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의 영이 깃든 절 영은사 대웅보전은 높이가 33.6m에 달하는 웅장함을 자랑한다. 관음의 고향 보타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영파로 돌아 나오는 뱃길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전날 보타산으로 향할 때보다 더 큰 물결이 일었고, 운무 역시 쉽사리 바닷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영파에 도착한 일행을 태운 버스는 중국 남송시대 수도 항주로 향했다. 항주는 서호를 비롯해 자연경관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 부유층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또한 12세기 송나라가 금나라의 잦은 침략에 못 견뎌 하남성 개봉에서 항주로 수도를 옮긴 이후를 가리키는 남송시대에 해상무역로를 통해 아시아
▲ 관음의 고향 보타산 곳곳에서 바라다보이는 남해관음상은 이곳의 상징이다. 섬 전체 면적이 13㎢에 불과함에도 한때 200여 사암에서 3000명 이상의 스님들이 수행했던 보타산은 예부터 ‘골짜기마다 사찰이요 길이 다하는 곳마다 승려가 있다’고 했을 만큼 활발하게 포교가 이뤄지던 곳이다. 물론 지금도 크고 작은 절 모두에서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관음의 고향’으로 불리며 관음 가피를 입고자 보타산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섬에서 두 번째로 큰 절 법우선사(法雨禪寺) 참배를 마치고, 절 앞에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천보사(千步沙)의 아름다움까지 눈에 담고는 다시 발길을 불긍거관음원으로 돌렸다. 일본으로 가
▲ 오대산, 아미산,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 불교 4대 성지로 불리는 보타산에서 가장 큰 절 보제선사 앞엔 관음보살이 방생하던 호수 해인지가 있다. 연꽃으로 둘러싸여 연화지로도 불린다. 천태 지의 대사의 가르침과 숨결이 흐르는 천태산을 떠나 버스로 4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영파(닝보)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 이후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해상 실크로드의 역사를 복원하고 있는 곳이다. 영파는 고대로부터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이름이 높았고, 7∼8세기경부터 중국 동남해안에서 가장 번성한 무역항이었기에 신라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북적대던 항구도시였다. 이 도시가 동북아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가 되기까지는 9세기 초 이곳을 해상기지
천태 대사 육신 모셨다는 지자육신탑이 향객 맞아 ▲ 천태 지의 대사 육신탑이 모셔진 지자탑원은 산 정상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대사의 말 없는 법을 전하고 있다. 천태지의 대사가 수양제에게 유서를 남기면서까지 불사 마무리에 공을 들였던 국청사 들머리에는 ‘과거칠불탑’이 있어, 천태산으로 들어서는 길손을 맞는다. 과거칠불의 공통된 가르침이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義) 시제불교(是諸佛敎)’이니, 이곳 천태산에 들어서는 모든 대중에게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온갖 선은 받들어 행하며 제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곧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 천태지의 대사가 수나라 양제에게 유서를 남겨 불사를 마무리한 이래 1400여년 동안 천태종 발상지로 이름을 떨쳐온 국청사. 7만㎡에 달하는 면적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공간이 없어 가람은 다소 답답한 느낌을 준다. ‘불견사성(不見寺成) 명목위한(瞑目爲恨)’천태지의 대사는 병약해진 몸으로 단 하루를 버티기조차 어려웠으나 차마 그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천태교학이 후대에까지 널리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선사(修禪寺) 복원을 발원하며 진행해온 불사가 건축 자금 부족으로 뜻을 채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사는 고심 끝에 입적 후에라도 뜻한 바를 이루고자 붓을 들어 수양제에게 “절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니 한을 품고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