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펜 스님 역시 일념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남아 있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일념은 진종의 일념과는 매우 다르다. “모든 불법은 그 자체의 일념 이외에는 말하지 않는다. 삼세는 곧 일념이다.” 또 “그 자체의 일념 이외에 기약하는 바가 없는 것을 무후심(無後心)이라 한다.” 또한 “다른 생각을 겸하지 않는 명호를 마음에 지녀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 역시 일념을 설했지만 그것은 한번이라는 의미의 일념은 아니다. 기약하는 바가 없고, 잡념이 없으며, 무후심의 일념인 것이다. 모든 염불은 각각 염불 자체의 염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가리켜서 그 자체의 일념이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 생각이 일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일념에
신란의 사상 중 현저한 점은, 일념의 깊이에서 염불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다는데 있다. 믿음에 충만한 일념에서 이미 왕생의 업이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다. 정히 일념이라 하더라도, 염불의 모든 것을 모은 일념이다. 염불의 횟수가 아니라 질에서 그 의의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18원을 일반적으로는 ‘왕생의 원’으로 부르고 있으나, 신란은 ‘신락(信樂)의 원’으로 바꿔 불렀다. 염불은 칭명보다 먼저 신심을 의미했던 것이다. 칭명은 다만 보은과 감사(報謝)를 의미하는 수행으로 생각되었다. 일념에서 믿음을 결정하면 이미 성불의 지위를 얻은 것이어서, 그 후 염불은 보은을 위한 염불이라 말한다. ‘정신게(正信偈)’에서 “다만 항상 여래의 명호를 잘 외워서, 큰 자비와 큰 서원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말하고,
흔히 일념의(一念義)를 세웠던 것은 코우사이(幸西)라고 일컬어진다. 이 일념의는 스승 호넨 스님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배척되었다. 그렇기에 ‘칙수어전’에서도 그를 제자들 안에 포함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넨(凝然)의 저서 ‘정토법문원류장(淨土法門源流章)’에서는 정토문의 다섯 이류(異流)에 포함시켰다.‘칙수어전’ 제29에는 ‘코묘(光明)스님에 대한 답장’, 이어서 ‘일념의를 그만두게 하는 기청문(起請文)’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일념에 믿음을 얻기만 하면 다시 염불을 하지 않더라도 장애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왕생하리라는 믿음을 갖고서 일념이 된 뒤에는 다시 염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열 가지 악이나 오역죄를 지은 사람도 정토에 왕생함에 지장이 없다. 하물며 다른 작은 죄
칭명을 하면서 생활한 사람들은 생각생각 이어지는 중에 위없는 환희를 맛보았다. 호넨 스님이 많은 염불, 즉 몇번이고, 몇번이고 반복해 염불을 외우라고 권하신 것은 당연하다. 만약 염불의 이어짐을 ‘다념’이라는 말로 나타낸다면, 정토종이 스스로 다념의(多念義)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다념은 상념(常念)이다. 호넨 스님의 전기인 ‘칙수어전(勅修御傳)’에는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다. “염불의 본의는 상념에 있다. 그렇기에 생각생각 이어지도록 하라고 권유되었던 것이다.”(제12) “단지 삼만 번, 혹은 오만 번, 혹은 육만 번, 일심으로 염불을 외우게 하셨던 것이니, 결정코 왕생하는 행으로 삼으셨다.”(제27) “‘소(疏)’에서 말했다. ‘생각생각마다 버리지 않는 것, 이를 정정(正定)의 업이라 이름한다’
염불의 일문은 칭명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다. 부처님의 본원은 오로지 육자 위에 내걸리게 되었다. 염불종이 성행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무량수경’에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 수 있게 되어서 환희용약하고, 내지 일념이라도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을 것이며, 곧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되리라.” 이를 ‘일념무상문(一念無上文)’이라 한다. 여기서 일념이란 일성(一聲)의 염불을 말한다. “나무아미타불” 육자를 외는 것이다. 호넨 스님은 그의 저서 ‘선택집’ 제5장에서 말씀하셨다. “염불로써 무상(無上)을 삼는다. 그러므로 한번 외움으로써 한번 무상을 삼는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십념으로써 열 번의 무상을 삼고, 또한 백념으로써 백 번의 무상을
정토와 예토 거리는 망집 거리망집 일어나면 십만억토 괴리 얼핏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실제 ‘십만억’이라는 수는 숫자를 초월한 세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를 ‘수’로서 받아들였던 사람에게는 많은 오해가 따라다녔는데, 글자의 뜻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리라.‘십만억’은 셀 수 있는 거리의 길이와 같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잇펜 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무엇보다 적절한 해설이 될 것이다. “‘십만억토를 지나서 서쪽으로’라는 것은 실제로 십만억이라는 거리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와) 중생 사이(에 존재하는) 망집(妄執)의 간극을 가리킨 것이다.”(‘법어’) 이 경구(經句)의 참된 의미를, 진정 이보다 더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님의 성찰이 견줄 수
원래 서방정토라는 사상과 말은 불교경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그 원전을 편집한 인도인들이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에는 상상력이 풍부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사상(思想)에 형태를 수반하였다. 인도인의 환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여실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오히려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무변제(無邊際, 가이없음)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무변제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수적인 표현으로써 한다. 그럼으로써 현실에서 무변제의 세계를 절감하게 된다. 무한을 일정한 숫자로 나타내는 것은 오히려 무한을 유한으로 만드는 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끝없이 큰 수로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무한대를 좀 더 절실하게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다만 무한이라고 말한 것만으로는 추상에 빠져버리기에 통절(痛切)히 경탄케
정토는 중토(中土)를 의미한다. 중토는 결코 동쪽과 서쪽의 중간에 있는 국토가 아니다. 동서를 뛰어넘는 ‘중심’, 그것이 서방의 진실한 모습이다. 어디로 향하더라도 향하는 그곳이 바로 서쪽이라는 의미에서 중토이다. 그러므로 서방정토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곳이라 말할 수도 있고, 아미타불이 서방에 계시는 부처님이라 할 수도 있다. 서방 속에 계시는 분이 곧 아미타불이다. 아니, 중심에 계시는 부처님을 미타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은 어떤 부처님이든 그 본질은 ‘중심’이다. 대일여래만 중앙(中)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미타는, 어느 쪽에서 오는 사람이든지 정면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정토진종에서는 본존인 미타를 ‘오마무키 사마(정면으로 향하는 분)’라 부르는데, 이는 ‘중앙’에 자리한 부처님을
정히 서(西)는 동(東)이 아닐 뿐이며, 상(相)은 단지 무상(無相)이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도리가 없다. 서도 상도 고정된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고정된 의미로 받아들이는 신자들 또한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비판을 듣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정토가 서방에 있다든가 십만억토 저쪽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을 뵙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적어도 거기에 종교적 의의가 있는 한 소홀히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방’이 하나의 훌륭한 종교적 교의가 되기 위해서는, 뭔가 절대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 최소한 정토교의 상징적인 방위라면, 구경(究竟)의 방위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쪽을 단지 동쪽에 대비되는 것으로 보는
이러한 것(방위에 따라서 존상을 배치하는 것-옮긴이)은 특별히 불교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 등에도 비슷한 종류가 보인다. 대략 16~17세기 즈음까지 기독교의 회당(會堂)은 동서남북의 위치를 어지럽히지 않고 건설되었다. 중세시대 본당에서는 서방이 언제나 정면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오지여래와 굉장히 비슷한 것으로서, 기독교와 사복음서의 저자를 상징한 오체도(五體圖)가 있다. 예수가 중앙이며, 또 천사(마태), 사자(마가), 소(누가)와 독수리(요한)가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데, 정히 그 위치가 정해져 있다. 어째서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이 서방에 계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을까. 누구든 유추할 수 있듯이, 서쪽은 태양이 지는 방위다. 아니, 지는 그 방향을 서쪽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지다’라는 것은
염불문의 교리에 ‘지방입상(指方立相)’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방위를 가리키며 모양을 세운다”라는 것이다. 이때 방위란 서방을 의미한다. 요컨대 정토가 서방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모습을 본다는 말이다. 그 서방정토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이 예토를 떠나서 십만억 국토의 저 편에 있다고 말해진다. 절 이름에 ‘서방사(西方寺)’, 또는 ‘서념사(西念寺)’라 불리는 것이 있다. 그 이름에서 바로 정토계 사원임을 알 수 있다. 염불종은 서방교(西方敎)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서쪽이라는 방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서방지남초(西方指南抄)’란 제목으로, 신란 스님은 스승 호넨 스님의 사적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지남’은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 이끈다는 뜻으로 다름
우리는 이 육자의 본래 모습을 분별로써 판단해서는 안 된다. 호넨 스님은 염불을 “모양 없는 모양”, “목적 없는 목적”이라고 말했던 것이 아닌가. 보잘 것 없는 지혜로 논해서는 안 된다. 작고 부족한 논리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육자는 즉여(卽如)이기 때문에, 그대로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립(二相)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육자는 빈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육자는 그 자체로 육자인 것이다. 오직 하나뿐인 육자이므로 육자는 정히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육자는 자기 스스로에게 있는 것, 자신이 자신을 규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자를 우리의 마음, 우리의 지혜, 우리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육자를 얻는다는 것은 그저 얻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