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 채운산(彩雲山) 자락의 가산사(佳山寺) 새벽 예불에 들어서면 주지 지원 스님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려 온다.“청주성, 금산성 전투 전사 호국승병 일체 열명영가…아미타불 사십팔대원 왕생극락 상품상생 하옵소서!”임진왜란(1592∼1598) 초기 육지전의 첫 승으로 기록된 ‘청주성 탈환(1592. 음력 8.1)’을 이끌었던 승장(僧將)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1592) 대사와 함께한 승군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기도다.임란 전부터 조선의 기운은 쇠락해 가고 있었다.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 훈구
‘동양의 나폴리’ 통영은 백석(白石‧1912 ~1996)의 시(‘통영 2’)처럼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통영이 품은 150여 개의 섬 중 보물섬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미륵도(彌勒島)다. 이 섬의 미륵산(彌勒山‧458.4m)에서 감상하는 한려해상 풍경은 일품이다. 에메랄드빛 바다에 떠 있는 한산도와 거제도, 소매물도, 그리고 통영항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맑은 날이면 세존도, 연화도, 보리도 등의 불심 깃든 섬들도 안을 수 있다. 시인 정지용(鄭芝溶‧1902~1950)이 산문 ‘통영 5’에서 “통영과 한산
“여러분! 제가 스스로 일어나고 걸을 수 있는 한 변함없이 방문하여 여기에 서겠습니다.”청산 법명(靑山 法明) 스님이 처음 방문한 대전교도소 재소자들에게 한 약속이다.(1981) 그에 대한 보답도 정중히 청했다.“감옥에서도 바른 마음을 품고, 출소 후엔 늘 성찰하며 후회 없는 멋진 삶을 살아가 주세요!”그 언약, 그 맹세 올곧이 지켜왔다. 대전교도소교정협의회 불교분과위원(1994)을 맡으면서 자살 등의 고충 상담, 수형자 취업 알선, 수용자 복지와 건강증진은 물론 불우수용자 가족까지 돌본 법명 스님이다. 종교를 초월한 재소자 봉사단
‘그림은 침묵의 시이며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는 시모니데스(Simonides)의 말에 천착하면 태관 스님의 시집 ‘흰 눈 속의 붉은 동백(서정시학‧2020)’은 갈라진 죽필(竹筆)로 마지막 남은 먹물을 찍어 뼈대만을 그려낸 ‘갈필 화첩’이다. 수일, 수개월, 수년을 걸려 빚어낸 시어라도 마지막 탈고에서 과감히 털어냈다.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가능한 시작(詩作)이다. 그렇게 압축되고 농축된 시는 모두 한 줄, 한 문장으로 끝난다. 하여, 시제(*)와 시(**)는 서로 선문답하듯 간결하다. 일반 시집에서는 잘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법정 스님 역 ‘숫타니파타’ 중)부처님께서 걸으셨던 전법의 길을 2022년 2월 상월결사가 걷는다. 하루 25km씩 43일간 총1167km를 걸어야 하는 험난한 대장정이다. 현재까지 참여 의사를 밝혀 온 순례자 중 세납이 가장 낮은 비구는 인도 ‘붓다의 사원(Vijayindra Aranya Vihar)’ 주지 아브하야 푸트라(Abhaya Putra: 무외인‧無畏人) 스님이다. ‘붓다의 사원’은 아잔타
“많은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 법을 전하라!” 부처님의 전도선언이 유독 닿지 않은 곳이 있다. 정부 주도로 조성된 신도시다. 대규모 도시 개발이 진행되던 1995년과 2005년의 ‘인구 센서스’, ‘통계청’ 자료들은 한결같이 ‘불교 약세‧개신교 강세‧가톨릭 약진’을 보여준다. 신도시의 종교용지를 확보하지 못한 불교계는 지금까지도 전법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경제‧사회·문화 수준이 급속히 높아가는 수도권 중심의 도심에 대한 포교 인식이 부족한 것에 따른 결과다. 경기도의 양촌읍과 장기동, 마산동, 운양동, 구래동에
속리산(俗離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상고암(上庫庵‧930m)에 30대 초반의 행자가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주석하고 있던 성중 스님과 은사 인연을 맺은 후 굴 법당에 들어가서는 매일매일 지장기도를 올렸다. “내 시봉 그만해도 좋으니 큰 절로 내려가라”는 은사 스님의 당부에도 암자를 떠나지 않다가 3년여의 정진 끝에서야 법주사로 가 행자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보림(寶林) 스님이다.고향은 남해 용문사에서 가까운 남면 죽전(竹田)이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던 할아버지는 집안일 돕던 사람이 결혼하면 작은 땅이라도 떼어 주었을 정도
‘누구나 가슴 속에/ 별 하나 만듭니다// 장미꽃 심어 놓고/ 나팔꽃 트럼펫이// 화단에/ 목화씨 몇 알/ 정성들여 심어봅니다//… 물레를/ 잣던 둘레길/ 무명옷이 그리워// 실 뽑아 한 올 한 올/ 마음을 열어가며// 사랑의 방방곡곡/ 원앙침 수놓으면// 찬란히/ 목화별 뜨는/ 밟아가는 산책 길’(홍정희 시 ‘목화별 산책’)대개의 사람이 화려한 장미꽃이나 개성 강한 나팔꽃을 좋아하지만, 시인은 어머니 품처럼 따듯한 온기를 전하는 목화를 선호한다. 사랑하는 꽃을 별로 승화시킨 시인은 오늘도 내일도 ‘찬란히 목화별 뜨는 산책길’을 밟
‘지장보살 대성인의 성스러운 위신력은/ 영원토록 설하여도 다 말할 수 없는지라/ 보고 듣고 우러러서 한 생각만 예배해도/ 인천 세계 이익됨은 그지없이 많으시네.’남해 용문사(龍門寺) 명부전에서 올린 ‘지장예문(地藏禮文)’ 독경 소리가 새벽녘의 호구산(虎丘山‧560m) 자락에 스며든다. 용문사 주지 승원(承遠) 스님의 청량한 독경 소리 고결하게 들려오는데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원을 오롯이 전하려는 마음이 빚은 소리일 것이다. 독자(獨子)였다. “절에 가면 오래 산다”는 말에 할머니는 고성에서 자란 일
‘새벽 종소리에, 잠이 깼다./ 어둠의 귀가 열려 그 소릴 깊게 빨아들인다. 문득,/ 별빛을 덮고 잠들었던 내 안의 애욕과 권태,/ 온갖 허망과 환상들이/ 쇠와 나무가 마주쳐 내는 소리에 깜짝깜짝 살아나다/ 산산이 부서진다.’(고진하 시 ‘새벽, 범종소리’ 중에서)부산 광명사 주지 춘광(春光) 스님도 ‘쇠와 나무가 마주쳐 내는 소리’에 깨어나곤 한다. 허나 그것은 전법을 향한 간절함이 빚은 ‘상상의 소리’이다. 지난 6월 ‘미륵대범종’ 기공식을 봉행했으니 3300관(1만2375Kg)에서 울려 나올 웅혼한 소리는 일러도 내년에나 들을
‘저물녘 눈을 뜨는 열나흘 달빛처럼/ 어둠을 밀어내는/ 청청한 저 눈, 눈빛,/ 주장자 비껴들고서 짐짓 딴청이시네 // … // 보리심(菩提心) 한 자락도 부여잡지 못한 아침/ 세상 밖 바람결에 귀를 잃어버렸구나!/ 부릅뜬 눈썹 끝에서/ 쏟아지는/ 바람소리’ (김종호 시 ‘달마도를 걸다’ 중에서)달마도가 기운 넘치는 생동감을 얻으려면 소림사 면벽 9년의 정진력이 농축된 ‘눈’이 살아야 한다. 군산 성흥사 회주 송월법원(松月法圓) 스님의 화폭에서도 그 청정한 눈은 강렬하게 빛난다. 일필휘지로 내려간 가사(법의)의 선(線)도 강한 듯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법정 스님 역 ‘숫타니파타’)밀양 만어산(萬魚山·670m) 7부 능선 자락의 바위굴에 들어앉았다.(1980) 굴 안으로 세차게 들어오는 엄동설한의 찬 바람을 막는 건 소나무 잔가지와 억새를 엮고 그 위에 비닐로 덮은 문뿐이다. 침구는 없다. 입고 있는 누비옷이 이불이고 바닥에 깔아 놓은 억새가 요다. 1000일 관음기도 회향 전까지 산에서 내려가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웠기에 양식은 속가의 형님에게 부
‘…숲은,/ 밤에 찬란히 이는 머리 위 하늘의/ 별들이 내려주는 촉촉한 이슬에/ 지혜가 늘고// 갑자기 때로 불어치는/ 바람과 비바람과 폭풍과 번갯불의 시련에/ 의지가 굳는다// 숲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쓰다듬어 애무하며/ 숲은 늘 위로 들어 소망하고/ 고개 숙여 명상한다. 무릎 꿇어 기도한다// 언제나 먼/ 푸른 바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총총하고 장엄한/ 별이 박힌 하늘에로 푸른 꿈을 꾼다…’(박두진 시, ‘숲’에서)장산(萇山·634m) 7부 능선에 자리한 절이 내어 준 작은 쉼터에 앉아 눈을 감는다. 숲을 채우고도 넘쳐난
의상(義湘) 스님으로부터 본격화된 신라의 화엄학(華嚴學)은 말기에 이르러 남·북악(南·北岳)으로 나뉜다. 화엄사(華嚴寺)를 기반으로 활동한 남악의 대표 학승은 관혜(觀惠)였고, 부석사(浮石寺)를 근간으로 활동한 북악의 대표 학승은 희랑(希朗)이었다.해인사 주지 소임을 보았던 희랑 스님은 ‘화엄경’을 강했는데, 친분 있던 최치원(崔致遠)은 시 ‘희랑화상에게(贈希朗和尙·총 6련)’를 통해 가야산의 ‘화엄 대종장(大宗匠)’을 찬탄했다.‘진실한 말 비밀스러운 가르침 하늘이 주었고(天言秘敎從天授)/ 해인의 참된 깨달음 바다에서 나왔네.(海印
‘하늘의 별들은 왜 항상 외로워야 하는가/ 왜 서로 대화를 트지 않고/ 먼 지상만을 바라다보아야 하는가// 무리를 이루어도 별들은 항상 홀로다/ 늦가을 어스름 저녁답을 보아라/ 난만히 핀 한 떼의 구절초 꽃들은/ 푸른 초원에서만 뜨는 별// 그가 응시하는 것은 왜 항상/ 먼 산맥이어야 하는가’(오세영 시 ‘구절초’ 전문)음력 9월9일에 꺾어야 항염·진통 효과가 좋다는 구절초(九節草). 하얀 꽃잎에 노랑 봉오리의 구절초는 자기보다 키가 큰 나무 아래서는 피지 않는다. 습한 곳도 싫어한다. 볕 잘 드는 산등성이나 들판에 무리 지어 흐드
희양산(曦陽山)은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이다. 당찬 기세에 신령함마저 깃든 영봉이기에 봉황(鳳凰)이라 했다. 산이 품은 30리 물길은 힘차게 몸짓하는 용을 닮았다. 하여 이 산에 든 사람들은 ‘봉황 닮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른다(鳳巖龍谷)’고 했다. ‘하늘이 내린 땅’임을 직감한 지증도헌 국사가 1100년 전 봉암사를 창건(879)하며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열었다. 한국 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봉암사 결사’가 맺어진 곳도 희양산이다.(1947) ‘부처님 법대로 살자’ 했던 수좌들의 정진은 근현대의 수행가풍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하지만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그는 구름에서 나온 달처럼 능히 세상을 비춘다.’(‘법구경’) 묵원(黙圓) 스님은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산과 바다 같아도 참회하면 소멸한다’는 ‘계초심학인문’의 일언을 품고 온 마음을 다해 올려온 기도다. 1980~90년대 태고종 발전의 기틀을 다진 운산 스님은 총무원장 재임 중 비리 의혹을 받아 2009년 8월 끝내 사임했다. 당시 총무·재무 소임을 보았던 묵원 스님에게도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그러나 공사(公私)에 관한 한 늘 분명했던 묵원 스
‘유신헌법·긴급조치’가 관통한 1970년대는 암울한 시대였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가장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하.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마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 속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발은 썩어 버린다. …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술보다 더 지독한 痲藥이 필요하다.’(정현종 시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노트 1975’)
개안수면(開眼睡眠). 봉선사 회주 밀운(密耘) 스님의 주석처에 걸려있는 편액이다. ‘눈을 뜨고 잠에 드노라!’ 조계종 현대사의 격동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4년간 무려 25명의 총무원장이 교체됐다는 사실이다. 의현 원장의 취임(1986) 후 다소 안정세를 보이는 듯했으나 강북 조계사에 이어 강남 봉은사에 또 하나의 총무원 현판이 걸리며 강남·북 양 총무원 시대가 열렸다.(1988) 당시 봉은사 주지는 밀운 스님이었다. 이듬해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봉선사에 방 한 칸 얻어 칩거에 들어갔다.(1
파도는 발아래서 출렁이고 갯바위에 부딪힌 ‘철썩∼’ 소리 청명하게 들려온다. 푸른 바다 위를 걸어 고색창연한 절로 들어서는 것 같다. 바다 위에 처음 절을 세운 스님은 고려의 고승 나옹 혜근(懶翁 慧勤·1320∼1376)이다. 해안가의 비경을 마주한 나옹 선사는 ‘뒤는 산이요 앞은 물이니, 아침에 불공 올리면 저녁에 복 받을 곳(背山臨水 朝誠暮福地)’이라 했다. 길지임을 확신한 나옹 선사는 토굴을 짓고 정진에 들어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화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 통도사 운강 스님이 보문사로 중창한 바 있고, 197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