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 스님화계사 주지 청명청명 가을 하늘마저 눈물겹다. 생명평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노라면 그 모든 것들이 참으로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종교대로 그러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환경 등 그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더구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두 기둥을 무참하게 쓰러트리는 불교계의 추악한 모습들은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해 관음의 천수천안이 되어야 할 수행자들이 오히려 더 깊은 중병을 앓고 있으니 속인들의 눈에 비치는 불교계의 위상은 그야말로 ‘도로아미타불’이 아닌가. 마침내 터질 것이 터지고 올 것이 왔으니 이제 남은 것은 발로참회뿐이다. 지난 10월 28일 삼각산 화계사에서는 ‘이주 사망노동자를 위한 천도재’를 봉행했다. 이 땅에서 차별과 천대를 받
1947년. 청담, 성철, 향곡, 자운, 월산 스님 등 당시 20∼30대 수좌 30여 명은 문경 봉암사에 모여 암울한 일제 식민지 불교의 잔재 속에서 한국불교에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조사들의 가르침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다짐하며 결사에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한 평생 결사정신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조계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그로인해 대중들의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한국불교의 희망이 됐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2007년 10월 19일, 봉암사에서는 또다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1만여 사부대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근 몇 달간 마곡사, 관음사, 동국대 등에서 발생한 낯 뜨거운 일들이 각종 언론매체에 오르내리며 만신창이가 된 채 그 위상에
김 상 현동국대 교수 며칠 전 그 민망한 PD수첩을 끝까지 봤다. 그리고 조선시대 승려들의 고통과 눈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허응당 보우는 어느 날 제자를 산 아래 마을로 탁발을 보내야 했다. 허기진 몸으로는 수행조차 어려웠기에. 그는 근심했다. 행걸하는 마을 집의 문지방은 참으로 높을 것이고, 위태로운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탁발승이 악동들의 놀림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 근심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당부했다. “그래도 결코 간사하게 구하지는 말라.” 다산이 그렇게 좋아했던 아암 혜장, 그가 어느 벼슬아치에게 보낸 편지 중의 한 구절이다.“저는 먹지 않고 그냥 지나는 때가 많아 진흙이나 솜처럼 힘이 없고, 모습은 귀신같지만 혼만은 흩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보리밥이라도 배
3년 6개월간의 불사 끝에 금강산 신계사가 14개 전각을 거느린 대찰로 거듭났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전소돼 삼층석탑과 주춧돌만 남아 있던 도량을 남과 북의 불자들이 공동으로 노력해 복원했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10월 13일 신계사에서 봉행된 낙성법회에서 남북 불교의 지도자들은 “신계사는 남북 불교도의 연대의 상징이며 통일기원의 도량”이라며 의미를 부여했었다. 남북 불교 지도자들의 말과 같이 신계사 복원은 남북 불교사와 분단사에 큰 획을 긋는 대작 불사임에 틀림없다. 남북 불교의 공고해진 신뢰의 탑을 상징하는 동시에 향후 남북 불교 교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현재 조계종은 조불련에 남북 양측의 스님 20명씩, 총 40명을 신계사에 상주하게 하자는 안을 제시해 놓은 상태이다.
불자들이 낸 보시금 승려 개인 사욕에 탕진인맥-파벌 청산부터…포교 일선 ‘자괴-참담’자정-개혁 없을 땐 ‘한국불교’ 자멸할 수밖에 늦은 밤에 아는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바로 MBC TV를 보라는 것이었다. ‘PD수첩’이었다. ‘마곡사 사태’와 제주도 관음사 사태‘가 집중 보도되었다. 공찰의 주지 임명에 금전거래가 이루어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꼴사나운 이야기들이 증인의 입을 통해 여과 없이 늦은 밤을 뒤흔들었다. 종회의원이 되고 공찰의 본말사 주지가 되려면 얼마만한 돈은 써야한다는 것이 이미 스님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이렇게 공중파를 타고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보니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자괴감마저 느끼게 한다. 지금 우리절에서는 조계종 총무원의 지침
“한나라당이 신 씨 교수 임용과 월정사 예산 지원 과정에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L 씨가 개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사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2005~2007년 사이 월정사에 국고 47억원을 지원한 것은 신정아 씨의 동국대 교수 임용과는 관련이 없이 사찰의 문화재 보수·정비·복원 차원에서 2004년부터 적법 절차를 거쳐 예산에 편성되어 2005년부터 집행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위 내용은 「조선일보」의 9월 21일자 1면 머리기사와 10월 2일자 1면 하단에 보도했던 내용이다. ‘정정 보도’라는 문구가 빠져서 그렇지 사실상 9월 21일 게재했던 기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자인하는 보도와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지면 어디에도 사과 한마디
손 혁 재경기대 정치교육원장 얼마전 속리산 법주사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주최하고 불교인권위원회가 주관한 불교인권학교가 열렸다. ‘자비, 생명 그리고 우리들의 인권’이라는 주제로 열린 불교인권학교는 불교와 인권, 지구화 시대 평화문제와 생존권, 학교에서의 종교자유 문제 등을 다루었고 다른 종교 인권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불교와 인권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 불교경전의 말씀 어디에서 인권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우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오히려 인권과 관련되지 않은 것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부처님 말씀이야말로 2500여년 전에 나온 뛰어난 인권선언이 아니겠는가? 인권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다. 사
윤 청 광방송작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저 추악한 ‘신정아 소동’으로 종립 동국대학교는 물론이요, 한국불교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 아프간 선교를 강행했다가 납치 사건을 야기 시켰던 기독교계는 ‘신정아 사건’으로 국민적 지탄을 손쉽게 벗어났고, 온갖 부동산투기 의혹과 주민등록을 상습적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녔던 ‘대통령 후보 이명박’도 신정아 사건 덕분에 여론의 심판에서 벗어난 반면, 불교계는 온갖 치사하고 추잡한 오물바가지를 통째로 뒤집어쓰고 치명적인 위기에 내몰렸다. 제법무아 제행무상(諸法無我 諸行無常), 세상의 부귀영화도 풀잎 위에 이슬이요, 출세와 권력과 재물도 물 위의 거품이며 인생 그 자체가 번갯불 같고 꿈속의 꿈이며 그림자임을 일찍이 깨달아 사랑하는 부모형제도 헌신짝 버리듯 내버리고 삭발 출가한
동국대 추락의 끝이 안 보인다. 조계종이 신정아 씨 문제를 불교계와 무리하게 연결 짓지 말라는 강력한 요구에 요즘 불교계에 대한 언론의 날 선 비판이 다소 뜸해졌지만 동국대는 예외다. 언론과 방송에서는 연일 신정아 씨를 문제를 다루고 있는 상황에서 동국대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신 씨의 교수 임용 배경에 변양균 전 실장과 동국대 이사장의 ‘거래’가 있었다는 의혹이 이미 제기된 가운데, 최근에는 이사장 스님이 회주로 있는 흥덕사 특별교부세 지원 의혹 및 이사장 차명 계좌 문제가 또다시 언론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다. 이런 여건에서 동국대가 앞으로도 언론의 뭇매를 맞을 거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뢰란 쌓기는 어렵지만 잃는 것은 한 순간이다. 특히 지난 동국의 100년이 무색하리만큼
미디어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만큼 그 의무 또한 막중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없다. 어떤 기사든 일단 보도되면 이후 정정을 하더라도 훼손된 신뢰와 명예를 되찾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불교와 관련된 일반 신문이나 방송 보도를 보면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조차 망각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보광사 관련 보도에서 확연히 드러나듯 그곳에 문화재가 있다는 것은 전화 한 통화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음으로서 오보를 내고, 더욱이 잘못된 보도가 다른 언론사에서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불교계를 연일 곤혹에 빠뜨리고 있다. 종단협, 중앙종회, 교구본사주지회의, 중앙신도회 등이 언론사의 보도 태도에 문제를 지적하고 나온 것도
덕 진 스님정토사 주지 신정아라는 한 맹랑한 젊은이로 말미암아 우리 교계가 느끼는 불쾌감은 감내할 수준을 넘고 있다. 사람이 둘이나 생명을 잃고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던 아프간 인질사태의 책임문제는 잊은 지 오래고 코앞으로 다가온 대권도 신정아 보다 덜 중요한 듯 거대 언론들은 거의 석 달 가까이 그들의 작은 부분까지 캐고 또 캐고 있다. 거대 언론들이 신정아를 마치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인물이거나 모든 국민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대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신정아 패션이 어떻고 가방이 얼마짜리니, 또 누구와 메일 상에서 호칭을 어떻게 썼는지 등 법과도 관련이 없고 국민 전체에 끼치는 영향도 없는 것들을 선정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면서 동국대와 불교 전체가 범죄에 연루된 듯 한 논조로 지면을
이 기 화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류 작가의 한 사람인 박완서 씨의 단편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가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 최대 불교종단인 조계종 내부에서 발생한 일련의 불상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부끄러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에서 축생은 인간 아래 차원의 세계이다. 동물들이 부끄러움을 느낄까? 아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축생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은 무엇일까? 부끄러움에 대한 지각이리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축생에 가까운 사람이리라. 안타까운 것은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부 몰지각한 스님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불상사들이 발생하며 우리나라 불교를 한없이 추락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