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해가 떴다. 인도의 마지막 여정을 소화하기 위해 흔들리는 기차에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떼어낸다. 숨 가쁜 일정의 마지막 청신(淸晨)이 밝았다. 긴 일정이지만 지루할 수 없었던, 짧은 시간이지만 긴 여운을 남겨주던 인도의 마지막 볕이 나를 향해 내리쬔다.먼저 타지마할로 간다. 인도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코스인 이곳은 그 명성에 걸맞게 일단 덩치부터가 어마어마하다. 외국인의 입장료는 현지인보다 30배가 넘고 작은 소지품도 일일이 검사대를 통과해야 한다. 맨발 혹은 신발에 덧신을 신어야 한다기에 신발을 훌쩍 벗어버렸다. 맨발로 대리석을 디디니 발바닥에서 머리끝으로 찬 기운이 쭉 타고 오른다. 결혼하고 17년간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번째 자식을 낳다 1629년 죽은 뭄타즈의 묘 타지마할. 무굴
억겁의 인연 녹아든 청수를 마시다 기원정사 터는 여전히 평화로운 땅이다. 존재하는 흙 한 줌, 구름 한 점, 나무 한 그루, 풀, 물, 바람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방인은 늘 배가 고프다. 인도 커리를 한 접시나 비우고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허기가 진다. 고소하고 매콤한 냄새로 한가득 메운 좁은 길을 지나니 뱃속에서 ‘꼬르륵’한다. 그 냄새들이 군침을 돌게 한다. 길가에 흥미로운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얼마나 있었다고 인도인들의 음식에도 눈길이 간다. 이방인임을 핑계 삼아 오늘은 저 음식들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먹을 만한 것들도 꽤 있다. 눈과 코보다 뱃속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걸음이 나를 그것들 앞에 세워놓았다.
붓다께서 열반에 드셨다. 그리운 고향을 향해 북녘으로 머리를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두 발을 포개 누워 붓다는 입멸에 드셨다. 바이샬리에서 붓다는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으로부터 3개월 뒤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 그리고 다음날 붓다는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80살 노구의 병든 몸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 소식을 접한 바이샬리 마을 사람들은 다시는 붓다를 뵐 수 없을 거라는 안타까움에 하염없이 뒤를 따랐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칸타키 강 앞에 이르렀다. 붓다는 강을 건넜다. 붓다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들은 붓다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붓다가 점점 멀어져 갔다. 사람들이 강변을 서성이며 눈물을 훔쳤다. 이별이 안타깝다. 그들은 자리를
마야 부인이 싯다르타를 출산하고 나서 목욕했다는 연못. 그 뒤로 사라수(무우수)가 근엄하게 서 있다.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사람을 가르친다. 어제의 길을 따라 새날을 여는 여정은 말없이 여행자를 가르친다. 그런데 오늘은 특히 더 많은 가르침을 주려나 보다. 무려 왕복 12시간 동안 꼼짝없이 버스 안에 갇혀 인도 국경을 넘어 네팔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던 일정 중 유일하게 여유로운 여정이라는 생각에 살짝 미소 지어본다. 룸비니로 출발. 인솔자가 처음으로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아 순례자들에게 경고했다.“이번 일정 중 가장 고된 길이 될 것 같습니다.”‘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그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
힌두인들은 강가 강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가 사라져 윤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디아(Dia·꽃잎에 양초를 얹은 성구)에 소원을 담아 강가 강에 띄워 보낸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죽은 사람에 불을 붙이면 삽시간에 불이 붙어 불고기처럼 지글거린다. 곧 두 팔이 떨어지고 두 다리가 떨어진다. 몸의 기름이 장작 밑으로 흘러내린다. 시체는 겨우 2시간 만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린다. 너무나 허무하게. 그런데 두 주먹만 한 살덩이는 타지 않는다. 뼈마저 다 녹아버리는, 몇 천도의 열 속에서 한 갓 조그만 살덩이는 타지 않다가 4시간이 지난 후에야 불 속에 녹아든다. 과연 무엇일까. 살덩이, 그것은 바로 심장이다. 심장은 아주 오랫동안 타지 않는다.
붓다가 깨달음 이후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최초로 법을 설한 곳. 푸릇한 이파리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이 평온한 대자연을 담아낸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예정된 순례 길이 허리춤까지 왔다. 아직 반 밖에, 아니 벌써 반이나 순례를 마쳤다. 그런데 큰일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텐 루피(한화 250원)’ 대신 하나씩 쥐여 주던 볼펜이 동이나 버렸다. 피천득 선생이 지나가다 만난 이들에게 장미꽃을 전하던 그 마음으로 건넨 54자루의 볼펜이 연기 날아가듯 흔적도 없다. 애처로운 눈동자를 피할 길이 없을 때면 슬며시 볼펜 한 자루를 건넨다. 아이는 우물쭈물하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쏜살같이 친구들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새 아이의 손가락이 나를 향하고, 수십 명의 아이는 벌떼처럼
나란다는 이슬람의 말발굽 아래 철저하게 파괴됐다. 날카로운 칼날은 스님들의 목과 배를 갈라놓았고 사방으로 번진 피는 벽돌을 핏빛으로 붉게 물들였다. 여기는 천 년 전 벽돌을 손에 넣기는 쉬워도 달콤한 초콜릿은 사먹기 어려운 곳이다. 경적소리와 매연으로 가득한 시내에서 한 발짝 발을 떼면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잘 가꿔진 넓은 잔디와 드문드문 사람이 보이는 평화로움은 나란다 정문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분리된다. 세계 최대의 대학이자 최초의 불교 종합 대학 나란다는 붓다 재세 시 망고 숲 작은 학당에 불과했다. 붓다의 열반 이후 지구 상에서 가장 거대한 지혜의 샘이 솟아났던 곳. 젊음을 수행과 교학에 쏟아 붓고 눈에 불을 켜 법음을 연구했던 스님들이 살던 이 공간은 들
불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 터. 붓다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말씀만이 따사로운 겨울 볕이 되어 무성한 대나무 잎 사이사이를 비추고 있다. 인도의 새벽은 발이 달린 동물 모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온통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소와 닭, 양과 사람들. 그 사이로 자동차와 릭샤 경적소리가 쉴 틈 없이 울려대 타지 사람들을 어리바리하게 만든다. 인도의 자동차는 여전히 뒷거울(백미러)이 없고 릭샤꾼들은 한 술 더해 뒤를 보며 앞으로 질주한다. 위태위태한 모습에 멈칫멈칫 걸음을 멈춰보다 이내 노파심을 접어두고 서둘러 그들 속으로 파고든다. 마치 대하소설 속으로 들어간 것만 같은 인도의 새벽.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는 새벽이다. 고스란히 그 기억을
아이들 눈에서 붓다의 지혜를 보다 플랫폼 주변에 자리를 깔고 수백 명이 누워 있다. 거지인가 싶지만 아니다. 기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선남선녀들이다. 그들은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밤낮을 마냥 그렇게 기차를 기다린다. 열차에 올라서자마자 승무원이 방긋 웃으며 반긴다. 낯선 이에게 어쩜 저리도 발랄하게 웃을 수 있는지, 여행객들은 자연스레 그 웃음에 전염된다. 마하 파리니르반(대열반) 열차에는 여행자 10명당 3명의 승무원이 따라붙는다. 식사와 차, 후식, 화장실 문을 열고 닫는 담당까지 열차 밖 풍광과는 사뭇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맨 먼저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고 구석구석 이리저리 살핀다. 4인실을 2인이 쓰도록 개조해 특실로 재탄생된 공간이다. 침대에 깔린 하얀 시트 위에 얼른 누워
페르시아 건축가 구미르자기의 지휘 아래 1565년 완성된 후마윤의 묘(Humayun Tomb). 중세 이슬람 건축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균형미와 안정감으로 보는 이의 마음마저 차분하게 한다. 붓다를 만나러 간다. 인도로 떠나는 길에 먼저 ‘마음’을 준비한다. 지저분한 겉모습이나 불결해 보이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혹은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하는 마음. 물처럼 그릇의 색과 모양에 따라 변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풀어헤친다. 그동안 살며 무심결에 익혔던 몇 가지 습관과 버릇들도 누구 다른 사람에게 줘버린다.낯선 나라에서 오는 여행객을 반길 그들과 교감하고자 허름한 운동복을 걸치고 무릎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 운동복을 넣은 괴나리봇짐 하나를 질러 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