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 에밀레~’ 종을 칠 때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애절한 소리가 들린다는 에밀레종 전설의 주인공은 근대 이후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대상이었다. 하지만 에밀레종 설화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중세의 사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근대 이후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를 불교의 인신공양(人身供養) 내지 고대인들의 사신공희(捨身供犧) 풍습, 즉 사람을 바쳐 제물로 삼는 형태의 이야기가 설화로 정착된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런데 최근 종을 만드는데 희생된 아이가 혜공왕을 가리키며, 이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전횡으로 21살의 나이에 죽임을 당한 어린 왕에 대한 신라인들의 연민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 등장했다. 『한국어문학연구』 제47집에 수록된 「에밀레종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전설이 신라 혜공왕대(신라 36대왕, 756∼780) 왕실의 권력 암투 과정을 재가공한 정치고발성 설화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불교미술사학자 성낙주〈사진〉 씨는 『한국문학연구』제31집에 수록된 「에밀레종 전설의 정치학적 독해」에서 “에밀레종 전설은 어머니 만월부인과 외삼촌 김옹의 정치적 전횡의 결과로 발생한 쿠데타로 인해 끝내 살해당한 혜공왕을 빗댄 설화”라고 주장했다. 이는 에밀레종 설화를 불교의 사신공덕(捨身功德) 내지 상고시대 이래의 인신공희(人身供犧)로 해석해온 기존 학설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이다. 성 씨는 “혜공왕이 8살에 즉위한 후 모후 만월부인과 그녀의 오라비인 김옹은 함께 국정을 농단했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친정 왕조를 개창하려다가 김양상 등의 반발로 실패했다”며 “당시
전공학자들이 제시한 근현대사 연구과제1. 국내외 자료의 수집2. 타학문과 연계한 학제간 연구 필요3. 근대 일본불교의 동향 및 한국으로의 침투4. 일제시대 고승들의 사상 및 활동에 대한 연구5. 불교계 친일문제 진단 한국의 불교사 연구는 고대에서 현대로 내려올수록 전공자가 적다. 다른 역사학 파트에서는 시대가 올라갈수록 전공자가 적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원효와 의상으로 대표되는 찬란한 고대불교에 비해 근대로 내려올수록 뛰어난 학승들의 수가 줄어들고 불교의 사회적 참여도가 낮아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현대’ 특히 일제시대는 친일문제 등 불교계의 지지 혹은 지원을 받기 어려운 문제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 근현대사 연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의 문제
문화재청은 1월 29일 경기도 양주시 사적 제128호 ‘회암사지’에 있는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부도’ 와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의 명칭을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과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 앞 쌍사자석등’으로 변경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안치자와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었던 회암사지 부도의 주인이 최근 무학대사임이 입증돼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편에 의하면 1397년 태조(이성계)는 경기도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무학대사의 부도를 회암사 북쪽에 만들게 하였고, 『태종실록』에서는 1405년 무학대사가 금강산 금장암에서 입적하자 태종은 무학대사의 영골(靈骨)을 회암사에 준비되어 있는 부도에 안치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보물 제3
대만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구려사신’의 조우관. ‘새 깃을 꽂은 관’ 즉 조우관은 수렵시대 북방 유라시아 기마민족들이 머리에 쓰던 유물로, 고고인류학 분야에서 한국인들의 원류를 추적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돼왔다. 특히 대만고궁박물원에 소장된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에는 ‘조우관을 쓴 고구려사신’이 발견돼, 동이족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한국인들은 새 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상징이자 원류를 의미하는 장식으로 받아들여 왔다. 최근 새 깃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 계통과는 다른 형태의 새 날개 관이 사산조 페르시아를 거쳐 한국으로까지 유입됐다는 학설이 제기돼 주목되고 있다. 사산조 페르시아 바흐람 2세의 조익관. 경주대
최근 신라시대 경주지역 화장묘의 변화형태를 추적한 논문이 발표돼, 초기 화장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경주대 석병철 씨는 1월 27일 서강대에서 열린 신라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경주지역 신라 화장묘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석 씨는 경주지역에 발견된 7∼9세기의 화장묘를 3단계로 분류했다. 1단계는 화장묘의 도입기인 7세기초에서 8세기초로, 땅을 파고 그대로 뼈단지를 묻는 형태와 땅을 판 데에다 돌로 방을 만든 다음 뼈단지를 묻는 형태 두가지가 나타난다. 이때 사용된 뼈단지는 토기였다. 2단계인 8세기초에서 8세기말까지는 다양한 형태의 화장묘가 나타난다. 이때부터 뼈단지를 보호하는 돌로 만든 함이 등장한다. 또 뼈단지 전용 용기로 사방으로 네군데 연결고리를 부착하는 연
한국불교학회는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구례 화엄사에서 ‘한국의 문화, 불교에 녹다’를 주제로 제5차 겨울 워크숍을 개최한다. 10일 오후 2시부터 열리는 워크숍에서 유마리, 이미향, 박재금, 진우기, 유근자 등 불교문화 전문가들이 음악·예술·문학 등을 소재로 강연을 한다. 11일 오전에는 화엄사와 천은사, 연곡사를 순례하는 프로그램이 개최된다. 동참비는 1인당 3만원이며 가족과 친지 동반이 가능하다.02) 2260-3140 탁효정 기자
연세대 신규탁 교수는 2월 15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연세대 외솔관 602호 신규탁 교수 연구실에서 벽암록 공개강좌를 개최한다. 011-9496-2906
‘우리 스님’ 이 말은 ‘우리절 주지’나 ‘○○사 원주’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개념의 출가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 스님이라는 말에는 내가 믿고 따르는 바로 내 스승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하지만 절이 기업화되고, 관광지화되면서 신도와 스님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추세다. 우리 스님이 아니라 ○○사 주지가 출가자를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간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출가자의 카리스마’를 분석한 논문이 발표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조기룡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사진〉은 『한국선학』 제15집에 「출가자의 카리스마 형성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카리스마라는 단어는 본래 초기 기독교에서 사용된 용어로 ‘은혜’ 혹은 ‘무상의 선물’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한국불교학회는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구례 화엄사에서 ‘한국의 문화, 불교에 녹다’를 주제로 제5차 겨울 워크샵을 개최한다. 10일 오후 2시부터 열리는 워크샵에서 유마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한국 불화의 독자성’을 발표한다. 이미향 류고쿠대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 ‘불교와 음악-사원에서 만나의 법의 소리 상징’을 발표하며, 박재금 수원대 교수가 ‘고려 후기의 게을 통해 본 선과 일상생활’을, 진우기 신구전문대 강사가 ‘불교와 영화-길 위의 인생’을, 유근자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불교와 조각-간다라 불전도와 불교도상’을 주제로 각각 발표를 한다. 다음날인 11일 오전에는 화엄사와 천은사, 연곡사를 순례하는 프로그램이 개최된다. 동참비는 1인당 3만원이며 가족과 친지 동반이 가능하다.
“호림박물관 소장 초조대장경도 50권본”화엄학자들 “불교 서지학사 다시 써야” 호림박물관 소장 초조대장경 화엄경이 50권본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초의 한문 번역 화엄경은 원래 50권본이었으나, 이후에 같은 내용의 화엄경이 60권본 화엄으로 정착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승재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최근 발간한『50권본 화엄경 연구』에서 “처음 중국에서 화엄경이 번역될 당시에는 50권본으로 편집되었으며, 당대 이전까지 50권본이 가장 일반적인 판본이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화엄전공자들 사이에서 최초의 한역 화엄경은 60권본이었고, 50권본은 60권본의 이본(異本)이라고 알려져 왔다. 특히 두 화엄경의 내용상 차이가 크게 없기 때문에 5
조선전기 숭유억불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시행되던 승려억제 정책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승려들이 더 이상 국가의 역을 피하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이 남한산성이나 궁궐 보수사업 등 주요 군역에 동원되면서 조선 정부는 승려들을 적극 활용해 국역체계의 공백을 채우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이 과정에서 사찰은 부역뿐만 아니라 조세 부과대상이 되어 지방특산품이나 관청의 종이 및 물품을 대는 재정원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조세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오히려 이를 피해 도망가는 승려들이 늘어나 사찰이 텅텅 빌 지경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같은 경제적 탄압에 맞서 불교계가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 바로 ‘사찰계’였다. 조선후기에는 지역을 막론하고 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