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다는 사실만이 진리 실감” 선사들은 하루해가 지고나면 오늘도 일대사를 마치지 못했다는 억울함에 두 다리 뻗고 울었다고 했다. 어느덧 세월은 무상하여 하루가 쌓이고 겹쳐서 섣달 그믐날이 닥쳐오는데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돌아갈 곳이 분명한지 되돌아본다. 수행하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바로 돌이켜 화두를 챙김으로써 회광반조가 되어 순간순간 자기 점검이 이루어진다. 작년에는 섬에서 보기 힘든 큰 눈이 내렸다. 장마처럼 계속되는 눈으로 혹시 지붕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섬들은 마치 하얀 연꽃처럼 솟아올랐고 햇빛에 녹아내리는 처마 끝 고드름과 낙숫물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장엄한 합창 이었다. 올해는 눈이 조금 내렸으면 좋겠는데 육지에는 또 폭설이 내린다니 걱정스럽다. 어느 젊은 농부가 폭설
“‘건강가정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은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의 해체를 조장하는 처사이므로 전면 백지화 해야 한다.” 국회 여성가족상임위원회가 통과시킨 ‘건강가정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에서 ‘가족’의 범주에 포함시킨 ‘사실혼’을 두고 여론의 공방이 치열하다. 사실혼은 결혼식을 올린 후 혼인신고 전 배우자를 잃는 등 신고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 이 가운데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김화중〈사진〉 회장은 가정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전면 백지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김 회장은 “‘가정’은 사람들의 관계인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들의 의식주, 가풍, 전통의례를 모두 포함한 의미의 범주”라며 “개정안은 가정을 가족으로 대체하고 동거를 인정하는 사실혼을 그 범주에 포함시켜 시가와 처가 등 혼인을 매개로 형성된 관계도 단절하는
조계종복지재단은 12월 26일 오전 10시 30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지난 11월 3일 열린 아동미술잔치 대회 입상작을 선정, 시상식을 개최한다. 시상은 대상으로 꼽힌 ‘부처님’을 제목으로 그림을 그린 이수빈 양 1명을 비롯해 최우수상 4명, 우수상 25명, 장려상 70명 등 총 100명의 어린이들이다. 한편 조계종복지재단 불교사회복지연구소는 12월 21일 오후 2시 종로구 하림각에서 ‘불교사회복지와 나눔’을 주제로 4차 복지학술포럼을 개최한다. 02)723-5101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범부와 성인은 한마음의 차이옛날에 가호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다. 가난했던 그에게 그동안 고생의 세월을 단번에 날려 버릴만한 일이었다. 며칠이고 방안에서 보석을 만져보며 행복해했다. 가진 자의 기쁨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하니 더 없이 좋았다. 가호는 보석을 다락 깊은 곳에 숨겨두고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로 나가봤다. 이제 그의 걸음걸음이 예전의 그가 아니다. 돈으로 바꿔도 상상할 수 없는 큰 재산을 가진 거부다. 아직 사람들에게 말을 안했을 뿐이지, 사실대로 알린다면 어디를 가도 그를 부러워하고 몸들을 낮출 것이다. 과보(跨父)같은 사람은 태양을 잡아다 제 것으로 만들어 온 세상 사람들에게 햇빛을 팔아 부자가 되겠다고 호언을 했다지만, 가호
경계 피하지 말고 공함 요달해야 흐름을 거슬러 뒷산에 오른다. 낙엽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지난 이야기를 속삭이고 빈 골짜기엔 메아리 발자취가 끊어졌다. 겨울산은 온통 진실 하나로 본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더없이 편안하다. 양지쪽에 앉아서 끝없이 펼쳐진 다도해를 바라보며 수평선처럼 아득한 옛 길을 되돌아본다. 성철 스님의 봉암사 결사 후 폐쇄되었던 산문을 다시 열고 선원을 개원하던 해였다. 기라성 같은 구참 납자들과 첫 철을 함께 나면서 모범적인 대중생활의 청규를 배우고, 서암 조실스님께는 참으로 검소한 선가의 가풍을 익혔다. 많은 대중들이 함께 살면서도 여법하고 법을 구함에 치열했으며 구참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초심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섬에 들어와서 선원을 열고 수련회를 이끌어 가면서 고독하고
세상사 달팽이 뿔 위의 다툼 일뿐 양나라의 현인인 대진인이 위나라 왕을 만났다. 당시는 춘추전국시대로써 작은 나라들끼리 끝없이 물고 물리는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며 나라의 존폐를 건 전쟁에 골몰하던 때였다. 그가 하루는 왕에게 물었다. “이른바 달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시는지요?” “알지.” “그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 나라를 세운 이가 있는데 촉씨(觸氏)라 하고, 그 달팽이의 오른쪽 뿔 위에 나라를 세운 이가 있는데 만씨(蠻氏)라고 합니다. 그들은 가끔 땅을 빼앗기 위해 싸움을 일으켜서 사상자가 수만 명이나 됩니다. 혹 도망자가 있으면 보름 동안이나 추격을 할 정도로 치열합니다.” 대진인의 말을 듣고 있던 왕이 웃으며 말했다. “어허, 그런 거짓말을 어찌 믿는단 말이오?” 대진인이 정색을
하루해가 앞산을 지나가다가 가지 몇 개 남아 붉게 타고 있는 단풍나무를 만나서 아쉬운 듯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주춤거리고 있다. 한때 무성했던 것들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시간, 요즘 오래된 인연들이 병고에 시달리고 생사를 달리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수행을 점검해 본다. 부처님께서는 태자시절에 사대문 나들이를 하면서 생로병사의 모습을 최초로 목격했다. 특히 북문에서 상여가 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며칠 전에는 정년퇴임을 한 달 앞두고 평소에 남모르게 선행을 실천했던 아름다운 어느 소방관의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이렇게 무상을 설하고 있지만 모두가 남의 일일뿐 자기 일이 되지 못하고 죽음에 임박해서는 허둥지둥 갈 길을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 약 200년 전, 중국의 백수동 마을에서 있었던 일. 백수동에 언제부턴지 은광이 발견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큰 마을을 이뤘고, 이들은 은을 캐서 가까운 큰 곳으로 나가 돈과 바꿔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지만 생활이 풍족한 것은 아니어서 항상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처지였고, 더더욱 굴속에 들어가 심한 먼지를 뒤집어쓰며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굴 밖의 아래쪽에는 갱 일을 마치고 몸을 씻을 물을 계곡에서 끌어들여 웅덩이를 여럿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곳에는 항상 맑은 물이 고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 웅덩이에, 그것도 한 낮에 선녀처럼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하얀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육조단경』에서는 세상에 아무리 수행방법이 많아도 정혜등지가 되지 않으면 참다운 수행이 아니라고 하였다. 정과 혜는 마치 등과 불빛 같아서 등이 있으면 불빛이 있으나 등이 없으면 불빛이 없나니 등은 불빛의 몸이요 불빛은 등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나 몸은 본래 하나이니 정과 헤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등은 등대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평소에 알고 지내던 거사님이 조그만 항구도시에서 큰 목재상을 하면서 신심이 두터워 복지 시설에 큰 보시를 행하며 스님들 수행을 위해서도 많은 뒷바라지를 하며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는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거사님은 오전에는 사무실에서 지내고 오후에는 산에 가서 좌선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하면서 더 이상 만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내일 행복 믿어야 행복한 사람 한 노(老) 선사(禪師)가 있었다. 어느 가을 밤, 만추의 서정을 가득 담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선사는 밤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도적이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간경삼매에 빠져 있던 선사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선사가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물건을 가지러 왔는가, 아니면 목숨을 가지러 왔는가?” 도적이 말했다. “나는 돈을 가지러 왔습니다.” 선사가 다시 물었다. “훔치러 왔느냐, 얻으러 왔느냐?” 이 말에 도적이 대답을 못하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老 선사는 경상 아래 놓여있던 상자를 열어 동전이 든 주머니를 꺼내어 도적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을 모두 가져가거라.”
가을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가 푸른 바다를 지나가지만 일념도 없는 무심도인의 경계인양 아무런 흔적이 없다. 바다가 저렇게 깊어진 것을 보면 백천 강물을 받아들이되 아무런 조작이나 시비가 없어 늘거나 줄지도 않고 취사와 단멸상이 없으니 앞 물결이 뒷 물결을 방해하지도 않고 범성이 없어 일미의 한 맛으로 평등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방거사는 단하 스님과 함께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어느 행각승을 만나서 참으로 공부가 아까우니 부처를 뽑는 곳에 가보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수만 수레에 달하는 재물을 상강의 물속에 던져버리고 하는 말이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나는 순간의 고요함을 더 귀하게 여긴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만 고요함은 진여의 성품을 드러낸다”고 하면
내 마음 내가 쓰는데도 주객이 전도이것만 잘 쓰면 통하지 않음이 없어 여기 한 물건이 있다. 사람에게 각각 하나씩 있는 것이다. 그런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바치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며, 해와 달보다 더 밝고, 천지보다 크다. 가고 눕고 앉고 서고, 말하고나 묵묵히 있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한 일상 가득 분명한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잘 쓰면 통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잘 못쓰면 하는 것 마다 막힌다. 이것을 마음이라고들 하는데, 정작 우리는 이 마음의 주인 노릇은 못하고 산다. 번뇌라는 한 마리 말이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붙들어 매기 위해 매일 같이 말과 씨름한다. 그러나 천성이 야생마라 거칠기 짝이 없다. 한 번도 누구에게 붙들려본 적이 없
사람 몸 받았기에 불법을 만났고수행문 들었으니 은혜 헤아릴 수 없어 큰 파도가 일어난 것처럼 숲이 일렁거리고 있다. 산벚나무가 봄에는 꽃으로 첫 소식을 전해주더니 지금은 소슬바람에 몸을 맡겨 거추장스런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오직 진실만을 드러내고 있다. 낙엽이 뿌리에 내리듯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이 추석 명절을 맞아 차례를 마치고 절에 찾아와서 어렸을 적 추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어느덧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워진다. 세속의 집을 떠난 사문에게 고향을 물어보면 실례가 되는 일인데 마을 사람들은 인사를 건네듯이 궁금해 한다. 동진 출가한 자식을 생각하며 눈물로써 세월을 보냈다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새벽 종성에 간절하게 실어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지난해는 불사 때문에 무리하게 일을 했
승가 허물 들춰 스스로 격 낮추는 일 많아중생 귀의처도 존귀함 잃지 않을 때 가능 부처님은 길 위의 수행자였다. 어느 한 곳에 머무시기보다는 여러 곳으로 다니시면서 교화를 하시는 편이었다. 어떤 정사에 도착하든 시자인 아난존자에게는 고정적인 소임이 있었다. 그것은 하루에 두세 차례 비구들의 거처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야 혹 적당한 일이 아니면 부처님께 말씀드려 시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직접 앞장서서 가셨다. 도량의 한쪽 끝에 다다랐을 무렵, 한 거처에서 역겨운 냄새가 심하게 진동하는 것이었다. 발길이 자연스레 그곳으로 옮겨졌고, 부처님은 아난존자를 데리고 움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안은 어두웠고, 흙바닥에 병든 비구가 신음하고 있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인생의 고해에 큰 파도 몰아칠 때내 불성이 곧 피난처임을 알아야 서해안의 초라한 암자에 평생 숨어서 수행의 절개를 잃지 않은 이름 내지 않는 어느 노장님의 문안을 마치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배에 올랐다. 하루해는 마치 푹 익어서 꼭지 빠지려는 홍시처럼 바다에 반쯤 몸을 적시고 섬들은 장엄한 낙조의 후광에 깊은 선정에 들은 노장님처럼 단정히 앉아 있다. 세상 인연이 다해감을 짐작하고 두 달여의 단식으로 육신의 찌꺼기마저 깨끗하게 정화해 버려서 몸은 메말라 가죽만 남았지만 얼굴빛은 동자승의 모습으로 해맑아 보였으며 두려움 없는 눈빛이 생사에 걸림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상에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싸늘해 졌다. 십여 년 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출가 한다는 마음으로 유배지에 온 사람처럼 비장한 각오
명상은 지각하는 새로운 방식과의 친화내면에 대해 바른 인식 갖도록 노력해야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에 한 마법사가 양을 치며 살았다. 그런데 마법사에게는 양밖에 달리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양을 잡아먹으며 지냈다. 대신 양들에게는 한 마리씩 친구들이 사라져갔다. 마법사를 무서워하게 된 양들은 이리저리 숨을 곳을 찾아다녔다.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무서워진 양들은 모두 산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매일 여기저기 숨은 양들을 찾는 일은 마법사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매일 숨은 양을 찾는 일에 지친 마법사는 묘책을 하나 생각해냈다. 마법사는 양들에게 최면을 걸었다. “어린 양아! 너만은 예외다. 다른 양들은 모두 죽을지 몰라도 너만은 죽지 않는다. 너는 보통 양이 아니라 신성한 특권을 가진 양이다.
말속에 본래말 없고 사람만 있어일체의 이름은 마음의 다른 이름 가을 하늘이 소리 없이 내려앉은 바다는 더욱 푸르고 몽돌 밭에는 사람들의 흔적은 사라지고 지난 이야기만 구르고 있다. 시(詩)의 말들이 산처럼 쌓여 솟아오른 섬인가. 시선도(詩山島) 이름이 참 예쁜 섬이다. 선원의 좌향이 이 섬의 뾰쪽한 문필봉과 마주하고 있어서 처음 인연이 되었다. 오늘처럼 가을비 그친 후 청산같이 바다가 훤칠하게 트여 끝이 없는 날에는 수평선 저 너머의 세계가 그립고 걸어서 그 섬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문득 일어난다. 낮에는 멀어서 갈 수가 없지만 어둠이 내리는 밤에는 집집마다 걸리는 등불이 앞마당과 만나고 있어 더 없는 이웃처럼 가까워진다. 시(詩)자를 파자해 보면 절에서 쓰는 말을 시라고 하는데 사실 절에서 쓰는 말
진리는 돈 개입 못하는 순수한 것쉬운 깨달음에 대한 환상 버려야 얼마 전 황룡사 문제가 언론에 대두되면서 또다시 정법과 사법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줄로 안다. 이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있어 왔던 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요즘의 세태를 본다면 그야말로 온갖 삿된 법, 외도들의 황금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법 아닌 것들이 판을 치고 있지 싶다. 이럴 때일수록 불교를 공부하는, 또 정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정법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하면 구분할 수 있을까. 딱 정해진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어려운 문제기는 하겠으나 최소한의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몇 가지 적어 본다. 우선 첫째, 정법이 아닌 삿된 가르침을 구분하는데
깨달음은 정법 실천과 수행으로 가능익숙해진 악습과 게으름 경계해야 오랫동안 사찰에 다니시면서 신행 생활을 하신 분들도 가끔식 보면 사찰 안에서 말싸움을 한다든가 다른 신도를 헐뜯는 경우를 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찰에 오래 다녔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큰 스님들 법문을 들으면서 부처님 법을 따라 왔는데도 생활에 좀처럼 변화가 없고 불교 신행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면 문제가 좀 있지 않나 싶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살펴보면 우선 불교에 대한 익숙함과 부처님 법 따르는 것을 혼동하는 데에 있다. 사찰에 오랫동안 나온 분들은 당연히 사찰안의 여러 가지 생활에 많이 익숙해져 있다. 또한 그런 분들 중 여러 다수가 사찰 안에서 감투를 하나씩 쓰면서
앎에 사로잡혀 사물 보면 편견 생겨텅 빈 시선으로 그대로 보고 느끼자 새벽 도량이 쨍쨍하다. 유난히 새벽녘에는 새소리가 크게 들린다. 대충 흘려들어도 예닐곱 종류 이상의 새들이 매일 아침 예불에 동참한다. 조용히 새소리를 듣다 보면 이놈은 어떤 새일까, 또 저 목소리를 가진 새는 어떻게 생겼을까, 많이 궁금해지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새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마찬가지로 도량 주위로 포행을 하다보면 사소하게 피어난 온갖 들풀이며 야생꽃들 또한 내 마음을 한참 동안 빼앗아 가곤 한다. 산에 사는, 농촌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무와 풀, 꽃 그리고 새들이며 곤충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이름을 알고, 그 인연을 알고 마주했을 때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