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삼양동에 서 있는 원당봉(170m)은 주봉인 원당악과 망오름, 도산오름, 동나부기, 서나부기, 앞오름, 펜안오름 등 7개의 봉우리와 3개의 능선이 이어져 있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제주 명산이다. 이 오름 중턱에 중국 원(元)나라의 당(堂)인 원당(元堂)이 있었다고 하여 원당봉(元堂峯)이라 이름 했다고 한다. 원나라 공출돼 끌려간 여인재색·정치력 발휘해 황후로오빠 국정농단 연루 오점 남겨훼불사태 만연했던 조선중기 불교중흥 횃불 든 허응 보우제주목사 변협에 타살돼 순교저 원당은 이 땅에 원 나라의 힘이 막강하게 미칠 때 들어섰
한라산 불래오름의 존자암에서 남서쪽 70리 남짓의 서귀포 안덕면에 산방산이 있다. 주홍빛 귤 무성히 달린 길가의 귤나무 감상 하다가 엎어놓은 종(鐘) 모양의 우뚝 솟은 산(395m)을 서귀포 어딘가에서 보았다면 산방산과 마주한 것이다. 움푹 파인 한라산 정상을 본 제주도 사람들은 백록담에 저 산방산 얹으면 딱 맞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6개월 곁에 있던 초의‘반야심경’ 사경 권해분노·아만 녹인 추사 명작 ‘세한도’ 남겨옛날 한 사냥꾼이 사슴을 잡으려 한라산 정상에 올라섰는데 그만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엉
제주(濟州)의 옛 이름은 탐라(耽羅)! ‘탐’은 섬(島)이고, ‘라’는 나라(國)이니 탐라는 ‘섬나라’란 뜻이다. 발타리존자 연유한 존자암불래(佛來)오름에 존재해섬나라 최초 불교전래 전설 수직절벽·기암괴석에 새겨삼국시대 당시 북방의 고구려 영향권에서는 벗어나 있던 탐라였지만 중부지역서 활개 쳤던 백제에는 조공을 바쳐야 했을 만큼 국력은 미약했다. 백제와 달리 신라는 섬나라를 나름 경계했다. 신라 주변 9개국의 침입을 막고자 조성한 황룡사 9층 목탑. 그 목탑의 4층은 탐라를 상징한 것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탐라는 통일신라에
인도 남부 끝 22Km 바다 건너 자리한 작은 섬나라.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섬의 생김새가 눈물과 흡사해 누군가 ‘인도의 눈물!’이라 했다. 관광객 상대로 한 전문상점에서 아이 쇼핑을 즐기다 보면 스리랑카 지도 모양 소재의 상품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루비, 사파이어로 만든 목걸이부터 에소나이트, 투루말린, 가넷 등의 준보석들을 섞어 만든 액자까지 다양하다. ‘인도의 눈물’이라 쓰고 ’보석의 눈물‘이라 읽는다. 나라 잃고 피신했던 왕이국권회복 후 보시한 절흑갈색 거대 바위 속엔벽화·탑·불상 환상 조화교단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 교학
‘성스런 치아사리 한 과는 도리천에 모셔지고/ 한 과는 용족(龍族)의 용왕이 모셨으며/ 한 과는 간다라에 모셔지고/ 한 과는 시할레(Seehale. 싱할라의 옛 이름)에 모셔졌네./ 네 과의 부처님 성치는/ 최고의 열반의 축복을 주시니/ 천신과 인간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신/ 성치에 제가 경배하나이다!’ (정기선 선생 역)포르투갈, 스리랑카 침입 후가톨릭 전파 위해 불교탄압법회집전 스님 사형에 처하고개종불복 재가자 강물에 던져치아사리 파괴 예견한 승단델가무 사원에 숨겨 위기 모면온 국민 페라해라 축제 때 불치와 하나 돼 평화 기원불치는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중에 수평선이 보이는 ‘호수’를 만났다면 플론나루와 땅에 서 있는 것이다. 실은 호수가 아닌 대형 저수지 ‘파라크라마 사무드라’다. 파라크라마(Parakrama)는 이 도시에 아름다운 사원과 거대한 저수지를 조성한 파라크라마 바후1세(1153~1186)의 이름을 딴 것이고, 사무드라(Samudra)는 싱할라어로 바다를 뜻한다. 바다를 품은 저수지다.탄핵·쿠테타 직면한 마하세나칼링가국에 불치이운 ‘급전’전쟁 속 사리 침탈·훼손 우려구하쎄바, 딸에게 이운 언명위자야바후, 촐라 족 격퇴 후수도 이전하며 사리이운 단행‘
머리에서 가장 먼 신체 부위를 감싸고 있던 신발을 벗고 캘러니야(Kelaniya) 사원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순간, 살갗에 닿은 모래 한 알, 흙 한 줌이 성스럽게 느껴진다. 부처님 스리랑카 세번째 방문캘러니야 도량엔 2500년 숨결맨발로 사원 들어선 순간성지가 품은 성스러움 느껴져그늘진 공간에 자리한 사람들세계 최초 경전 조성 나라답게독경 삼매에 들며 불심 다져 한국 산사를 순례하다 보면 일주문에서 ‘입차문래 막존지혜(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문구가 새겨진 주련을 볼 때가 있다. ‘이 문에 들어서는 사람은 알음알이를 내려 놓아라
2017년 2월20일 오후 3시. 스리랑카 엘비티야 아무고다 지역 산간에 자리한 자야수마나라마야 사원에는 한국 여래종과 스리랑카 아마라푸라종 사부대중을 비롯해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대통령 및 인근주민 등 1000여명이 운집했다.인왕·담마누까 두 스님 인연한·스 양국 불교교류로 확대쇠잔해진 고찰 중창불사 지원인재양성·포교확대 저변 다져‘보시’ 근간한 동체대비 정신스리랑카 불교중흥 토대 평가 “한국 인왕 스님의 자비심이 실론 땅에 닿으며 스리랑카 불자들의 마음은 더욱 더 청정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청정심을 간직할 수 있었기에 수많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 진신사리(眞身舍利)! 발징의 ‘만일염불’ 결성 후조선의 ‘아미타불’ 정진 주도임란 왜구 약탈 불치사리사명대사가 찾아 와 봉안금강저·십바라밀 석주절터와 어루러져 ‘오묘’열반과 해탈을 상징하기에 사리 자체가 부처님이고 법이다. 초기불교 당시에는 부처님 유시에 따라 불상을 조성하지 않았기에 부처님 체취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던 대상은 오로지 탑. 하여, 탑 속에 안치된 사리는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했다. 사리 자체가 부처님이라 보면 쇄신((碎身)사리를 구분 하는 게 큰 의미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처음 일파만파로 퍼져 전국을 강타할 때, 그 강도만큼 국민들은 상실감에 젖어 넋을 놓았다. 자신이 선택한 대통령이 각종 비리 의혹에 휩싸여 있다는 실망감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유수의 대기업의 등을 쳐 사리사욕을 채우려 한 최순실 때문만도 또한 아니었다. 상식이 통하는 다수보다 권력과 재력을 가진 소수를 위하고, 만인의 평등보다 불평등의 프리즘으로 차이가 아닌 차별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그래서 정의와 인권, 복지, 나아가 서민들의 삶마저도 몇몇 위정자들의 간교함에 언제든 차디찬 바다 아래로 수장되는
굴속에 자리를 편 의상 스님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채 앉았다. 들려오는 건 바위덩어리를 때리는 바닷물 소리뿐이었다. 한 터럭의 번뇌조차도 허용치 않는 용심과 청심으로 7일을 보낸 후 새벽 바다 위에 앉았던 자리를 띄웠다.원효암서 1패 당한 의상 스님 의상대선 한 수 위 법력 보여의상 스님 ‘자리’ 띄운 그 파도붉은연꽃암자 아래서 ‘처얼썩’의상 스님이 해안절벽의 굴속에 좌복을 깔고 가부좌를 튼 연유가 있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어느 굴 안에 상주한다는 전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서역(西域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15살에 ‘천수경’ 완벽 암기절 못가면 어쩌나 결혼단념산을 갈아 밭 일구는 중에도땅에 그린 ‘원’보며 윤회공부'삼서근' 들며 60여년 정진일로백장·성철·인홍 스님 뜻 받들어선원 3개 운영·재가자 용맹정진비구니 고품격 도량으로 ‘우뚝’태백산 각화사 암자서 춘양으로 20리 길을 걸어 탁발 나오는 보살이 있었다. 그 보살 문 앞에 서 있으면 냉큼 마루에 앉혀드리고 시원한 냉수 한 그릇부터 건넸다. 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