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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정 기자의 칙칙폭폭 인도순례] 5. 붓다의 음성

기자명 법보신문

초전법륜지에는 행복 바퀴가 멈추지 않는다

붓다가 깨달음 이후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최초로 법을 설한 곳. 푸릇한 이파리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이 평온한 대자연을 담아낸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예정된 순례 길이 허리춤까지 왔다. 아직 반 밖에, 아니 벌써 반이나 순례를 마쳤다. 그런데 큰일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텐 루피(한화 250원)’ 대신 하나씩 쥐여 주던 볼펜이 동이나 버렸다. 피천득 선생이 지나가다 만난 이들에게 장미꽃을 전하던 그 마음으로 건넨 54자루의 볼펜이 연기 날아가듯 흔적도 없다.

애처로운 눈동자를 피할 길이 없을 때면 슬며시 볼펜 한 자루를 건넨다. 아이는 우물쭈물하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쏜살같이 친구들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새 아이의 손가락이 나를 향하고, 수십 명의 아이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구름처럼 산타클로스를 에워싼다. 볼펜 한 자루에 부자가 된 아이들. 10캐럿쯤은 되어 보이는 보석을 눈에 달고 다니는 아이들이 웃는다. 한 아이에게 건넨 볼펜의 출처가 썰물처럼 퍼져 고사리 손들이 밀물처럼 뻗어오는 일들이 두세 번 벌어지고 나니 나 역시 거지가 돼 버렸다.

그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외면할 용기가 없어 달러를 루피로 바꾸기로 했다. 잠시 들린 호텔에서 10달러 5장을 내밀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돈이 터무니없다. 500루피 1장, 100루피 4장, 동전 몇 개뿐이다. 계산상으로는 이 돈의 두 배는 받아야 마땅했다. 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는 줘야 할 것 아닌가. 혹시 내 계산이 틀린 것인가. 돈을 만지작거렸다. 억울하다. 입이 있어도 귀머거리요, 귀가 있어도 벙어리다. 한참을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제야 못마땅하다는 듯 100루피 3장을 더 주는 게 아닌가. 고맙다고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웃음이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그제야 문득 떠올랐다. ‘여기는 인도다.’

서둘러 하체를 가동시킨다. 붓다가 깨달음 이후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최초로 법을 설한 곳. 불교가 시작된 사르나트 땅을 밟았다.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서울에서 강릉쯤 되는 먼 거리를 걸어 이곳에 당도한 붓다. 멀리서 걸어오는 붓다를 보고 아는 척도 말자던 다섯 도반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공손히 예를 표한 자리다.

무려 30년간 붓다의 두번째 설법지 차우칸티 스투파를 청소해 온 알리양라다싱 씨.

한 노인이 순례자들을 반긴다.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차우칸티 스투파 주변을 정돈하는 게 직업인 노인이다. 얄리양라다싱은 35세 때부터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이 자리를 홀로 지켜왔다. 무려 30년간. 그동안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낳았고, 손자도 생겼다. 쓰레기를 발견하자 쏜살같이 달려가 얼른 집어내는 그의 손길이 정성스럽다. 노인이 말한다. 비록 나는 무슬림이지만 붓다를 존경한다고. 죽는 날까지 이곳을 지킬 것이라고. 자신의 흰머리 수만큼 붓다 제자들을 만난 뒤 나는 알라신 곁으로 갈 것이라고. 나란다에서 느낀 이슬람에 대한 원망과 노인의 바쁜 손길이 교차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

그 유명한 사슴 왕 이야기처럼 이곳은 누런 사슴들이 뛰노는 곳이다. 푸릇한 이파리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모습이 평온한 대자연을 담아낸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오계와 네 가지 거룩한 진리,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길에 대한 미묘한 법 바퀴를 굴린 곳. 야사를 비롯해 55명의 비구가 탄생하고 첫 재가신자인 야사의 아버지가 귀의한 장소. 붓다는 불보가 되고 전법륜의 가르침은 법보가 되고 다섯 수행자는 승보를 이루게 된 역사적인  장소 녹야원이다.

본격적으로 사르나트 관람을 시작한다. 카메라 반입을 금지하기 위해 유명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금속 탐지기까지 갖춘 고고학 박물관. 사진촬영은 못하지만 우습게도 전시된 유물들은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다. 인도인들의 머릿속을 도통 알 길이 없다.

첫 법륜이 굴러간 다르마라지크 스투파 앞이다. 현장 스님에 따르면 100척이나 된다고 했던 아쇼카 왕이 세운 이 스투파는 이슬람 군주였던 자카트 싱이 1794년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석재와 벽돌을 허물어 지금은 기반만 덜렁 존재한다. 그때 탑을 허물다 꼭대기에서 돌 상자 하나를 발견했는데 뼛조각이 담긴 녹색 사리기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보물을 강가에 버렸단다. 참 안목도, 인정도 없는 놈들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가 눈에 들어온다. 비구와 비구니들은 계율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고 분열되어서는 안 되며 화합을 깨면 추방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선명히 보인다.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 명문.

이곳은 현지인들에게도 개방돼 있어 인도인들도 자주 드나든다. 한 연인이 나무 아래 앉아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21세의 인디와카르디아와 수줍은 17세의 리아는 곧 결혼한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가슴 벅찬 성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첫 키스를 나눈 추억의 장소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가슴 벅찬 성지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첫 키스를 나눈 추억의 장소가 된다.

진리를 보는 탑이라는 뜻의 다메크 스투파. 붓다가 두 번째 법문을 설한 장소다. 높이 33m의 높이에 지름이 28m나 된다. 순례자들은 서둘러 금박을 붙이고 쉼 없이 허리를 굽히며 스투파를 돈다.

순례자들은 성지 곳곳에 금박을 붙이고 합장한 채 스투파를 돈다.

‘내일과 다음 생 중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여기에 서니 이 말이 새롭다. 무엇엔가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다. 내 삶이 언제까지 계속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혹 다시 태어난다 해도 세상을 볼 수 없을 수도 있고 두 발로 걷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는 지금 여기.

들리는 모든 소리가 붓다의 음성처럼 느껴진다. 자꾸만 웃음이 난다.

티베트 사람들의 염불 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연인들 사랑의 대화. 이곳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인다. 모든 소리가 붓다의 음성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붓다의 설법지에 서서 합장하는 나는 행복하다. 자꾸만 웃음이 난다.

안소정 기자 as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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