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6월11일 호치민서 몸을 태워 베트남 평화발원 독재권력 붕괴시키는 계기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말콤브라운이 촬영한 이 사진은 1963년 세계의 보도사진에 선정됐다. 1963년 6월11일, 베트남 호치민시를 가로지르는 대로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틱낫한 스님의 은사이자 베트남 불교계의 선지식으로 추앙받던 틱광둑(Thich Quang Duc 1898~1963) 스님이 소신공양을 단행한 것이다. 이 장면은 다음 날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세계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은 독재정권의 불교탄압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또 베트남을 강탈하려는 미국 등
1962년 5월31일 정부 제정국가가 사찰관리감독권 가져화장실 짓는데도 허가받아야 ▲박정희 군사정부는 통합종단 출범과정에서 비구측이 종단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불재법 제정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1962년 5월31일 박정희 군사정권은 관보를 통해 ‘불교재산관리법(이하 불재법)’을 공포했다. 일제시대 사찰령을 근간으로 해 제정된 이 법은 사찰에 대한 관리감독권을 국가에 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사찰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등록하지 않은 사찰은 불법으로 간주했다. 사실상 불교계의 자율권을 박탈하는 악법임에도 당시 비구 측이 중심이 된 통합종단은 크게 반발하지 않
1895년 4월23일 고종 단행해금 주체 두고 학계서 논란“입성금지 재해석돼야” 주장도 ▲스님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될 당시 남대문 전경. 사진=한국불교100년 1895년 4월23일 조선 고종은 스님들의 도성출입을 윤허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총리대신 김홍집과 내무대신 박영효는 이날 ‘이제부터 승도(僧徒)들이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이전 금령을 해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고, 고종은 이를 허가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불교탄압의 상징으로 대표되던 ‘승려도성출입금지’는 마침내 해제됐다. 스님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는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동안 학계에서는 이보다 누가 도성출입금지 해
1993년 4월1일 전차부대서보급창고 좁다며 법당 폐쇄불자 장병은 다른부대 전출 ▲17사단 훼불사건을 보도한 법보신문 1993년 4월12일자 1면. 1993년 4월1일 불교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17사단 예하 전차대대장인 조모 중령이 부대 내 법당을 철거하고 불상을 무참하게 훼손한 뒤 야산에 버리도록 한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 부대장은 그해 1월 부대창고가 좁다는 이유로 군수과장이었던 선모 대위에게 군법당을 폐쇄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선 대위는 법당에 봉안돼 있던 불상을 쌀 포대에 담아 법당 뒤편 야산에 버렸다. 그런가하면 이 부대장은 부처님오신날 불자사병들이 법당 주변에 연
1918년 3월10일 출판한국불교사 자료 총망라10년간 노력 끝에 결실근대사서 중 최고 역작 ▲상현 이능화 거사 “(한국불교) 12종파의 연혁과 900개 사찰의 유서가 조각조각 난 채 파묻혀 있고, 먼지더미 속에 버려져 있었으므로,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었다. 재주가 없는 내가 이를 염려하여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일을 시작하였다.” 1918년 3월10일. 상현 이능화 거사는 10년간의 각고 끝에 마침내 출간한 ‘조선불교통사’의 서문에서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총 2300여 쪽에 상중하 3권 2책으로 순한문체로 구성된 이 책은 한국불교 1600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근대기 최고의 역작으로
1908년 3월6일 원흥사서초대 종정에 회광 스님각황사 건립·잡지 발간日 조동종과 연합은 한계 ▲원종 초대 종정 회광. 1908년 3월6일 서울 원흥사에 모인 불교계 대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은 한국불교가 지난 500년간 지속된 탄압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모인 52명의 대표들은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고 마침내 원종 설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또 초대 종정에 해인사 강백 이회광 스님을 추대했으며 총무부장을 비롯해 교무, 학무, 서무부장 등에 대한 조직도 구성했다. 원종은 출범과 동시에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불교계가 안고 있던 각종 제약을 극복하고
1981년 2월27일 통도사사미 84·사미니 77명 배출수계 통일·정체성 회복계율경시풍조 회복 과제 ▲제1회 조계종 단일계단 수계 산림에 참가한 스님들이 통도사 금강계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계·정·혜 삼학(三學) 가운데 하나인 계율. 부처님 당시 제정된 계율은 한국불교가 1700여년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올 수 있게 한 근간이 됐다. 특히 “계율을 어기며 100년을 사느니 하루를 살더라도 계율을 지키겠다”는 신라 자장 스님과 같은 서슬 퍼런 지계 정신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 승가 전통의 구심점이 됐다. 그러나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전통이 크게 흔들렸다. 특히 왜색불교의 영향을 받아 출가수행
1884년 2월9일 급사일본서 선진문물 전파근대 개화가들의 스승고종의 특사로도 활동 1884년 2월9일 일본 동경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일찍이 이동인 스님과 함께 일본의 선진문물을 조선에 알리던 전령이자 개화 사상가였던 무불 스님이 일본 섭주 신호(攝州 神戶) 병원에서 원인모를 병으로 급사했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다. 뜻밖의 사건이었다. 특히 스님과 친분을 쌓고 일본의 정세를 들으며 조선의 개혁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김옥균, 박영효 등이 중심이 된 개화당 세력들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순간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조선의 개혁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1884년 12월 개화당이 청의 간섭과 수구세력의 척결을 시도한 갑신정변
▲복천암에 소장된 신미 스님 진영. 1450년 1월26일, 깊은 병세에서 다소 기운을 회복한 세종(1397~1450)은 내관을 시켜 신미 스님을 조용히 궁에 들게 했다. 삶의 마지막 회향을 앞두고 자신을 위해 헌신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신미 스님이 침전에 들자, 세종은 신하로서가 아니라 큰 스승을 대하듯 스님을 극진히 모셨다. 감로수와 같은 스님의 법문을 청해 들은 세종은 스님이 주석하던 속리산 복천암을 중창할 수 있도록 불사(佛事)를 돕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여겼던지 얼마 뒤 세종은 스님에 대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긴 법호를 친히 내렸다. 그러
75년 1월14일 국무회의서교계 30년 숙원 결국 해결용태영 변호사 의지 작용기독교계 여론도 움직여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알린 ‘대한불교’(1975년 1월9일자) 기사. 1975년 1월14일 늦은 밤, 박정희 대통령은 다급하게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긴 논의 끝에 정부는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제정했다. 해방 이후 30년만에 불교계의 숙원이 해결된 셈이다. 불교계가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을 처음 공식 제기한 것은 1963년. 통합종단 조계종이 당시 주무부처인 문교부에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건의문을 내면서부터다.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예수탄신일을 1945년부터 공
1471년 12월5일 성종 결정 세조 때 불경 발간위해 설립 11년간 10여종 불경 한역 국어학·불교사 연구의 토대 ▲간경도감이 설치된 뒤 처음 국역된 ‘능엄경 언해’. 1471년 12월5일 조선 성종(1457~ 1494)은 끝내 간경도감을 폐지했다. 할아버지 세조(1417~1468)가 각별한 관심을 두고 운영해 왔던 사업이었지만 성종은 거듭된 사간원 관리들의 반대 상소에 결국 폐지를 결정했다. 세조가 죽은 지 3년만의 일이다. 간경도감은 1461년 6월 세조가 국가차원에서 불경 간행을 진행하겠다며 왕명으로 설립한 기관이었다. 간경도감의 설치는 당시로선 파격에 가까웠다. 숭유억불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조에서 불교경전을
1954년 12월4일 비구측종헌개정에 강하게 반발“보조 종조 내세우는 건환부역조”…종정직 사퇴 ▲만암 스님 비구·대처승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던 1954년 12월4일. 백양사에 주석하던 조계종 초대종정 만암 스님은 대노했다. 비구측이 승려대회를 열어 종조를 바꾸는 종헌개정을 결의하고, 경무대를 방문해 불교정화를 촉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암 스님은 즉각 “비구 승려대회는 불법”이라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미 강경론을 내세운 비구측의 발길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암 스님은 깊은 탄식을 쏟아냈다. 이미 먹구름이 짙게 깔리고 있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한탄했다. 만암 스님은 정화의 필요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