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내가 열심히 살면 그만이지 더 이상 무엇을 바래?”하는 소위 자력(自力)의 사고방식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도리어 부처님생명으로 태어나는 삶에 감사하는 염불행자(念佛行者)의 수행을 폄하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무량수경을 펼치라. 그리고 눈이 있다면 보고, 귀가 있다면 듣자. “과거와 현재(現在)와 미래의 부처님은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서로 염불하신다”는 소식과 마주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르자면,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과 따로 떨어진 자기는 없다. 해서 같은 커피라도 언제, 어디서 그리고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서 맛이 다르다고 느낀다. 분위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따라서 2인칭이나 3인칭이라고 하는 너 또는 그나 그녀는, 그것을 판단하는 1인칭으로서의 나 없이는 결코 발생하
잘 나가던 사업이 어느 날 갑자기 위기에 봉착한다. 착실하던 아들이 돌연 삐딱한 행동을 한다. 깊은 우정을 다지던 친구가 몹쓸 짓을 저지르고 잠적한다.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벌어지는 일들로 산적한 인생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참으로 견디기 힘든 현실이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여부가 참된 삶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범부(凡夫)는 범부로서 익숙하던 현실(現實)의 죽음이 있어야 한다. 가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스스로 그 안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위주의 자비(慈悲)가 독약일 수도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범부는 제게 익숙한 현실에 갇힌다 알코올중독자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 벌컥 화를 낸다. 그 상대가 부모이든 형제이든 친구이든, 말 그대로
우리가 부처님께 절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내 바깥의 신적(神的)인 존재로 받들어 모시는 게 아니다. 자신의 참생명 자리에 절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삼존불은 저 이상세계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가 미타삼존불의 당사자라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삼존불은 경배의 대상이기 이전에, 내가 미타삼존불로 살기 때문에 예배를 올린다. 무한한 자기존중의 발로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을 한정시키기로 작정한 사람은, 자기 본연의 생명가치를 못미더워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세상 사람들을 범부라고 지적하며, 그 정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계신다. 스스로가 미타삼존불 당사자 “그들은 저속하고 중요치 않은 일로 서로 다툰다. 이들은 모진 죄악과 심한 고통 속에서 몸을 위하여 스스로
사람들은 특히 관세음보살을 좋아해서 관음기도를 많이 드린다. 그러면서 “돈 좀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하면서 온갖 바람을 담은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구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기도는 이미 관세음보살이 뜻하는바 의미에 걸맞지 않다. 관세음보살이란 이미 구원이 끝나있음을 확정해 주는 부처님의 한량없이 따뜻한 자비라고 했다. 태양이 아낌없이 열을 주듯이, “무엇을 따로 구(求)한다는 말이냐? 원래 다주었으니, 마음껏 받아 가지거라!”하면서 언제나 다가오는 베품인 것이다. 그러니 마음껏 실컷 받아들이면서 살면 그만이다. 뜻대로 돼야만 행복한게 아니다 반면에 대세지(大勢至)보살은 닫힌 삶을 살지 않도록 일깨워주신다. 닫힌 삶은 어둠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아무리 어둠 속에서 몸부림쳐 보아야
누군가 어떤 인생을 사는지 알고자 한다면, 갖가지의 관찰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다른 어떤 방식보다 확실한 척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또는 그녀가 누군가와 어울리고 있는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주위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포진하고 있거나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리라.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살이에 대한 평가는 고정된 과거의 잣대에서 말미암기에 그렇다. 누군가 잘되고 못되고는 그 사람의 그릇에 따르는 결과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따라서 아무리 불행해 보이는 사람도 새로운 선택에 의해 다른 삶이 전개될 수 있는가 하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얼마든지 뒤틀린 삶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저 국토의 모
무량한 행원(行願)의 주인공인 법장비구. 참으로 엄청난 삶의 진실을 품고는, 아는 그대로를 거침없이 산다. 진정한 구도자다. 그러니 그의 성불(成佛)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물음을 아난이 석가모니부처님께 여쭙는다. “법장비구는 이미 성불하여 열반하셨습니까? 아직도 성불하지 못했습니까? 지금 현재 성불하고 계십니까?” 이런 물음 또한 생사(生死)가 역연하게 다가오는 현실의 영역에서 당연히 제기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대신 살아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말이다. 법장비구로 상징화한 모든 구도자들의 궁극적인 지향은 다만 오직 성불에 있을 뿐이다. 비록 법장비구에 대해서 묻지만 그것은 자신의 참생명에 대해서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간
법장비구는 24번째의 원에서 이렇게 결단(決斷)한다. “만약 제가 부처가 되어서도“그 나라의 보살들이 모든 부처님 앞에“그 공덕의 근본을 나타내고자 하는“공양물(供養物)을“뜻하는 바대로 얻을 수 없다면“저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공덕의 근본으로부터 공양물이 말미암는다. 모든 공덕의 근본은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생명을 가리킨다. 이렇게 공덕의 근본을 나타내고자 하는 공양물이라고 했지, 그냥 제 멋대로의 공양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근원에 뿌리박지 않은, 그래서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공양물은 참된 공양물이 아닌 것이다. 자기 기준으로 본다면 좋을 것 같아도, 그것이 자기 생각에서 비롯되는 한 상대적인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부터 거북이의 털이나 토끼의 뿔이라는 역설을
전국의 청소년들이여 숨겨온 전통예술 ‘끼’를 펼쳐라. (사)대한불교청소년연합회(총재 현성, 이하 청소년연합회)는 5월 27일 오후 2시 동국대 중강당에서 ‘제20회 청소년전통예술경연대회’를 개최한다. 1988년부터 이어져 온 이번 행사는 5월 청소년의 달을 맞아 청소년들에게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과 잠재된 예술적 소양을 고취시키고자 마련됐다. 경연대회에는 본선을 통과한 총 10개 팀이 참가하며 800여 명의 청소년들이 갈고 닦은 솜씨로 무대를 뜨겁게 달굴 예정이다. 판소리, 전통무용, 사물놀이 등을 선보일 참가팀 중 대상에는 100만원의 상금과 국가청소년위원장상이 수여된다. 이외에도 최우수, 우수, 장려, 인기상에 선정된 팀에겐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장상과 본회총재상 등과 함께 70만원 이내의 상금이 주어
“모든 부처님께 한 끼의 공양을 올리는 사이에…”하는 23번째 원(願)의 계속이다.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살아 있다는 증거는 바깥으로부터 음식이 들어온다는 전제로부터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단순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분, 밥 빨리 먹고 일처리를 합시다”하며 재촉하는 사람이 하나 둘로 그치지 않는다. 일 처리를 우선에 두면서, 밥 먹는 것을 절차상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사고방식이다. 혹은 밥상을 받다가 말고 반찬투정을 하는 경우는 또 어떤가? 부부싸움 하다가 밥상 엎어버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쌀 한톨 물 한방울의 가치 알아야 그야말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따르는지 모르는 뒤집혀진 생각이다. 식사 한 끼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한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으리라. 따라서 시작이 없다면 끝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시작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물이 철철 흐르는 것만 봤지, 그 물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시내를 이루다가 강이 되더니, 마침내 바다로 모인다. 그러다가 증발되어 구름으로 바뀌었다가 비나 눈으로 내리니, 그것이 흐르는 물의 시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진배없다. 물은 지금도 흐르고 있는 상태일 따름이다. 따라서 참다운 의미의 시작은 언제나 진행형(進行形)이다. 이는 곧 지금 이 순간도 시작에는 멈춤이 없음을 뜻한다. 독자적인 힘은 결코 없는 법 이렇게 끊이지 않고 거침없는 힘을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이라고 한다. 언제
“나는 결단코 오역죄(五逆罪)를 짓지 않았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진다면, 실로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할까? 태어나면서 어머니에게 피 흘리지 않게 한 사람 아무도 없고, 아버지의 걱정을 끼치지 않은 사람도 없다. 참으로 우리를 키우느라고 부모님들의 허리는 휘었고, 기력은 쇠(衰)하였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자식을 키운 것이다. 불효자(不孝子)든 효자든 관계가 없다. 부모님의 생명을 빌어서 살아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이는 곧 부모님의 생명을 죽여서 현상계의 자신을 유지하였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또한 아라한(阿羅漢)이란 참생명 자리에서만 올곧게 사는 성인(聖人)을 가리킨다. 유명한 분만이 아니다. 비록 이름은 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진리답게 사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제멋대로 세상을 판정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구속하고 있다면, 참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죽음의 늪에서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드는 물귀신의 짓거리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러한 범주 속에서 아무리 잘살아 보겠다고 발버둥 쳐도 제 자리를 맴돌 따름이다. 물론 소위 안정이라는 이름하에 고정된 삶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이는 분명히 생명의 법칙에 어긋난다. 대립 없는 행복한 상태가 극락 무상(無常)이라는 말이 뜻하듯이, 우리네 생명은 자신의 표현을 멈추지 않으며 변화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참생명은 끝내 죽지 않는다는 본래 원리에 따라서 과거에 매이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맡겨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현재진행형(現在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