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음은 원효 스님에 대한 설명이다. 그 내용이 맞지 않는 것은? ① 원효 스님이 활동했던 7세기는 삼국의 항쟁과 통합으로 이루어지는 격변기였다. ② 원효 스님은 15세에 출가 혜공, 낭지, 보덕 스님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③ 원효 스님은 의상 스님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을 시도하여 1차(650년)는 요동에서 실패하고, 2차(661년)에 백제의 항구를 통해 당나라로 유학하는데 성공한다. ④ 원효 스님은 무열왕 때 요석공주와 결혼해 설총을 낳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한다. 2. 원효 스님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설명이다. 내용 중 설명이 틀린 것은? ① 원효 스님은 경, 율, 론 삼장에 두루 통하여 80여부 200여권의 저술을 남긴다. ② 원효 스님의 대표적인 저서로 『십문화쟁론』,
‘사람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아서 그대로 머물기 어려우며 몸은 부싯돌의 불과 같거늘 어찌 장구(長久)할 수 있겠는가’ 단청빛 어여쁜 경주 톨게이트를 지나 미타사가 있는 내남면 망성리를 향해 나아갔다. 물어물어 마침내 찾아낸 이정표. 허름한 팻말이 일러주는 대로 짙은 먹구름 사이로 연두 햇볕 일렁이는 소롯길을 따라 올랐다. 드디어 미타사다. 빽빽한 대나무 숲이 휘감고 있는 이 절은 마치 둥지에 살포시 안겨있는 새알 같은 형세다. 한갓진 이곳에 염불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것은 미타사 조실 법장 스님이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출가 후 줄곧 염불에만 전념해 온 수행자로 미타만일회를 결성해 21년째 이끌고 있기도 하다. 스님의 일과는 수행으로 시작해서 수행으로 끝난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해 밤
요석과 사랑은 파계 아닌 의도된 몸짓‘생이지지’는 잘못…평생 정진한 수행자경주 분황사에 모셔져 있는 원효대사 진영.원효는 44세이던 문무왕 원년(661년)에 다시 도당유학의 길을 나섰습니다. 물론 이 때도 의상과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남양만이 멀지 않은 직산의 어느 옛 무덤 속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 전하는 원효의 오도(悟道) 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원효와 의상은 중도에 심한 폭우를 만나 길 옆의 토감(土龕) 사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과 습기를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 보니, 해골이 있는 옛무덤이었다. 궂은비는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또 연도의 벽 중에 머물렀는데, 밤이 깊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큰 스님은 암말과 성교하고 비구니는 과부 출신” ‘제보자’입빌어 의혹 남발 … “2탄 준비” 으름장도 “무슨 내용 때문에 「월간 중앙」의 폐간까지 요구하는가.” 「월간 중앙」8, 9월호에 실린 불교와 관련된 음탕스러운 기획시리즈에 관해 들어본 이 땅의 스님과 불자들은 그 마음을 쉽사리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이 삿된 악행을 단번에 끊어 없애기 위해 분노존으로 변하듯 스님들과 불자들의 모습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월간 중앙」에 과연 어떤 내용을 실었기에 사부대중이 하나가 되어 관세음보살의 분노존을 닮아가고 있는가. 「월간 중앙」 8월호의 ‘갓 쓴 양반들의 성담론 ⑥금단의 성’이란 기획시리즈는 “사람 살리기 주로 하시는 스님 어찌 나를 이를 죽여주시나
원효종 15대 총무원장 취임 무진 스님이 지난 7월 28일 오후 2시 울산 목련암에서 300여 명의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불교 원효종 제15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했다. 부원장에는 향운 스님이 취임했다. 김형효 교수 정년퇴임 고별강연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8월 26일 오후 3시 30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철학’을 주제로 정년퇴임 고별강연을 한다.
1. 고구려의 승려로서 중국으로 건너가 양나라 무제와 고승들에게 불교학을 지도하였고 중국 삼론학의 기초를 다진 스님은? ① 아도화상 ② 마라난타스님 ③ 승랑스님 ④ 묵호자 스님 2. 중국의 삼론종은 길장 스님에 의해 대성되었다. 삼론종 사상의 중심은 파사현정(破邪顯正)에 있다. 이 삼론종이 근거하는 불전으로 세가지를 말하는데 이 중에 속하지 않는 것은? ① 「금강삼매경론」 ② 「중론」 ③ 「백론」 ④ 「십이문론」 3. 신라의 통일 이념을 세운 세속오계는 화랑의 지도이념이자 바로 신라사회의 실천 강령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속오계는 또 보살계 사상에 근거한 대승윤리의 실천을 제시한 것이다. 이 세속오계를 지도한 스님은? ① 명랑 스님 ② 원광 스님 ③ 겸익 스님 ④ 담징 스님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삼성출판박물관아카데미(교장 김종규) 주관으로 지난 8월 17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삼성출판박물관에서의 원효사상을 주제로 첫 강의를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열리는 이번 원효사상 강좌에서 김 교수는 원효(617~686)를 역사적, 문화적, 사상적, 종교적인 다양한 접근을 통해 한국불교의 새벽을 연 ‘인간 원효’를 규명한다는 계획이다. 본지는 원효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될 ‘원효 강좌’를 정리, 매주 게재한다. 편집자 김상현 교수는 '원효는 원(願)이라는 갑옷을 입고 수행과 학문에 부지런히 정진했던 위대한 인물로 중생들의 영원한 사표'라고 강조한다.천부적 재능-불같은 열정 지닌 대학승‘화쟁의 논리-자유인 몸짓’아로새겨야원효는 삼국간의 전쟁과 통
원효 연구는 13세기 문헌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현대적 학문방법에 의한 연구의 역사 또한 100여 년에 이르고 있다. 양적으로도 지금까지 발표된 원효 관련 논문이 수천 편이 넘으며, 원효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소위 원효전문가도 30여 명에 이르고 있다. 동국대 김상현 교수도 어찌 보면 그 숱한 학자들 중 한 명에 속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들 수많은 연구자들 가운데 원효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단연 손꼽히는 인물이다. 방대한 원효의 저술 하나하나에 대한 깊은 인식을 토대로 하되 사상적인 면에 매몰되지 않고, 치밀한 역사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되 흔히 빠지기 쉬운 ‘정치적 잣대’나 ‘호교론적 입장’에서 벗어나 가장 근본적이라 할 수 있는 ‘불교적·종교적 이해’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또 신라시
봉화 각화사 금봉암 중창 마무리 30평 규모, 11월 중 낙성식 봉행 중창불사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각화사 금봉암(동암) 전경. 참선수행 도량 봉화 각화사(주지 노현 스님) 동쪽 암자인 금봉암의 중창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금봉암은 현재 95%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으며 낙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각화사 동암으로 더욱 유명한 금봉암은 1867년(고종 16년) 중수된 이후 수차례에 걸친 보수를 통해 유지돼 왔다. 하지만 12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는 더 이상 보수만으로는 버티기 힘겨운 상태에 이르렀고 건물뿐 아니라 지반이 침하되는 등 전면적인 중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금봉암 중창은 지난해 1월 각화사 주지로 노현 스님이 부임하면서부터다. 3
SMA(삼성출판박물관아카데미·교장 김종규)는 8월 17일(수)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김상현 동국대 교수(사학과·사진)의 ‘원효 사상’ 강좌를 개설한다. 강의는 모두 다섯 차례(5주). 구기동에 위치한 SMA는 그동안 김상현 교수의 ‘삼국유사’ 강의를 비롯하여,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초대 러시아대사)의 ‘러시아사’, 김충렬 박사(고려대 명예교수)의 ‘장자 4강’ 등 주옥같은 강좌를 개설, 문화예술계 인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김종규 교장(한국박물관협회장)은 “문화예술인을 대상으로 출발한 SMA강좌를 궁극적으로는 문사철의 부흥을 일궈내는 메카로 발전시켜나갈 것”이라며 “원효강좌에 이어 김용덕 서울대 교수의 ‘일본사’강좌도 개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상현 교수는 “
“합창단 불자들의 힘을 모아 부산 불교발전의 원동력이 되겠습니다.” 7월 21일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열린 부산불교합창단연합회 창립식에서 신임 회장에 추대된 김귀련 회장〈사진〉은 “원효 스님이 무애가를 부르며 중생을 제도하셨듯이 음성공양을 통해 부산 불자들의 단합을 이뤄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지난 2년간 부산불교합창단연합회가 분열돼 반목을 하는 등 적지 않은 내홍이 있었다”고 전제하고 “이제 30개 합창단이 연대해 부산불교합창단으로 공식 출범한 만큼 1000여명에 이르는 불자 회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일에 매진하겠다”며 “부산불자들의 애정 어린 비판을 경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부산 공덕원 합창단 단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부산 감로사 신도회장, 부산광역시 불
경상남도는 남해 용문사 목조지장시왕상 등 15건의 문화재에 대해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경상남도는 지난 7월 20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남해 목조지장시왕상, 목조 사천왕상, 건륭이십오년명 운판(雲版), 부도군 등 용문사 소장품 5건, 양산 원효암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복장 유물, 마애아미타삼존불 입상과 창원 봉림사 소장 불교 전적류(典籍類)등에 대해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경남도는 또 합천 우곡리 폐사지(廢寺址)를 기념물로 새로 지정했으며 고성 철산정사(鐵山精舍)와 합천 북산정(北山亭), 합천 두산정(杜山亭), 창녕 소곡서당(蘇谷書堂), 남해 용문사(龍門寺) 동종(銅鐘), 청동반자(靑銅飯子) 등은 기념물로 새로 지정했다. 이번 문화재 지정 고시로 경상남도는 국가지정문화재는 2
“국내 현존하는 원효 스님의 진영(眞影) 대부분이 스님의 원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이는 스님에 대한 철저한 고증 없이 진영을 만든 결과 때문입니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원효 스님의 사상을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스님의 진영을 올바로 복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효 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9월 발족한 원효사상실천승가회 회장 가은〈사진〉 스님은 “최근 원효 스님을 주제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또 수많은 연구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스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진영은 사실과 다르게 묘사돼 있다”며 “이는 충분한 학술적 고증 없이 무분별하게 조성돼 봉안돼 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이 원효 스님의 진영 복원 불사
“전통음악을 통해 불교 포교에 앞장서는 것은 물론 독거 노인 등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마음으로 불자국악인들이 한울타리에 모였습니다. 앞으로 광주를 대표하는 신행 단체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7월 8일 창립된 광주불교국악인불자모임 ‘예인회(藝人會)’ 초대 회장에 선임된 이복순 회장〈사진〉은 “부처님의 넉넉한 품인 사찰과 전통 음악은 불음(佛音)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편”이라며 “주변의 이웃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신임 회장으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이 회장은 이어 “회원들을 중심으로 월 1회 무등산 원효사 등산로 공연을 통해 자선 모금을 통해 경로잔치와 독거 노인을 돕는 일을 주도적으로 할 계획”이라며 “문화 광주라는 명성답게, 광주를 대표하는 문화
만암 스님은 백양사에 주석하며 계율청정을 엄격히 해 칼날같은 승풍을 확립했다. 만암 스님은 흉년에 끼니를 굶는 백성들의 참상을 가장 마음 아파 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해결해주실 수 있는 정도면 늘 백양사 안에서 도와주려고 애썼다. 개울에 보를 쌓게 하고 양식을 품삯으로 준 것도, 산에 나무 심는 일을 시키고 품삯을 양식으로 준 것도 모두 굶고 있는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 해의 흉년이 아니라 2년, 3년 계속된 흉년은 만암 스님의 도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고 속 곡식 자갈과 뭐가달라 흉년이 거듭된 어느 해 보릿고개를 당해서 만암 스님은 소달구지에 자갈을 담은 가마니를 몇 개 싣고 어떤 부잣집을 찾아갔다. 그 부잣집 곡식창고 안에는 해묵은 벼가 가득 쌓여 있
1979년 7월 10일 입적 15세 전부터 독립운동 제헌국회의원 활동도 86년 대통령 표창 추서 효당(1904~1979) 스님은 13세에 출가, 1979년 입적할 때까지 원효 교학연구와 차선 삼매로 일관했으며 건국사업과 교육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당 스님하면 15살이 되기도 전인 소년시절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일생동안 계속된 스님의 독립운동에는 만해 스님의 동지적 신뢰가 근간을 이루었다. 1904년 경남 사천군 서표면에서 4남 3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효당 스님은 1910년 고향의 사립학교인 개진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인 교사 배척과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이후 곤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으며
“우리말의 뿌리는 실담(범어의 음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도 범어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 일등 공신은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신미 스님인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속리산 법주사 강원에서 개최한 특별강연회에서 한국세종한림원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집현전 학자도 세종대왕도 아닌 신미 스님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주제로 강연한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 해제본에 나와 있는 초기 표기법을 검토하면 실담에서 유래한 흔적이 매우 많다”며 “이는 훈민정음이 실담을 기초로 제작됐고 따라서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에 의해 훈민정음이 제작됐을 것”이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아미타불 전문도량이 문을 열었다.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아미타사는 7월 10일 효란 스님을 초청법사로 사부대중이 참여한 가운데 개원법회를 개최하고 본격적인 도심 염불포교에 들어갔다. 아미타염불을 주된 수행법으로 열심히 정진하는 불자가 수만 명에 이르지만 정작 염불도량은 턱없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아미타사는 순수정토염불도량을 표방하며 염불행자라면 언제든지 찾아 정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토수행은 어느 수행법보다 탁월함에도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아오지 못했고, 특히 육조 혜능선사조차 「선정쌍수집요」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 만세(萬歲)에 괴로움을 뛰어 넘는 묘도(妙道)요, 부처님을 이루고 조사가 되는 정인(正因) 삼계인천의 안목이요, 마음을 밝히고
“염불만 하던 시대는 지났다 노래 재능있으면 노래로 포교를…” 포항 대성사 주지 운 붕 스님 “오늘날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 방송 매체가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공중파 방송에는 종교인이 출연해 종교색이 담긴 언행을 전혀 할 수 없게 규제되어 있지요. 하지만 가사 장삼을 수한 채 방송에 출연해 ‘효’ 사상을 강조하는 스님의 모습은 그 자체가 포교입니다. 오히려 제가 출연하면 이웃 종교인으로부터 ‘왜 스님이 나와서 노래하냐고, 니들 방송사가 불교방송이냐’며 항의 전화가 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직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중 포교에 힘써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트로트 가락에 노랫말을 담은 ‘빈잔’이라는 곡을 발표해
1.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이 가장 쉽게 감응할 수 있는 실천의 방법과 신앙체험의 장을 마련해 주는 가장 보편적인 대승보살의 상징이다. 이 보살의 특징과 부합되지 않는 명칭은 ? ① 관자재(觀自在) ② 대세지(大勢至) ③ 대비성자(大悲聖者) ④ 시무외자(施無畏者) 2. ‘만약 무량백천만억의 중생이 있어 그들이 모두 갖가지 고뇌를 받음에 이 관세음보살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칭명하면 관세음보살은 즉시 그 음성을 관하여 모두 해탈을 얻게 한다’는 관세음보살의 중생구제의 대비 원력을 잘 드러낸 구절은 어느 경전에 있는가? ① 『화엄경』 ② 『법화경』 ③ 『유마경』 ④ 『관무량수경』 3. 대승에 있어서 보살은 서원에 살고, 항상 서원을 실천해 가는 것에 보살의 생명과 본질이 있다. 관세음보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