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에 차 그림자가 길게 누울 무렵 길 위에서 만난 한 수행자는 오체투지로 라싸를 향하고 있다. 사막의 섬 둔황, 여기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생애 다시 한 번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요한 둔황이 어둠에서 깨어나고 있다. 오늘은 둔황으로 올 때와는 달리 남로를 택했다. 칭하이성(靑海省)의 성도 시닝(西寧)을 거쳐 란저우(蘭州)로 이어진 길이다. 둔황을 벗어나 한 시간 정도 달리니 멀리 당진산(當金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 산의 정상은 3535미터로 이 곳을 기점으로 칭하이성의 고원지대가 시작된다. 차가 산비탈을 오를수록 사막의 무더위는 사라지고 서늘한 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온도계를 들여다보니 영하 5도다. 다시 1
타얼사에서 가장 큰 규모인 대경전(大經展)에 들러 나오니 앞에 두 스님이 걸어가고 있다. 그 스님들은 맹인부부 앞에 들러 보시를 하고는 절의 입구 쪽으로 향한다. 우리는 달려가 스님들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눴다. 한 스님은 서른 살이고 앳되어 보이는 스님은 열일곱이란다. 두 분 모두 눈이 칭하이호처럼 해맑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라싸에서 왔다며 쫑까파 스님의 성지를 순례하러 이 곳을 찾았다고 답한다. 티베트 문화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다소 애매한 질문에 “티베트의 정신은 불교”라고 나이든 스님이 힘 있게 말한다. 오대산을 들러 라싸로 돌아갈 거라는 이들에게 한국 스님들은 여비에 보태 쓰라고 슬며시 봉투를 내민다. 오대산을 거쳐 라싸로 떠날 계획이라는 젊은 티베트 스님들. 티베트의 독립과 달라
둔황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야단지질공원. 온갖가지 모양의 거대한 흙덩어리들이 사막 위의 섬처럼 불쑥불쑥 솟아있다. 새벽부터 부산스럽다. 오늘도 둔황까지 먼 길을 가야하는 탓에 꼭두새벽부터 서둘렀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호텔 측에서 식사를 준비할 수는 없단다. 대신 미리 준비한 만두와 빵 음료수를 챙겨 둔황으로 향했다. 우루무치를 목적으로 달려온 실크로드 장정. 쿠차와 카슈가르까지 달리지 못하는 게 여간 아쉽지 않지만 돌아가며 볼 티베트 사원, 마이즈산(麥積山) 석굴, 룽먼석굴(龍門石窟), 법문사(法門寺) 등으로 위안을 삼을 밖에. 오전 7시, 우루무치를 벗어났는데도 온통 암흑투성이다. 이 곳 일정이 짧은 탓에 우리가 미처 우루무치 시간으로 바꿔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장 소도시의 택시
카오창고성을 빠져나올 무렵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우리는 길을 서둘렀다. 우루무치까지는 아직도 200여 킬로미터를 더 가야한다. 어스름한 창밖으로 검붉은 사막이 펼쳐져 있다. 이곳 타클라마칸의 흙빛은 고비 사막의 그것보다 훨씬 짙다. 날이 지고 있는 탓도 있지만 풍부한 광물자원 때문이다. 사실 위구르족의 자치구인 신장(新疆)은 실크로드의 요충지일 뿐 아니라 100억 톤의 석유와 석탄을 비롯해 엄청난 광물자원이 묻혀있는 중국의 보물창고다. 이런 까닭에 여기저기서 유전개발을 하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얀 솜사탕 같은 만년설을 머리에 인 톈산 보고타봉, 그 아래 자리 잡은 천지는 주변의 푸른 수목들과 어울려 기막힌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국에서 듣는 ‘나그네 설움’
시안(西安)의 아침은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분주하게 시작되고 있다. 오전 7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 거리는 이미 차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자전거 행렬들. 전 세계 자전거의 3분의 1인 4억5000만대가 이곳 중국에서 움직인다는 말이 실감난다. 대부분 시가지에 언덕이 없어 먼 거리를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고, 곳곳에 자전거 전용 도로를 설치한 것이 중국을 ‘자전거 왕국’으로 만들었을 듯하다. 무뚝뚝한 표정에 경직된 모습의 병사들. 2200년의 시공을 넘어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듯 하다. 11개 왕조가 도읍 정한 古都 우리 일행은 시내구경에 나섰다. 거리에 신문을 파는 이, 잠깐 비가 그친 틈을 이용해 공터에서 태극권을 하는 노인들의 모습도 띈다. 멀리로는 강철,
2000년 중국부교의 최고봉 현장 법사. 그는 이 곳 자은사를 지을 때 인부들과 함께 벽돌을 나르기도 했다. 사진은 대안탑 7층에서 내려다 본 자은사 전경. “길을 가기 수만리,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혹한과 얼음으로 뒤덮힌 산길, 파도 높은 격랑의 골짜기, 여독흑풍의 매서움, 야수와 맹수들의 무리를 현장법사는 홀로 갔다. 쌓인 눈이 새벽에 날려 땅을 덮어 길을 잃고, 바람에 날리는 모래 저녁에 일어나 공중 밖 하늘에서 헤매었다. 만리산천의 구름과 안개를 헤치며 그림자를 내몰아 수없이 거듭되는 추위와 더위와 서리와 이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으리라. 심오한 법을 구하여 통달하기를 바라며 인도를 두루 유학하기 17년, 온 나라를 다 편력하며 바른 가르침을 구하였어라.”-『대자은사삼장법사전』 中
시안에서 란저우로 이어진 협곡마다 온통 밭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힘겨운 삶의 무게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까지 농사를 짓게 했으리라. 병마용갱과 대자은사를 뒤로 하고 화청지(華淸池)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유명 관광지 어디나 그렇듯 화청지 앞에도 상점들과 노점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주차장 앞 공터에는 반바지 차림의 아이들이 공을 쫓아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다.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에도 등장하고 있듯 이곳 화청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이 환영처럼 서려 있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제법 운치를 더해준다. 화청지 내에 20∼40위엔을 내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대중온천목욕탕도 그런대로 어울리는 편이다
란저우를 벗어나면 삭막한 대자연과 마주하게 된다. 이 길은 4세기 초 법현 스님이 구법의 길을 걸으며 "위로는 날아가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오직 죽은 사람의 오래된 뼈만이 길 가는 이의 표지가 될 뿐이구나."라고 토로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도 날은 어김없이 밝아온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다. 어제 15시간의 강행군 끝에 우리가 란저우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가까워서였다. 불과 몇 시간 전이지만 마치 꿈결처럼 아련하다. 찬물을 머리에 쏟아부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어느새 창밖으로는 란저우가 어둠을 밀어내고 거대한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란저우(蘭州)는 서북부 최대의 공업도시로 300여 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인구 수십만의 변방도시였으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우리는 주유를 하기 위해 장예(張掖) 부근에서 잠시 멈췄다. 그 때 한 노인이 다가와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70~80년대 복장에 허연 수염이 인상적이다. “할아버지, 이 동네 사세요?” “응”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이 어느 나라인지 아세요?” “한국?,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할아버지는 82세로 이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실크로드를 따라간다는 말에 “나도 언젠가는 꼭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아버지는 긴 수염을 휘날리며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랴오둥 산하이관을 떠난 만리장성이 거대한 용처럼 꿈틀대며 이곳 서역의 사막, 치롄산맥의 발치에 초라한 머리를 쳐들고 있다. 사진은 만리장성의 끝 자위관. 밝은 달은 천산에 떠오르고/고향은 아득히 구름 바다 너머에 있네 긴 바람 소리 옥문관을 휩쓸고 가네 우리 군사는 백등산으로 밀려나고/오랑캐는 청해를 넘보는데 예로부터 전쟁터에서/살아 돌아온 사람 보지 못하였네 삭막한 변방의 병사들/고향 생각에 지친 얼굴들 이 밤 높은 누각 위에서도/한숨소리 그치지 않는구나. 明月出天山 蒼茫雲海間 長風幾萬里 吹度玉門關 漢下白登道 胡窺靑海灣 由來征戰地 不見有人還 戍客望邊色 思歸多苦顔 高樓當此夜 歎息未應閑 -이백(李白)의 관산월(關山月)- 주취안(酒泉)에서 하룻밤. 호텔측에서 제공하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길, 이 길은 둔황으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멀리 치롄산맥 아래 긴 굉음을 울리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육중한 화물열차가 보인다. 자위관을 뒤로 하고 차는 둔황을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누런 사막 위에 길게 뻗은 도로가 마치 검고 굵은 한 마리 뱀 같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 있는 구름은 어린 시절 고향 산천에서 보았던 하얀 눈마냥 뽀송뽀송해 보인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길, 이 길은 둔황으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 때다. 멀리 긴 굉음과 함께 아스팔트보다 짙은 육중한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량, 두량, 세량…. 끝이 안 보이는 게 족히 오십량은 됨직하다. 땅 덩어리가 크다보니 화물열차도 저렇게 긴 걸까
짐을 꾸려 숙소 밖으로 나왔다. 새벽공기가 꽤나 쌀쌀하다. 어둠이 채 걷어드리지 못한 별들이 희뿌연 하늘에 걸려 있다. 2600년 전 카필라국의 젊은 왕자 싯타르타도 저 별을 보고 깨달았다지. 오랜 고행에 야위고 뼈만 남았을 그 젊은이에게 저 별은 어떤 의미였을까. 둔황에서 300여km 떨어진 대설산. 해발 5555m의 이 산은 몽고인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하다. 갈수록 낯설어지는 중국음식들. 간단히 아침식사를 떼운 후 차의 시동을 걸었다. 오늘 목적지는 간쑤성(甘肅省) 몽고족자치현의 대설산이다. 둔황의 상징 막고굴보다 대설산을 먼저 간다니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몽고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차는 숙소를 빠져나와 고향길 같은 도로를 세차게 나아갔다. 이른 아침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