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1월19일 서울 도선사에서 열린 다비식을 끝으로 청담 스님의 장례는 마무리됐다. 그러나 조계종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정화운동을 이끌고 통합종단의 기틀을 다졌던 청담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은 망망대해에서 조타수를 잃은 격이었다. 종단 최고 실력자의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서 ‘포스트 청담’에 대한 논의로 수군거렸다. 이 무렵 중앙종회는 11월22일 제27회 정기회를 소집한 상태였다.‘동아일보(1971년 11월25일)’에 따르면 11월22일 열린 중앙종회에서는
한일불교유학생교류회가 1994년 조계종 개혁과 1950~60년대 불교정화운동과 관련한 연구논문들을 묶어 책으로 발간했다. 한일불교유학생교류회가 연구논문집을 발간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한일불교유학생교류회는 11월17일 서울지방변호사회관 지하1층 세미나실에서 ‘조계종단의 개혁과 정화의 제문제’ 발간 출판기념회 및 학술토론회를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일불교유학생교류회 상임대표 원두 스님을 비롯해 조계종 명예원로의원 현해, 동국대 이사장 자광, 성철문도회장 천제, 금강선원장 혜거, 전 백양사 주지 시몽스님과 이평래 충남대 명예교수,
1954년 5월20일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불교정화 촉구’ 유시는 불교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교단과 사찰운영은 독신 비구승이 담당하고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현직 대통령의 발언은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불교계를 불신과 다툼으로 내몰았다. 이후 10여년간 ‘비구․대처 갈등’이 본격화됐고, 전국 사찰은 폭력과 소송으로 몸살을 앓았다. 삼보정재는 대부분 법정다툼으로 소진됐으며, 사회적으로 불교계 위상은 한 없이 추락했다.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스님들이 계율을 어기고 부인을 거느리는 풍토가 만연된
“재단법인 선학원 정관 및 규정이 재단 지도부 이익에 편향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법무법인 바른 대표 정인진 변호사가 10월25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선학원 미래를 열다’ 주제로 열린 선학원미래포럼(회장 자민 스님) 2018년 워크숍에서 이 같이 비판했다.정인진 변호사는 ‘선학원의 정관 기타 규정의 개정에 관한 시안’ 발표에서 선학원 정관 등에 이사장 전횡과 자격미달, 임무해태를 막을 법적 장치 미비를 지적하며 이사장 자격 강화 등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정 변호사는 선학원이 정관 등을 공개하지 않아 20
1999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인제 백담사에서는 제1회 만해축전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국내외 저명 학자들과 조병화, 김남조, 유안진, 신달자 시인을 비롯해 만해 스님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는 이들 3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화려한 개막식과 함께 20세기 한국문학을 총 점검하는 대규모 심포지엄이 열렸고, 한국무용, 시낭송회, 장기자랑 및 퍼포먼스도 열렸다.이 행사가 향후 만해 스님의 사상과 문학을 세계화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찬사가 잇따랐다. 이러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소설가 조세희씨였다. 그는
고암문도회는 10월12일 오후 1~6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한국불교의 역사적 전통과 미래’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고암상언(古庵祥彦, 1899~1988) 스님 열반 30주년을 추모해 열리는 이번 학술세미나는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의 사회로 진행되며, △종정제도의 기원과 전개(김응철 중앙승가대 교수) △한국불교의 계맥과 계단 개설(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한국불교의 선교율 동수론(同修論) 고찰(이종수 순천대 교수) △한국불교의 해외포교 역사와 전망(서재영 불광연구원 연구원) △한국불교에서 용성문도의 위
오대산 월정사 탄허강숙은 10월26일 오후 1~6시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탄허 스님의 교육이념과 현토역해본의 가치와 의의’를 주제로 열리는 이날 학술세미나는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의 환영사와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의 축사,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치사로 시작한다.이어 △한암과 탄허의 승가교육이념과 실천양상(중앙승가대 교수 자현 스님) △조선조 불서언해·사기(私記)와 탄허의 현토·역주의 비교 고찰(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탄허 시문의 문학성(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통
재단법인 선학원(이사장 법진 스님)이 조계종과의 ‘법인법 갈등’ 이후 선학원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역대 스님 선양사업에 있어서도 수덕사 만공 스님을 배제한 채 만해 스님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선학원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만해학회장인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선학원미래포럼(회장 자민 스님)이 10월25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하는 ‘선학원 미래를 열다’ 주제 워크숍에 앞서 발표된 ‘선학원 정체성의 재인식-만공과 한용운, 계승의 문제’ 논문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김 교수는 “최근
만해 한용운(1864~1944)은 근대불교에서 다양한 행보를 걸어간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문학, 독립운동, 불교개혁 등 다방면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명성은 일제하의 불교 그 당시에도 상당하였다. 1932년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에 대한 선거를 하였는데 만해가 469명에서 422표로 1등을 하였음은 그를 예증한다. 그밖에도 만해가 근대불교를 대표한다는 당시의 기록은 적지 않다.백성욱(1897~1981)은 만해의 영향을 받아 3·1운동 참가,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 군자금 모집, 의용승군제 추진, 불교의 자주화(종헌 제정 등)
독립운동가, 학자, 수행자, 정치인, 교육자로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던(1897~1981) 백성욱 박사를 조명하는 첫 세미나가 열린다.만해학회(회장 김광식)는 7월27일 오후 1시 서울 신사동 불교평론 세미나실에서 ‘만해 한용운과 백성욱’을 주제로 제18회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만해 스님의 제자였던 백성욱 박사는 14살 때 봉국사로 출가해 경성 중앙학림을 졸업하고 3·1운동을 전후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파리 보배 고등학교, 남독일 벌쓰부르그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5년 10월 ‘불교순전철학’으로 한국 최초의 독
1971년 11월15일 밤 10시15분, 서울 조계사에 범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무원장 청담 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열반종이었다. 청담 스님은 하루 전날인 14일 오후 몇몇 신도들과 서울 도봉산장을 올랐다가 다음날 새벽 쓰러져 혜화동 우석대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 그러나 응급처치에도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고, 주치의로부터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결국 이날 오후 5시30분경 스님은 다시 조계사로 옮겨졌고, 이날 밤 스님과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연을 접었다.다음날 아침 주요언론은 청담 스님의 입적 소식을 앞다퉈 보도했
사찰에서 기도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용어다. ‘초하루기도’ ‘삼칠일기도’ ‘백일기도’ ‘천일기도’ ‘철야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다라니기도’ ‘방생기도’ 등 숱한 기도들이 있다. 그럼에도 기도는 종종 부정되거나 평가절하된다. 명망 있는 스님들조차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수행의 종교이므로 빌고 바라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라거나 “기도는 하근기 중생들을 위한 방편”으로 표현한다. 이러다 보니 모든 절에서 기도가 행해지지만 정작 불교 안에서 기도의 위상은 대단히 낮다.이러한 모순된 현상은 출판계와 학계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