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단기출가 계기로 수행 보왕삼매론은 내 참선지침서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고 세인들은 알고 있다. 나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판단된다. 물질문명의 이기에 얽매어 진정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파악하기 어려워 때로는 고민하는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참으로 한심할 때가 종종 있었다. 때로는 뜻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절에 가서 나름대로 소원을 빌기도 한 적이 한 두 번이었겠는가. 그러나 근기가 깊지 못한 나로서는 매사에 용두사미 격으로 처음에는 큰 뜻을 품고 생활을 한다고 하나 안이함에 빠져들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잘 모셔야겠다는 초발심은 오래가지 못하고
평생 “수행정진”당부 금오(金烏) 스님은 이른바 한국불교의 덕숭선맥(德崇禪脈) 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큰 봉우리였고 오늘의 한국불교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월자문중’(月字門中)을 이룬 큰 스님이었다. 금오 스님은 1896년 전남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이유로 형으로부터 매를 맞고 분한 마음에 “그까짓 글공부만 해서 무엇을 하느냐” 생각하고 그 길로 가출, 16세의 나이로 무작정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하연선원에서 도암(道庵) 스님께 나아가 삭발, 득도하였다. 그 후 금오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 영축산 통도사, 천성산 미타암, 예산 보덕사의 보월선사 문하에서 수행정진 끝에 문득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3천리 방방곡곡을 정처 없이 떠돌
염불로 하루 시작…108배로 마무리 수행 후 고객 부처님처럼 모시게 돼 독서모임을 통해 읽게 된 청화 스님의 『행복한 공부』는 염불수행과 평생의 스승을 만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그 책을 처음 접하고는 한 달 동안 너무 기뻐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았고, 마치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된 듯 환희용약하면서 큰스님의 은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화큰스님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는 갖지 못하고 열반하신 후 다비식에 참가한 것이 큰 스님과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었다. 절 수행을 하면서 처음 화계사에서는 관음정근을 했으나, 길상사에서는 절수행하며 아미타염불을 하는데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길을 가면서, 지하철 내에서 또는 바쁜 가운데도 일을 하는 중간 중간 자
래리는 유태인 출신으로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였지만 이제는 가장 유능한 위빠사나 지도자다. 래리 로젠버그(Larry Gosenberg 1932 ~ )는 하버드 대학 근처의 캠브릿지 위빠사나 수행센터(the Cambridge Insight Meditation Center, CIMC)의 설립자이자 지도법사이자 배리(Barre)에 있는 통찰수행회(IMS)의 지도법사이기도 하다. 래리는 러시아계 유태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4대째 랍비이었지만, 종교를 믿는 자는 바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던 막스주의를 배운 사람이었다. 래리는 브룩클린 대학(Brooklyn College)을 졸업했으며,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선망의 직업인 하버드 의대 정신과에 취직하였다. 하지만
84년 구도회 활동하며 불교와 인연 매월 2~3번씩 삼천배…불서모임도 내가 불교와 만나게 된 것은 20여년 전 어느 가톨릭 신부님 덕분이었다. 그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나는 친구 소개로 대구의 선목신학대학(대구가톨릭대학의 전신) 교수로 계시던 그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갔다가 불교의 참선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님께서 오경웅 박사의 『선학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소개해주셨다. 나는 그 책과 만나면서 오히려 가톨릭보다 불교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선사들의 무위진인, 대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젊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아가 황무지를 백합이 꽃피는 동산과 같이 본다는 선사들의 삶은 더없이 존경과 경외의 마음을 자아내게 했다. 그 후 대구구도회에 나가면서 내 삶의 물줄기는 불교의 심
불교정화운동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구산 스님의 혈서. 구산 스님은 언제나 얼굴 가득히 스님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스님은 ‘미소불’(微笑佛)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얼굴 가득히 번지는 잔잔한 미소 속에서도 선기(禪機)만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거침없이 번뜩였다. 한 때 불교계의 한 기자가, 오끼나와까지 가서 태평양 전쟁 전몰자 위령제를 지내고 막 돌아온 구산 스님을 만나 인터뷰를 한 일이 있었다. “금여시(今如是) 고여시(古如是)야” 이 때 기자가 구산 스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다. “스님, 위령제를 지내고 오셨는데, ‘영’이란 정말 있는 걸까요? 만일 영이 있다면, 위령제를 지내주신 스님께 뭐라고 하던가요?” 이에 구산 스님은 거침없이 곧바로
금강경 공부하며 사경에 관심 사경은 법신불 조성하는 불사 금강경을 공부하며 나는 사경에 큰 관심을 가졌다. 금강경에 ‘서사수지독송위인해설(書寫受持讀誦爲人解說)’하라는 대목처럼 경전의 말씀을 서사함으로써 깊이 이해해 받아 지니며, 늘 독송하는데 힘쓰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할 때 부처님의 말씀이 향내가 몸에 배이듯 훈습이 되어 조금씩 부처님을 이뤄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나는 먼저 부처님의 말씀에 정성껏 귀 기울이려 애썼다. 즉 경전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가장 빠르고 수승한 길임을 자각하고 경전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경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경 역시 쉽지 않았다.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져도 오자가
샤론 살스버그는 자애수행을 30여년 동안 서양에 전파하며 정진하고 있다. 미국에서 조셉 골드스틴의 보조선생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기 시작한 샤론은 당시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인도에서 처음 위빠사나 수행을 접한 지 5년이 되던 해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다루는데 있어 더 능숙할 수 있다. 수행을 하면서 느꼈던 육체의 통증과 심리적인 불안감이 극복되기 시작하면서 샤론은 이해력이 깊어졌고, 수행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비평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왔다. 자신에게 더 부드러워졌으며, 좀 더 편하게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 판디타 만나 마음챙겨 샤론은 디파 마의 말처럼 1974년 가을, 콜로라고 볼더시에 있는 나로파 대학(Naropa
명리학 공부하다 불교와 인연 식당서 경전액자 본 후 사경 내가 사경을 하기까지는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25년 전 나의 인생에 커다란 시련이 다가왔다. 군대제대 후 나는 결혼을 했고 작은 사업도 시작했다. 그런데 경험 부족으로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업 실패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어머니였다. 이유인 즉 어머니께서는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 사업이 실패했다고 믿었고, 거기에 손녀의 탄생은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어머니를 더욱 못마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 분가를 택했다. 일단 있는 돈을 털어 전세방을 구한 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아는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영세사업을 하는 친구를 만나 내 사정 이야기를 하니 자기 사업에 투자하라고 했다. 나는 당장 전세금을
우리는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삼보사찰이라 부른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는 불보사찰,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는 법보사찰, 그리고 열여섯 분의 국사 스님을 배출한 전라남도 승주의 송광사를 승보사찰로 부르고 있다. 바로 이 승보사찰 송광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역사에 큰 스승으로 길이길이 기록될’ 뛰어난 스님들을 여러 배출한 명찰이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송광사하면 떠오르는 큰스님은 단연 효봉과 구산, 그리고 아직 우리 곁에 계신 법정 스님이 바로 송광사와 불일암에서 수행하신 분. 한국의 우바리 존자 구산(九山) 스님은 ‘오늘의 송광사’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한 장본인시며 노랑머리, 파란 눈의 서양인 불자들을 한국 스님으로
사고를 계기로 기복에서 탈피 아내-딸도 매일 절하는 ‘도반’ 갑작스럽게 닥쳐온 시련은 수행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고 이로 인해 나는 처음으로 능엄주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20여 일쯤 지났을 때 돈조 스님은 그런 나에게 “전생에 쌓인 숙업이 현생에 나타나서 제거되는 현상으로 공부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했다. 돈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 때문에 수행을 멈춘 내가 더없이 한심했다. 현생의 즐거움만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닐진대 나는 지금까지 복을 바라며 능엄주를 독송해온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됐다. 집착하면 고통이 따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일은 나로 하여금 부처님 공덕 중 최고의 공덕은 ‘삼매의 공덕’이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했다. 스님의 말씀을 들은 후 나는 곧바로 다시
1960년대 말,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의 버팔로시에 있는 뉴욕 대학에 재학중이던 18세의 한 젊은 여대생은 혼란과 불행과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춘기적인 고민을 넘어 성인이 되어가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그러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 때 명상을 한다면 이러한 혼란과 고통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지 않을까라는 영감이 떠올랐다. 평소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불교를 배우고 수행하기 위해서 인도로 향했다. 그녀의 이름은 샤론 살스버그(Sharon Salzberg, 1953~)였고, 자애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는 미국을 대표하는 수행지도자가 되었다. 인도에서 처음 접한 불교는 달라이 라마께서 계시던 다람살라였다. 그곳에서 티베트 스님들에게 불교를
사법고시 실패 후 절망감에 능엄주 시작 매일 120회 독송…“삶의 든든한 버팀목” 능엄주를 시작한지 8년, 나의 하루는 능엄주로 시작해 능엄주로 마무리된다. 하루 120독을 하기 위해서는 집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능엄주를 외워야 하는데 이제 그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한 번 독송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처음 10분 정도에서 점차 속도가 빨라져 이제는 1~2분이면 가능해졌다. 업장 두터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능엄주는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내게 튼튼한 배요 삶의 길을 일러주는 좌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를 만나는 순간까지도 나는 이렇게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될 줄은 몰랐다. 군대제대 후 나는 곧바로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고 운 좋게 합격해 1년여 근무했었다. 하지만 늘 접하는
예선사들의 차와 선의 깊은 인연에 관한 화두를 명쾌하고 쉽게 풀어낸 혜봉 스님의 『차茶와 선禪 그리고 화두話頭』는 차문화이 변천사를 약술하고 선과 차의 관련성, 차 화두 현황 등에 관해 서술한 책이다. 또 선의 황금시대인 당·송의 5가 7종(五家七宗)에 이르는 선종사(禪宗史) 전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차와 관련된 화두들을 낱낱이 발췌해 문헌별로 자료집을 만들어 그것을 바탕으로 집필한 이 책은 차문화와 선의 진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구성해 청풍납자와 다인은 물론 차와 선에 관심 있는 불자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혜봉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차와 관련된 화두가 ‘끽다거’만이 아님에도 유독 끽다거 화두가 운위되며 본래 의미보다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끽다거’에 대한 일
정형남 지음 / 비전코리아 ‘차’를 소재로 한 역사 구도 소설『천년의 찻씨 한알』은 천년 동안 숨겨진 차의 전통성과 그 안에 녹아있는 정신의 혼과 역사를 이야기하는 구도소설이다. ‘차’를 주제로 한 최초의 소설『천년의 찻씨 한알』은 일반상식을 넘어 우리 선조들의 기품과 품위가 과연 어떠했는가를 단번에 느낄 수 있게 만드는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재미와 즐거움을 더 해 준다. 작가는 천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차’의 역사와 유래를 소설 속 화자인 ‘지장스님’ 을 통해 그 시대적 배경과 당시의 사람들의 애환을 그려간다. 또 ‘차’의 역사와 많은 자료들을 기초로 한 탄탄한 구성은 차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소설 ‘남도’로 제1회 채만식 문학상을
사념처-팔정도-위파사나 입각한 차 명상 강의 지난 2004년 9월에 화순 운주사에서 열린 제 6회 초의차문화연구원 들차회에서 (사)초의차명상원 원장 지장 스님이 차 시연을 하고 있다. 차와 명상을 결합한 차 명상원이 서울 종로에 문을 연다. 일지암 주지 여연 스님이 이사장, 군법사로 10년간 활동해온 지장 스님이 원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초의차명상원이 바로 그 곳이다. 종로 두산위브 2층에 위치, 11월 8일 개원하는 사단법인 초의차명상원은 차 전문인을 키워내기보다는 바쁜 일상에 지쳐 있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차를 통한 명상을 통해 심신의 안락은 물론 작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수행종합공간으로 꾸려진 30여 평 규모의 명상원은 다실과 강의실로 구성돼 있으며,
‘나무아미타불’이 번뇌 없애는 묘약 남편도 교도소서 열심히 염불-사경 친정어머니와 언니 혜명화님의 손에 이끌려서 가게 된 경주 미타사는 고향집처럼 푸근하고 따뜻하며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곳이었다. 언제나 자애로운 모습의 법장 큰스님께서는 출가하신 후 수십 년을 정토수행을 해오셨고, 칠순을 넘긴 연세에도 하루 두 끼 식사와 세 시간만 주무시며 늘 용맹정진 하셨다. 또 주지 백련 스님은 하얀 연꽃처럼 맑은 미소로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법문을 해주었다. 그래서일까. 신도들 수는 많지 않았지만 기복이나 놀러오는 곳이 아닌, 아미타부처님께 믿음으로 의지하고 불교공부를 하기 위한 곳으로 대구, 부산, 전주, 남원, 울산, 김해, 마산, 의정부 등 각처에서 오셨다. 부도가 난 처음 몇 달은 신경성 스트레스로
작년 법보신문(770호, 773호)에 두 차례, 태국의 선지식 아찬 붓다다사 스님(1906~1993)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분은 아찬 붓다다사의 제자이며, 통역/번역자였던 산티카로(Santikaro) 법사이다. 오는 10월 30일 근본불교 수행도량 홍원사의 국제불교학술대회와 집중수행지도차 한국에 오는 인연도 있어서 우리에게는 아찬 붓다다사스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산티카로 법사를 소개한다. 산티카로 법사는 남녀평등, 민주적인 운영, 사회참여적인 불교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1985년 태국서 출가 산티카로 법사의 본명은 로버트 라슨(Robert Larson)이며, 1957년, (남방상좌불교의 불기 2500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1980년 수사학 전공으로 일
남편 부도-가정 풍비박산 나며 발심 자존심-배신감 버리고 ‘나무아미타불’ 누가 장난 같은 세상이라고 했던가. 2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남편은 누구보다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는…. 남편과 나는 중매로 만났다. 당시 나는 교회에 다녔는데 한 집사님이 좋은 사람 있다고 소개해 준 사람이 나중에 알고보니 독실한 불교집안이었던 지금의 남편이었다. 화살보다 빠른 게 세월이라고 했던가. 종교는 뒷전으로 하고 아이들 치다꺼리에, 사업하는 남편 내조하기에 정신없이 바빠하며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어느날 갑자기 남편 사업이 어려워졌고 결국 부도가 나기에 이르렀다. 형사들과 피해자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괴로웠던 남편은 그만 집을 나가 버렸다. 이에
경산 스님은 유점사에서 수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정진했다. 치열했던 불교정화운동을 거쳐 대한불교 조계종이 새롭게 태어난 이후 1963년, 1973년. 그리고 1979년 세 번에 걸쳐 총무원장에 오른 스님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경산스님이었다. 경산 스님은 1917년 6월 21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출생, 1936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홍수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고 1945년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1956년 정화불사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62년에는 ‘재단법인 동국학원’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그 후 세 번에 걸쳐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를 맡아 대한불교조계종단의 기틀을 탄탄히 다져놓고 1979년 12월 25일 서울 돈암동 적조암에서 홀연 열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