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톨릭 점유한 서소문 역사공원서도 보우 스님 요승 폄하

  • 교계
  • 입력 2022.09.19 14:00
  • 수정 2022.09.22 18:02
  • 호수 1650
  • 댓글 11

불교관련 전시유물로 ‘율곡집’ 안내하며
‘논요승보우소’ 부분 빨간 줄 그어 강조
설명엔 ‘불교 이단 규정하고 유교이념으로
조선 바로 세우려는 의도로 쓰였다’ 명기

예산 596억 투입해 만든 공공시설이지만
가톨릭신자 위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
건물주는 ‘중구청’…운영은 ‘서울대교구’

서소문역사공원 입구의 가톨릭 순례길 안내 간판.
서소문역사공원 입구의 가톨릭 순례길 안내 간판.

조선불교의 중흥조 보우 스님의 순교를 ‘처벌’로 인식하는 광화문광장의 왜곡된 역사관이 가톨릭이 점유한 ‘서소문 역사공원’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조선시대 대표적인 척불론자인 율곡 이이(1536~1584)의 저술을 내세워 보우 스님(1509~1565)을 ‘요승’으로 폄훼하고,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뒤 조선을 바로 세우려는 의도로 쓰였다고 안내하고 있어 보우 스님과 조선불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확산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광화문광장 건너편에 있는 서소문역사공원 안내판. 가톨릭 성지를 상징하는 빨간색 마크가 함께 그려져 있다.
광화문광장 건너편에 있는 서소문역사공원 안내판. 가톨릭 성지를 상징하는 빨간색 마크가 함께 그려져 있다.

광화문광장과 불과 1.4㎞ 떨어진 ‘서소문 역사공원’은 애초 조성 취지와 달리 가톨릭만의 성지인 ‘서소문 성지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이런 비난을 염두에 뒀는지 서소문 역사공원 내의 역사박물관 상설전시관에는 가톨릭 외에도 조선후기 사상계 흐름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로 다른 종교와 사상 관련 유물들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가톨릭성지 역사박물관 불교 섹션에 있는 율곡집. 첫번째로 전시되고 있으며 논요승보우에 빨간 줄을 그어 강조했다.

이곳에 불교 전적도 3점 소개하고 있다. '불교'로 적힌 구간 중 첫 번째로 전시되고 있는 것이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요망스러운 보우를 논박하는 상소문)’이다. 이 책은 성리학 이외에 불교·양명학 등 거의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했던 율곡이 보우 스님을 ‘요승’으로 규정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율곡은 젊은 시절 어머니를 잃고 봉은사에서 불경을 읽은 뒤 입산까지 했으나 훗날 가장 대표적인 척불론자로 불교 탄압에 앞장섰다. 문정왕후 서거 후 불교계와 백성들에게 크게 신뢰받던 보우 스님에 대한 처벌 논란이 불거졌을 때 퇴계 이황조차 ‘소문만으로 (보우 스님을) 처벌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던 것과는 달리 율곡은 일방적인 처벌을 요구하며 쓴 것이 바로 ‘논요승보우소’였다. 문정왕후의 아들로 보우 스님을 감쌌던 명종도 대유학자였던 율곡이 전면에 나서자 어쩔 수 없이 스님을 유배 보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제주도에서 순교하게 된다.

그런데 가톨릭이 운영하는 역사공원 박물관에서 불교를 소개하는 대표 전적으로 ‘논요승보우소’를 버젓이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측은 이 책에 대한 설명으로 ‘승려 보우와 함께 불교를 중흥시켰던 문정왕후 사후 1565년 8월에 율곡 이이가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인 논요승보우소’라며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유교 국가로서의 조선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상소문의 결과 보우는 제주로 유배를 갔으며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논요승보우소’에 빨간 줄까지 그어가며 눈에 띄게 안내하고 있었다.

가톨릭이 조선시대 억울하게 이단 취급받으며 순교를 당했다고 독점한 공간에서 보우 스님은 5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여전히 이단 취급받으며 조선을 바로 세우고자 처형당해 마땅한 요사스러운 승려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박물관 현장에선 ‘논요승보우소’가 첫 번째 불교 유물로 전시되고 있음에도 정작 박물관의 공식 홈페이지(https://www.seosomun.org/main.do)에는 불교 관련 서적으로 ‘백곡집’(대각등계록)과 ‘인악집’만 안내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논요승보우소’가 불교계로서는 가슴 아픈 조선의 탄압 역사를 드러내는 저술임을 박물관 측도 인지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논요승보우론’을 전시하는 것은 이곳을 찾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다.

전시 현장과 달리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불교 서적으로 '백곡집'과 '인악집'만 소개하고 있다. '율곡집'의 논요승보우소는 빠졌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전시 현장과 달리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불교 서적으로 '백곡집'과 '인악집'만 소개하고 있다. '율곡집'의 논요승보우소는 빠졌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불교는 가톨릭이 박해당했던 세월과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500년 세월을 탄압받았고 백성들이 따른다 싶으면 모함받아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월심, 계엄, 지성, 상명, 의철, 학선, 죽변, 해초, 각돈, 학전, 설준 등 수많은 스님이 불법을 펴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거나 참수됐다. 이 중 해초 스님은 교종판사를 거쳐 판교종도대사(判敎宗都大師)를 지낸 고승이며, 각돈 스님은 진관사를 중창하고 1470개의 ‘화엄경판’을 완성한 학승이다. 또 설잠 김시습의 스승이었던 설준 스님은 유생들의 표적이 되어 변방으로 끌려가 참사를 당했다. 조선후기 선과 화엄의 대가였던 환성지안 스님도 법을 지키고 펼치려다 제주로 유배돼 입적했다.

수많은 불교의 순교자 중에도 보우 스님은 각별하다. 스님이 살았던 16세기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법난의 시기였다. 유생들이 절에 와 고기와 술을 요구했고 사찰 재물을 약탈하거나 불 지르는 일도 수시로 자행됐다. 사찰에서 그들을 제소하면 되레 죄를 뒤집어쓰기 일쑤였고, 패악질한 유생이 호걸처럼 떠받들어졌다. 불교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불온한 사상이었으며, 스님들은 더 이상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우 스님은 ‘불교 중흥’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간 고승이다.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기 전인 40세 이전까진 철저히 수행에 몰두했으며 봉은사에 머무는 동안은 조정 대신과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와 온갖 음해 속에서 꿋꿋이 선·교 양종을 다시 세웠다. 승과를 부활시켜 스님들이 정당한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았다. 그 덕에 1000년 불교의 전통을 잇고 서산 휴정과 사명 유정 등 임진왜란의 영웅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보우 스님은 당시 유생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았더라도 현시대 관점으로 보면 전통문화의 전승자이며,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을 구한 인물들을 양성한 ‘애국자’이다. 그럼에도 광화문광장의 ‘보우 처벌’과 같은 왜곡된 관점이, 공공의 역사는 매장되고 가톨릭만의 순교 성지로 전락한 서소문 역사공원에서 ‘논요승보우소’로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 90여건의 전시 서적 가운데 ‘조선의 가톨릭’을 부정 평가하는 설명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운영자인 서울대교구는 조선 후기 천주교 탄압에 대한 조선 정부의 공식 입장을 천명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전시하며 ‘(이 책은)어린 헌종을 앞세운 풍양 조씨 세도 정권이 1839년 사학토치령을 내린 것’이라며 ‘이로 인해 조선교회 재건의 중심 인물이던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이 체포돼 처형됐고 300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한 기해박해는 척사윤음으로 막을 내린다’고만 소개하고 있었다.

빨간 줄을 그어 문서의 골자를 안내하는 부분도 율곡 이이의 관점을 가져와 ‘보우 스님’을 논요승보우소(요사스런 승려)로 설명하는 것과는 대비된다. 조선시대 가톨릭을 표현하던 ‘절륜패상지교(絶倫悖常之敎)’ ‘황탄괴설 불경지외도(荒誕怪說 不經之外道)’ ‘패륜멸법 자함어이적금수지교(悖倫滅法 自陷於夷狄禽獸之敎)’나 가톨릭 신자를 ‘무부무군지도(無父無君之徒)’ ‘금수지도(禽獸之徒)’ ‘패륜난상지도(悖倫亂常之徒)’로 규정한 부분과는 상반된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높힌다 하니’를 강조했다.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는 “조선 정부와 사대부로부터 가톨릭이 탄압과 순교를 받았다고 강변하면서 그 시대 동일하게 탄압과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던 불교의 아픈 역사는 정당화하고 볼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논요승보우소’를 첫 번째 불교 유물로 강조하고 있는 건 의도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유생들이 바라본 보우 스님과 ‘허응당집’의 보우 스님의 실제 모습은 하늘과 땅차이다. 율곡이 보우 스님을 강력하게 비판한 건 그가 다른 유생들로부터 ‘사교(불교)에 몸 담은 이’라고 씌워진 프레임을 탈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지적했다.

또 “제대로된 역사 전후 과정도 살피지 않고 보우 스님을 소개하는 것은 그릇된 행태다. 역사는 항상 진실을 찾아가는 작업인데 ‘역사박물관’에서 이런 행태가 일어나 유감”이라며 ” ‘피눈물을 뿌리며 수건을 적시는’ 법난을 몸소 겪은 보우 스님이 역사박물관에서 여전히 수난을 겪고 있는 것에 통탄스럽다. 그런 식으로 보우 스님을 활용할 거라면 차라리 전시장에서 빼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허응당 보우 스님은 1538년(중종 33)은 법난을 겪으며 ‘불교가 쇠퇴하기가 이 해보다 더하겠는가 / 피눈물을 뿌리며 수건을 적시네. / 구름 속에 산이 있어도 발붙일 곳 없으니 / 티끌세상 어느 곳에 이 몸을 맡기리(釋風衰薄莫斯年 血漏潛潛滿葛巾 雲裏有山何托跡 塵中無處可容身)’라는 시를 남겼다.

한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17세기부터 칠패시장 등 상업 중심지이자 국사범의 처형장으로, 1970년대부터 서울시의 근린공원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2014년 프란치스코 가톨릭교 교황의 참배 이후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거대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국가 소유 토지에 문화체육관광부·서울시·중구의 596억 예산으로 2019년 6월 개관한 이곳은 서울 중구청 소속의 공공시설이지만 개관과 동시에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위탁 운영하고 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50호 / 2022년 9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

관련기사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