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미학’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연재에서 ‘선화(禪畵)’라고 불리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많은 독자들이 왜 그랬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연재를 시작할 때 이미 밝힌 것처럼 중국화의 전통에 ‘선화’ 또는 ‘선종화’라는 분류가 없기 때문이다. 선화와 선종화라는 개념은일본식 오리엔탈리즘 불과문인화 현상 버리지 않고도마음에 담긴 깊은 내면 표현수묵 이용한 그림의 출현은그림 형성하는 정신의 변화문화적 취향 변화의 근원은선과 사대부 교류의 결과물송대 선종의 사대부 교류는오늘날 불교에 새 방향 제시기존 틀 부
‘일격’은 문인화가 가져온 미적 취미의 변화를 요약하는 비평 용어로, 북송대 소식을 중심으로 문동, 왕선, 이공린(李公麟, 1049~1106), 미불(米芾, 1051~1107)과 미우인(米友仁, 1074~1153) 부자, 황정견 등 일군의 사대부들에 의해 일어난 이 새로운 미적 취향은 휘종 시대에 이르러 그 당시까지 회화 창작의 중심지였던 궁정의 화풍을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이후 중국미술사의 방향을 결정지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동양화’는 궁정화풍의 그림이 아니라 북종 중기 이후 사대부의 그림이 제시한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송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회화는 서정적으로 변한다. 정치적 박해를 견뎌야 했던 소식, 왕선, 황정견 등의 사대부들 산수화와 제화시로 교유하며 공유된 기억을 나누며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해갔다. 이 문화의 핵심은 형식이나 기법의 탁월함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 즉 작가의 인격과 고상한 정신이었다. 9등급이던 예술평가 기준‘일품’의 경지 새롭게 첨가사실표현 집착에서 벗어나자유롭게 용필하는 새 풍조필법과 먹의 쓰임새 변용해생기 불어넣는 발묵법 등장‘일품’이라는 품등의 등장은선불교의 융성과 깊은 연관관찰 아닌 직관에 의한
자연 웅장함 담은 화풍에서생각과 느낌 중심으로 전환자연이 아닌 산수화를 보고동질 느낌 시로 표현 유행그림 속 자연 진짜 아니듯시 또한 자신의 심경 표현현실세계 벗어난 내면 풍경불안한 시대적 혼란 드러나재현 회화가 자연 대체 현상시와 그림 하나의 장르 융합강가 수심 겨운 삼첩산/ 창공에 수많은 봉우리 쌓여 운연과 같아라.산인가 구름인가 멀어서 알 수 없더니/ 안개 걷히고 구름 흩어지자 산은 옛 모습이네.다만 보니 두 벼랑이 잿빛처럼 어두운데/ 끊어진 골짝 여러 갈래로 날아오는 폭포 있다오.숲 감돌고 바위 감싸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니/
문동의 묵죽도는 확실히 그 시대의 취미를 바꾸어놓았다. 사람들은 거대한 스케일의 대관산수화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으며 궁정의 벽을 장식했던 곽희의 그림들은 땅바닥에 버려져 걸레조각이 되었다. 소식은 문동의 묵죽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정확히 꿰뚫어보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대나무, 고목, 괴석 종류를 그림으로써 문동이 시도했던 것을 송대 문화의 중심으로 승격시켰다. 십장생의 하나인 바위는불멸 상징하며 군자 비유문인화 속 고목과 대나무사물 넘어선 마음의 표상그림 속 표현의 단순성은단도직입의 돈오 그 자체문인들 추구한 사물 이치천지
시가 작가의 인격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지만 그림이 화가의 인격을 표현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행동이나 감정의 묘사를 통해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모양과 색으로, 그것도 자연경물에 가탁하여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중국 문인화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자 한다. 나아가 훌륭한 작품은 거기에 작가의 인격이 깃들여야만 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식물과 마음 교감하는 것은일자들이 추구했던 수행식물이 주는 순수한 수동성중국 지식인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듯이 문인의 그림이 화공의 그림과 격이 다름을 알아보고 그 예술적 가치를 평가했던 최초의 인물이 소식이다. 소식이 이름 붙였듯이 ‘사인화(士人畵)’란 벼슬아치, 즉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을 말한다. 따라서 그림에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강조되었다. 오대 송초의 사회적 혼란기문인들 중원서 촉으로 이동험준한 산속 자연 은둔하며선종으로부터 큰 영향 받아눈 앞 사물은 경계 아니라오히려 깨달음 얻는 기연경계 위에서 물들지 않으면사물 자체가 깨달음의 현현문인화는
소식은 왕유의 시와 그림을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라며 높이 상찬하였다. 앞의 연재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미지가 풍부한 왕유의 시를 읽으면 소식의 평가가 절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시’는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화공은 외형 묘사하지만심원한 내용은 전달 못해회화가 추구해야 할 바는보편자로서 도(道)·이(理)소식 말한 도(道)·이(理)는선악을 넘어선 무심의 경지빈 마음으로 사물 관조할 때경계는 장애 아닌 사물 본질 고대부터 중국에서는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그림은 격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모양의 닮
북송시대 대문호 소식(蘇軾, 1037~1101)의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東坡)인데, 이 호는 폄적(벼슬자리에서 쫓아내고 귀양을 보냄)을 당해 황주에 머물던 소식의 궁색한 생활을 보다 못한 친구 마정경(馬正卿)이 관청에 요청하여 얻었던 자갈땅 ‘동쪽 언덕(東坡)’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 땅을 손수 경작하여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동파’라는 호는 고난을 당해서도 굴하지 않는 소식의 낙천적인 성격이 무엇보다 잘 표현하고 있다. 탁월한 예술가 및 이론가로중국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글과 글씨, 그림에 모두 능통사상가로
‘청명상하도(晴明上河圖)’에 묘사된 북송문화의 생동감 넘치는 기운은 곽희(郭熙, 1020?~1100?)의 ‘조춘도(早春圖)’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은 북송 초의 진취적인 기상이 반영되어 있는데,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는 산의 기세와 언 땅을 뚫고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이른 봄 약동하는 생명의 기상과 청명하고 맑은 기운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곽희 ‘조춘도’ 성리학적 해석역사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유가적 관점 일부 인정해도산수구성 방식 ‘장자’에 근거평원과 고원, 심원의 삼원은 그림 화면을 무한으로 연장곽희 산수화, 장자사상 구현북송
송이 개국하자 정치경제는 점차 안정되어 갔다. 태조의 우문(佑文)정책은 당나라 못지않은 문화적 번영을 가져왔다. 문화적으로는 이후 동아시아 문화의 원형이 된 사대부와 서민 중심의 문화를 이룩했으며 사상적으로도 신유학과 선종의 발전, 도교의 융성 등으로 전에 없는 활기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의 경제적 파탄의 원인이었던 토지제도가 개혁되고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송의 사대부와 서민문화가 싹틀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사대부, 정치주역으로 성장신분 아닌 실력중시로 재편불교의 쇠퇴기 평가는 잘못사원·승려
선종이 남긴 수많은 전적들을 보면, 선과 문자의 관계는 복잡하며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문자를 부정했으며 다른 한편 문자를 긍정했다. 당나라 말기에서 오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문명 전반은 침체일로를 걷는 가운데 시단 역시 쇠락했다. 그 와중에도 뛰어난 선시가 창작된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그것은 선의 흥기가 시의 창작을 크게 고무시킨 결과라고 짐작되는데, 선종의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모토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승들이 시를 창작하고 애호했다. 선종의 불립문자 전통에도시로써 격외의 도리 드러내상식 거슬러 도리 부합은선과 시의
지난 연재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선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묵계에 의해 전수되었다. 영취산에서 세존이 설법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자 가섭만이 미소로 화답했듯이 보리달마의 선법은 언어의 길이 아니라 언어 밖의 길을 통해 이어졌다.불립문자 전통 무색할만큼엄청난 양의 문헌 쏟아내게송 단독으로 유통되면서중국의 송찬 창작에 영향당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문인들 선시 창작에 매진은유와 역설 담긴 선시는선의 정신을 언어로 관통그런데 보리달마로부터 4조 도신에 이르기까지 소규모의 신흥종교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선종이 5조 홍인에 이르면 제법 규모가
선종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스승과 제자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묵계(黙契)의 종교이다. 이른바 ‘불립문자’라는 선종의 모토는 선의 목적이 문자를 벗어나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청정한 자성을 깨우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선적인 깨달음은 사람들이 각자 자증자오(自證自悟)를 통해 얻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은 일깨워줄 수만 있지 가르쳐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는 묵계에 의지해야 하지 언설에 의지할 수 없다.선종 언어 일반적 언어와 달라언어 벗어난 이치 언어로 설명모순되고 불합리한 언어 사용고함
나무 둥지에 웅크리고 앉은 선사와 그 앞에 관복을 입고 합장하고 있는 벼슬아치를 그린 이 장면은 한국 사찰벽화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그림으로, 남송대 화가 양해(梁楷)가 그린 ‘백거이가 합장하며 여쭙자 조과 선사가 말씀하시다(白居易拱謁, 鳥窠指說)’이다.위험한 나무 위 정좌한 선사공손히 머리 숙인 고관 모습당 말기 지식인의 삶 드러내유가적 정치개혁 꿈과 기개투쟁·모함 난무 정치에 꺾여스님들 교류하며 함께 결사스스로를 ‘향산거사’라 불러밖으로는 유가로 몸을 닦고안으로 불교로 마음 다스려양해는 그 특유의 감필법으로 나무
두보는 왕유보다 11살 어렸지만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무척 달랐다. 왕유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나라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그 역시 안사의 난을 겪었지만 태평성세의 관료로서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유지했다. 반면, 두보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때였다. 곤궁한 시대의 시인은 백성들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끼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평생동안 벼슬 구했으나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평생 동안 곤궁하게 살아신심 깊은 고모 영향으로불교에 상당한 조예 보여시에 원각경·능엄경 등장유가적 인물
왕유의 시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그의 산수시이다. 자연경물은 수많은 시의 소재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중국에서 시는 도덕적 교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경물도 일종의 우의(寓意,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로 사용되었다. 사슴의 무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시경’의 저 유명한 시구, “유유녹명(呦呦鹿鳴)”은 신하에게 어진 임금이 연회를 베푸는 것을 비유하듯이 자연은 인간이 본받아야 할 도덕적 가르침을 우회적으로 표
중국문화에서 시(詩)는 삼경(三經) 또는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는 중국문명의 근본을 제시하는 동시에 독서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며, 나아가 ‘다스림’, 곧 왕의 교화(敎化)를 실현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으로서 간주되어 왔다. 공자 역시 뜰을 거닐다가 만난 아들에게 시를 읽지 않으면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고 꾸지람을 할 정도로 시를 소중하게 여겼다. 시에 대한 이런 태도는 다른 문명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화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로서, 예술이 인간의 삶과 사고에 미치는 영향력을 일
왕유(王維, 699~759)는 이백(李白, 701~762), 두보(杜補, 712~770)와 어깨를 견줄 만한 당시(唐詩)의 대가로,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시불(詩佛)”이라고 불렸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의 호, “마힐(摩詰)”은 ‘유마경’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불교, 특히 선종이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깊다. 불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어려서 시불(詩佛)로 통해쇠락한 명문귀족의 후예로뛰어난 재능에도 주변배회말년까지 관료생활 했지만고향에 원림 짓고 구도행귀족원림, 오락유희 공간사대부원림
천안문 광장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럴수록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짐도. 상고시대부터 관계와 치수를 위해 대규모 인력을 동원했던 중국에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동시에 지천으로 넘쳐나는 자원이었다. 하지만 다른 고대문명이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여 죽음 이후의 세계나 초월적 신을 위한 전당을 만드는데 전력을 쏟았을 때, 중국인들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문제에 천착했다. 유가의 “경세치용”은 물론이고 “무위자연”을 꿈꾸는 노장사상마저도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