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질량단위인 ㎏의 기준이 바뀐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중의 저울 속 ㎏을 절대적 수치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대중들의 삶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 대한 기준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상수로 바뀌는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의 기준은 130년 전 프랑스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였다. 지구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금속막대를 국제미터원기를 삼고, 1㎥에 해당하는 물의 질량을 토대로 제작된 금속원기둥을 국제킬로그램원기로 삼았다. 그리고 백금과 이리
11월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법보신문 창간 30주년 기념대법회에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날 법회에는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해 원로 스님, 교구본사 주지 스님, 중앙종회 의원 스님, 승재가 지도자들, 법보신문과 직간접의 인연을 맺고 있는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늦게나마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합니다. 전국 곳곳에서 법보신문을 애독해 주시고 주변에 권선해 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법보신문이 30년 동안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정론직필의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사랑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한다. 중생이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여겨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동체대비이다. 남과 부대끼며 매일을 살아가는 범인들에게는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틈틈이 동체대비를 느끼며 살아간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한한 사랑이 그것이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 자체는 부처님의 자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11월15일 대입수능시험이 끝났다. 자식들의 합격을 바라며 100일
김정숙 여사가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 주 아요디아에서 열린 허왕후 기념공원 착공식에 참석한 것을 놓고 뒷말이 나오고 있다. 허왕후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으로 ‘삼국유사’에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기록돼 있다.일부 학자들은 허왕후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일 뿐이고, 백번 양보해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유타가 기념공원이 들어서는 인도 아요디아라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중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정치권에서는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천명 이후 조급증에 빠진 정부가 신화를 역사로 둔갑시키고 있
11월1일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에 따라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징역형을 선고하고 감옥에 가뒀던 아픈 역사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 38명을 체포한 이래 지금까지 2만여 명이 군 입대 대신 감옥에 갇혔다.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는 오랜 세월 국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상한 종교의 잘못된 신앙심에서 비롯된 일탈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1년 평화운동을 하던 오태양이라는 불자가 불
의욕이 넘치면 신중함을 잃게 되고, 신중함을 잃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문 대통령과 교황의 만남이 그렇다. 문 대통령이 교황을 만나 평양 방문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이끌어 낸 것은 반가운 일이다. 교황의 평양 방문이 성사된다면 한반도의 문제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교황이 북한을 방문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남북관계의 열쇠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미국이 쥐고 있다. 그래서 교황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여론 환기라는 상징적 의미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문제는 문 대통령과 교황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품었던 마음을 일관되게 유지하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초심(初心)이라고 말한다. 처음 뜻을 품었다고 해서 초심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시류에 물들지 않은 곧은 마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일본의 유명한 선승 스즈키 순류는 “선심초심(禪心初心)”이라고 가르쳤다. 수행자로서 첫발을 디뎠을 때 가졌던 싱그럽고 투명한 마음, 그 자체가 바로 선의 마음이라는 것이다.초심을 잃어버린 뒤의 결과는 혹독하다. 비리로 파국을 맞은 공직자나 정치인, 최근 재판거래로 국민의
김정은 위원장이 가톨릭 교황을 초청했다. 교황청은 “초청장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교황의 북한방문은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10월13일부터 유럽을 방문하는 문 대통령은 유럽 방문길에 교황을 직접만나 김 위원장이 밝힌 교황초정 의사를 전달할 계획이다.두 번에 걸친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한반도는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었다. 이러한 때에 교황이 북한을 방문한다면 화해분위기는 더욱 고조될 것이고, 북한 또한 개방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그러나 교황의 북한 방문이 성
독일 나치시절 선전장관을 지낸 괴벨스(1897~194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대중선동에 뛰어난 인물로, 독일 국민들을 선동해 유태인 학살의 광기에 휩쓸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두 번째는 의심하게 되고, 계속 말하면 믿게 된다.” “99%의 거짓에 1%의 진실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그가 남긴 말이다.괴벨스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거짓선동의 망령은 지금도 세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괴벨스의 선동과 비슷한 현상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남북정상이 평양서 만났다. 두 정상은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와 전쟁 없는 한반도를 약속했다. 사실상의 불가침조약으로 평화의 문을 활짝 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문 대통령은 숙소인 평양 백화원 앞 정원에 나무를 심었다. 남한에서 들고 간 모감주나무였다. 나무 말은 ‘번영’으로 남북의 화해와 통일, 번영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모감주나무는 염주나무라고도 부른다. 문 대통령이 모감주나무를 북으로 가져간 것은 염주를 헤아리는 마음으로 남북의 화해와 상생의 시대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모감주나무는 불자들에게
나치의 살육을 ‘홀로코스트’라 부른다. 1980년대 한국에도 홀로코스트가 있었다. 부산 형제복지원이다. 1987년 원생 1명이 구타로 사망하자, 35명이 집단으로 탈출했다. 형제복지원의 엽기적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1975년 정부는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섰다. 부랑인 수용시설에는 보조금을 지급했다. 형제복지원은 보조금을 더 받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들였다. 수용자들에게는 상한 밥을 먹이고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을 시켰다. 구타와 감금, 살인과 성폭행은 예사로 벌어졌다. 강제노역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12년간 513명
이판사판(理判事判)은 가슴 아픈 불교역사가 담겨있다. 보통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쓰는 용어인데, 조선시대 불교가 그랬다. 유교의 나라 조선은 불교를 철저히 파괴했다. 도성을 비롯해 번화가에 즐비했던 사찰은 부서지고 스님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척박한 땅을 일궈 절을 짓고 불조의 혜명을 이었다.함께 출가했지만 어떤 스님은 이판으로 교학과 수행에 전념했고 사판들은 농사짓고 탁발하며 어려운 절 살림을 꾸려갔다. 이판과 사판, 어느 한쪽이 없어지면 불교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스님이 된다는 것은 천민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
종교(宗敎)를 풀이하면 ‘으뜸 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전쟁과 살인, 일탈들을 보면 의미가 무색해진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한 축이 바로 종교 간 갈등이다.우리는 다종교 사회이지만 종교 간 분쟁이 심각하지는 않다. 물론 평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광신도들이 법당과 불상을 훼손하는 일탈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심각한 사태로 번지지 않은 것은 불교의 포용성에 더해 종교지도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최근 신학대학에서 파면됐다가 재판에서 이긴 손원영
삼계화택은 ‘법화경’에 나오는 말이다. 중생들이 사는 세계가 불에 타고 있는 집과 같다는 뜻이다.총무원장 설정 스님의 은처자 의혹으로 시작된 혼란은 총무원장 사퇴로 끝났다. 그러나 은처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만 설정 스님의 사퇴가 “종단이 더 이상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결단의 결과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설정 스님 사퇴로 모든 것이 일단락된 것은 아니다. 설정 스님 퇴진을 극렬하게 요구했던 사람들이 퇴진이 임박하자 오히려 퇴진을 만류하거나 총무원 부실장 자리를 요구하는 등 온갖 추태가 부렸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은 시간과 공간을 보는 불교적 관점이다. 시작도 끝도 없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주는 불생불멸이다. 무시무종의 가르침에 따르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순환하는 윤회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그러나 요즘 무시무종의 가르침보다 종말(終末)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자꾸 떠오른다. 올해 폭염은 최악이었다. 35℃이상일 때 내리는 폭염경보가 서울에서만 31일이라는 최장기록을 세웠다. 40℃에 육박하거나 넘어선 곳도 있었다. 폭염은 우리만의 고통은 아니었다. 세계가 폭염에 시달렸다. 찜통지구, 불타
한국은 유독 세습에서 자유롭지 않다. 재벌 중심의 기업문화에서 부를 세습하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 상속절차를 거치지만 법의 맹점을 교묘하게 파고든 세습의 과정은 세계적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세습의 대열에 개신교가 가세했다. 담임 목사직을 아들에게 승계해 논란이 됐던 명성교회에 대해 해당교단 재판국이 세습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1000억원 규모의 명성교회 운영권이 아들에게 세습됐다. 북한의 독재세습을 맹렬한 비난 하면서도 목사직 세습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이율배반적 행위가 씁쓸하다.이율배반적인 종교라면 가톨릭을 빼놓을 수
어린이집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경기도 동두천시의 어린이집에서 4살 아기가 통학버스에 갇혀 숨졌다. 운전기사와 인솔교사가 있었지만 버스에 남겨진 어린이를 확인하지 않고 내렸고, 아이는 한여름 열기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버스에 내리지 못한 아이가 있는지 한번만 확인했더라면 아이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화곡동 어린이집에서는 보육교사가 11개월 된 아이를 재운다며 이불을 덮은 뒤 올라타 질식사했다. 아이를 재운다며 이불을 덮은 뒤 올라탄 행위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그렇다면 분노가 보육교사를 향해야 할까? 어린이집에서의 사고는 어제
급진적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워마드(WOMAD)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여성시위현장에서 남성혐오 발언들이 이어지더니 안중근, 김구, 윤봉길 같은 남성 독립투사들까지 테러범으로 폄훼하면서 극단적 남성혐오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는 빵(성체)에 욕설을 쓰고 불에 태운 모습을 커뮤니티에 올리면서 가톨릭 주교회의가 신성모독이라며 반발하는 등 사회적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여성차별과 불평등을 개선하겠다는 뜻에 반대할 명분은 없어 보인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가했던 나쁜 행동들을 똑같이 함으
전쟁을 피해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사람들이 난민신청을 하면서, 난민수용문제가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방향이 이상하다. 인도주의에 입각한 이성적 접근보다는 난민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적대감이 팽배하고 있다. 난민반대 청와대 청원이 최대 기록인 60만 명을 넘어서더니, 수용반대집회도 열리고 있다.우리나라는 난민에 대한 포용성이 떨어지지만 난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예멘난민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들이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SNS에서는 무슬림 테러, 무슬림난민 범죄, 여성 차별적 문화 등이 오르내리고 있다.
군대생활을 악몽으로 기억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군대생활은 수행의 단절을 넘어 생명과도 같은 계율의 파괴로 이어지기 쉽다. 강제적 육식과 음주, 그리고 불살생계에 반하는 전쟁훈련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일어섰다는 한국불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계율을 이유로 병역에 이의를 제기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병역거부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 병역을 거부하면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는데 ‘여호아증인’이 대부분이다. 매년 5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교도소로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