락화·63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또 수술을 권했다. 몇 년 전 유방암에 걸려 두 번이나 수술을 하고, 신장에도 암이 발견되어 신장마저 하나를 절제했는데 이번에는 갑상선에서 암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언제 또 다른 곳에서 암이 발생할지 알 수 없고 병상에서 생을 마감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의사의 처방을 거부하고 무작정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주는 약도 모두 버렸다. 마지막으로 불교공부와 수행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죽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최대 화두는 생사에 관한 것이었다. 심오한 고뇌의 시간이 계속
남편 주사로 가정불화괴로움에 시작한 사경모든 것에 감사함 갖자삶의 행복·기쁨 되찾아 ▲무진행·73 어느 가정이나 걱정거리하나 쯤은 있는 것 같다. 우리 집 역시 그랬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딸 넷을 두었다. 비록 넉넉한 삶은 아니었지만 네 자매는 크게 속 썩히는 일없이 무난하게 성장해줬다. 이런 딸들이 늘 자랑스러웠고 대견했다. 주위에서도 우리 집을 늘 부러워했다. 그러나 주사가 심했던 남편은 말 못할 고민거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돌아와 가족을 괴롭히는 날들이 적지 않았다. 아이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고, 자연 남편과 다투는 일도 잦았다.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울 때면 붓글씨를 쓰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가슴에 응어리진
▲ 법인화·53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조문을 다녀오면 이유 없이 머리가 아프고 몸이 쑤시고 나른해서 기운이 없었던 적이 많았다. 병원에서는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며 쉬어야 한다는 말만 했다. 피로회복제를 먹어도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고통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야 낫곤 했다. 주위에선 기가 약해서 그런 것이라며 조문가기 전에 ‘주머니에 고춧가루를 넣고 가라’, ‘옷에 바늘을 꽂고 가라’는 등의 방법들을 처방해 주곤 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 마다 찾은 곳은 단골 점집이었다. 점집에서 살풀이를 하고 나면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 새해 운수를 보거나 이사를 하는 등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점집을 찾
▲가정주부·50 어린 시절 모범적으로 생활했다. 크게 부모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학교생활에도 충실했으며 친구관계도 원만했다. 현실생활에 잘 적응했고,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이런 내 믿음은 흔들렸다. 자식을 내 잣대대로 움직이려 했다. 그 잣대에 어긋날 때면 아이들을 추궁하고, 화를 내고 공격하면서 아이들과 심한 갈등을 빚었다. 이런 시간이 계속되자 몸에도 이상이 생겼다. 곳곳이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고, 마음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수시로 솟구쳤다.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과 이게 무슨 일인가’하는 반문도 했다.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 힘겨운 나날이
▲ 경찰·57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부산의 한 경찰서에서 교통지도 계장으로 재직했다. 그 당시 업무상 과도한 스트레스로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앉아 있기도 힘들었고, 어지럽고, 몸살에 걸린 듯 온몸이 떨리는 고통이 이어졌다. 여기에 알 수 없는 초조감으로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불안함과 우울증까지 생겨 병원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병원에서 종합병원까지 각종 검사와 진료를 받았지만 뚜렷한 병명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한 종합병원에서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병은 크게 낫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찾았다. 매주 한 번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1년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역시 원인을 알
▲ 학원강사·40 인생을 제대로 살기위해 늘 최선을 다했지만 내 마음 속에 사라지지 않는 불안함은 늘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결정적인 고통의 순간에 금강경 속의 ‘여여(如如)’란 단어를 보면서 순간 나름의 큰 답을 얻었다. 세상의 모든 답은 이미 나에게 다 갖추어 있음을 그때서야 깨닫고 매일 108배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청화 스님을 알게 됐고, 그분의 삶과 공부가 불교공부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다. 이후 청화 스님을 존경하여 모인 도반들과 인연이 되어 수행하면서 많은 도움과 자극을 받았다. 그렇게 불교에 입문한지 9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불교에 입문한 이후 처음 3년은 누구나 그렇듯 참 행복함을 느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입학해 교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