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물어간 아이였다. 두 살배기 아직 말문도 트이지 않은 아이가 호구에 물렸으니 살아있으리라는 희망은 그저 부여잡고 있는 실오라기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온 산을 뒤졌다. 동네사람들까지 모두 나섰다. 그 소란에 호랑이도 겁을 먹었을까. 산허리 어딘가에서 아이를 찾았다. 사람들은 ‘호랑이가 버리고 간 것이 분명하다’ 했다. 놀란 가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호랑이가 ‘내 밥 도로 가져가겠다’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고 절을 찾아 산신기도를 올렸다. 그곳에 비구니 보성 스님이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출가득도학인들
1958년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수락산 계곡으로 오르는 길은 변변치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한참 걷고, 징검다리를 건너 또 한참 올라야 했다.“도대체 이번엔 어떤 절을 맡으셨다는 건지….”은사 부름을 받고 한달음에 동학사에서 올라온 휴봉보각(休峯寶覺) 스님은 걸음을 재촉했다. 은사 상인 스님은 의정부 석림사에서 상좌를 기다리고 계셨다.석림사는 1671년 서계 박세당의 시주로 석현 화상과 치흠 화상이 창건한 석림암이 그 시초다. 박세당은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였다. 당쟁에 휘말려 풍파를 겪다
기록은 역사의 씨앗이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는 전설이고 설화다. 민담이나 야사가 되어 떠돌다 사라지기도 한다. 중국격언에 ‘총명하다 해도 둔필만 못하다(총명불여둔필. 總名不如鈍筆)’고 하는 이유다. 기억은 기록을 이기지 못하고 기록하지 못하면 기억에도, 역사에도 남을 수 없다. 그렇기에 한편 기록은 두렵고도 조심스럽다. 강의·불교학연구·역경 등다양한 분야 23명 인터뷰스러진 강원 일으켜 세우고견고하던 차별의 벽 넘어스스로 배움의 길 개척한선각자 자취에 묵직한 감동 후학들 계승·발전도 눈부셔2016년 1월 시작한 기획연재 ‘한국의
원허명법(圓虛明法) 스님을 수식하는 단어는 여러 가지다. ‘대표’ 소임을 맡고 있는 은유와마음연구소는 명상과 은유스토리텔링이라는 방법을 통해 심리적 문제에 접근하고 개개인의 자기치유와 성장을 돕는 곳이다. 관련 프로그램 개발과 지도자 양성 등이 병행된다. ‘지도법사’소임을 맡고 있는 ‘무빙템플’은 새로운 형태의 불자 모임이다. 의례나 형식에 치중한 신행활동보다는 경전공부 등 기존과는 다른 법회 모델을 제시하며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불자다운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은유·명상으로 자기치유 시도새로운 법회·신행 모델도 제시문화운동단체 미
꼬박 10년 세월이 걸렸다. 세 번 거듭된 출판사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그럼 한 번 해보죠”라고 선뜻 승낙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05년 ‘대지도론’ 번역을 시작, 10년이 훌쩍 지난 2016년 2월 마침내 ‘대지도론’ 완역본 5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의활동, 논문집필은 물론이고 바깥출입이나 사람들과의 왕래까지도 모두 끊은 채 매달린 10년 세월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맏딸‘불교는 인본주의’라는 말에조계사 찾아 경전공부 시작경전 말씀에 환희심 솟구쳐“이 좋은 법
서울 개봉동 언덕길에서 한참 동안 두리번거렸다. 조계종 교육아사리 담연정운(湛然定芸) 스님의 주석처인 니련선하원은 산중이 아닌 서울시내 주택단지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출가 후 6년간 극심한 고행을 감행한 부처님은 니련선하 강물에 목욕하고 보리수 아래서 마침내 정각을 이루셨다. 그 강물이 도심 한복판에 흐른다는 뜻인가. 도량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마조선 연구’로 박사학위 연구·강의·집필에만 전념교계 안팎 매체 글 연재하며 저서 10여권 넘는 ‘유명인사’ “집필은 공부 독려하는 끈” 미얀마서 1년간 수행하던 중전 세계인들 모
‘불교는 누구에게나 깨달음의 문을 열어 놓고 있으며, 남성 지배 사회와 계급사회에서 여성에게 종교 수행의 기회를 제공한 몇몇 안 되는 종교 가운데 하나이다.…(중략)…그러나 2600여 년이란 긴 역사의 비구니교단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는 실정이다. 특히 동아시아 비구니교단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의 연구 목적은 1차적으로 동아시아 비구니교단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동아시아 비구니교단의 역사’ 중에서.‘윤회’ 법문에 커진 의문
“불교문화를 전공한다 하면 ‘여기저기 놀러 다니니 좋겠네요’라는 분들도 있었어요. 문화라고 하면 학문의 영역이 아닌, 취미나 놀이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학계에서조차 전공분야로는 적절하지 않다며 만류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적멸보궁에 대한 관심에서 불교문화 연구로 넓혀나가 “시은 있어 가능했던 배움교육·연구로 회향해야”삼보 근간한 ‘삼원론’으로 불교문화 분류 새 기준 제시 “미술 관점선 불상도 조각품경전 근거한 배경·사상으로 유·무형불교문화 해석해야” 중앙승가대 비구니수행관장 오인(吾印) 스님은 2005년 ‘동아시아에 있어서 오
전율이 일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방대한 경전과 불서들. 눈 돌리는 곳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옛 스님들의 발자취, 그리고 그것을 연구해 놓은 2500여 년의 결실들이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경전과 불서들은 마치 보석같이 빛나고 있었다.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교학, 그 길에 동행하고 있었음이 비로소 가슴 벅차게 행복하고 감사했다. ‘교학의 길을 걷는 이가 없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음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을까.’ 세납 마흔다섯, 10여 년 간 걸어왔던 강사의 길. 비로소 이 길의 무게가 가슴
“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끊으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곧잘 ‘이것은 작은 일이다. 끊을 것도 못 된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이것을 끊으라고 한다’며 계율을 하찮게 여기며 도리어 불만을 품는다. 그들은 계율을 지키는 것을 싫어하고 욕심에 결박되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계율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잘 지켜서 욕심에 결박되지 않으며 결박에서 벗어난다.” (중아함 50권 192경) 2007년 묘엄 스님 첫 전계 제자 비구니 간 율맥 잇는 새 역사 2012년 율원장 소임 맡은 후 계율특강
도량이 들썩이던 전날의 흥겨움은 처마 밑을 장엄한 오색천에 아직도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칠곡 정암사 사찰음식축제는 올해로 12번째를 맞았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도량이 꽉 차도록 사람들이 모였다. 간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정암사를 찾은 700여명의 신도들에게 50여 가지 사찰음식을 정성껏 공양했다. 산사음악회, 서예·민화전과 함께 장학금 전달식도 열렸다. ‘금강경’ 독경소리에 매료돼20살 출가…호된 행자 경험“전생의 업장 녹이는 과정”20대 중반에 시작한 공부에먹고 자는 시간 줄이며 매진포교당 운영하며 법회 성황‘
수락산 석림사는 의정부 장암역에서 수락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주말이면 등산객들 왕래로 늘 북적이지만 평일 오후에는 이곳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듯 고요하다. ‘큰법당’이라고 쓰인 한글 현판이 걸린 법당에 참배하고 내려오니 주지 지암능인(智庵能仁) 스님이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낸다.장애아 보살피려 개종하며눈물 흘리는 신도 모습에불교 사회복지 활동 발원 인도성지순례서 만난 아이가난에 고통받는 이들 보며“수행자의 안일한 삶” 반성일본서 사회복지 공부하며교육복지사업 중요성 절감2000년 노인복지관장 맡아교계 노인복지사
“존자여, 그대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하였습니까.” “대왕이여, 실은 나는 어려서 출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나는 궁극적인 목적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들 사문(沙門)은 현자(賢者)이다. 이분들은 나를 공부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에게 배워 지금은 출가하는 목적과 자제(自制)하는 이익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밀린다왕문경’ 중에서.출가의 목적이 뭔지 몰랐지만 ‘맑은 스님 되겠다’ 발원으로19살에 원담 스님 은사로 출가동학사강원 학인시절 소임 살며학문 소중함, 대중살림 기본 배워동대
생과 사가 하나로 뒤엉켜 있었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끔찍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아직 도량석도 울리지 않은 새벽녘, 이제는 정말 떠날 때가 되었음이다. 형제자매 없던 14살 행자에게대중 많은 절집안은 별천지“너무 좋아 사방 뛰어다녀”강원 졸업 후 ‘결국엔 마음’10안거 성만한 선객으로 10년율장 배울 곳 없는 아쉬움에묘엄 스님 회상서 강사의 길 율장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세납 48세에 중국으로 유학 후봉녕사 금강율원서 연구 매진“수행자 기본은 계율서 시작”“여기서 네 해만 더 살자.”봉녕사승
“종일수타보 자무반전분(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이라.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헤아려도 나에게는 반푼어치의 이익도 없다.”심장이 멎는 듯 했다. 아니,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에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꽃다운 나이 스무 살, 안정된 직장. 남들 눈엔 부족함 없어 보였지만 ‘이것이 삶의 진정한 가치’라 여겨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엔 늘 허전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빈자리를 간파한 것일까. 무문관 6년 폐문정진을 마친 관응(1910~2004) 스님의 법문은 폭포수처럼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환희가 되어 혈관을 타고 퍼졌다.
대웅전 앞마당으로 뜨거운 8월이 쏟아진다. 아무리 산중 사찰이라도 여름을 비켜갈 수는 없다. 도량 앞 계곡물도 더위에 지쳤는지 더디게 흐르는 한 낮, 꼬맹이 나무의자 하나가 땡볕 아래 덩그러니 놓여있다. 은사와의 약속 지키기 위해‘위패은사’ 모시고 출가 단행봐주는 은사 없어도 혼자 척척“귀담아 들으면 모두 내 공부”승가대 졸업후 릿쇼대서 박사2000년 유마사 주지 소임맡아전각 11채 신축해 가람 일신2007년 유마사승가대학 개설선학 승가대학원 전환 후에는재가불자에도 모든 수업 개방“예불·간경·참선 함께 해야성불로 가는 참다운 정진”
법명이 특이하다. 바다 해(海), 머무를 주(住). 법호는 수미(須彌), 수미산을 뜻한다. ‘불교총람’ 인명록을 다 뒤져봐도 이런 법명 쓰는 이는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수미해주(須彌海住) 스님 딱 한 명이다. 동국대 최초의 비구니교수. 화엄학의 대가이자 여성불교운동의 대표주자, 그리고 첫 비구니 동국대 정각원장. 굵직굵직한 타이틀이 줄을 잇는 해주 스님에게 던진 첫 질문은 법명 이야기였다.▲무슨 뜻이 담긴 법명인가. “운문사 사리암 행자 시절에 은사스님이 주신 법명이다. 해탈하겠다고, 마음공부 하겠다고 절에 왔지만 이름은 좋은 것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설거지하던 행자도 큰방에 들었다. 경책하는 주지 스님의 쩌렁한 목소리에 큰방 분위기는 칼날 같았다. 다들 숨 죽였다. 하지만 말석에 앉은 19살 행자의 눈빛은 빛났다. ‘내가 강사라면 이럴 때 학인들에게 뭐라 가르칠까.’ “명성 스님 만큼만 되라” 당부한은사스님 뜻에 1970년 운문사로‘불교와 여성’ 주제 글 기고로여성 차별 문제 수면 위로 올려전강 후 대만·일본 유학 강행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택한 탁마“1세대 비구니강백 헌신·노력오늘날 비구니승가 위상 토대"엄격한 청규도 태산 같은 대중도 버겁지 않았다. 그
푸른 바위도 잠들었을 깊은 밤, 오늘도 스님 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들려오는 부처님 음성, 그리고 수없이 다가오는 그 가르침의 환희에 새벽녘이 되도록 스님은 경을 덮지 못한다. 수마가 범접할 틈은 바늘귀만큼도 없다.모친 원력에 15살 출가 인연경전 구하기도 힘들던 시절공부 기회 갖는 것만도 행운법보강원·중앙승가대 수학화운사 강사 거쳐 청암사로땔감도 없이 겨울 맞아도“출가자답게 살면 길 열린다”사찰 풍습 어려워하는 학인들에전통사찰문화 소중함 일깨워보존·전승시키는 것도 강사 몫“아무 소임도 없이 강사만 했으면
흐드러진 벚꽃 시샘하는 봄비 덕분에 도량에 꽃비가 내린다. 일요법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천불설법도량 고양시 금륜사의 오후 풍경은 더 없이 푸근하고 여유롭다. 수화로 설법하는 부처님을 모신 곳, 이 독특한 도량불사를 이룬 스님의 행적 또한 예사롭지 않다.6남매 출가에 3살에 불연14살까지 한글도 모른 ‘무학’묘엄 스님 만난 후 공부 발심 “비구니수행관 신축 불사는부처님 가치로 가능했던 일”한국비구니연구소 홀로 이끌며비구니 승가 행적 세계에 알릴자료정리·연구에 17년째 매진“나도 출가 할래요.”3살 막내딸 입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