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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문인산수화와 제화시 출현

기자명 명법 스님

좌천과 귀양, 불안한 시대 속 공유된 경험을 화폭에 담다

▲ 왕선의 산수화 연강첩장도(煙江疊圖).

자연 웅장함 담은 화풍에서
생각과 느낌 중심으로 전환

자연이 아닌 산수화를 보고
동질 느낌 시로 표현 유행

그림 속 자연 진짜 아니듯
시 또한 자신의 심경 표현

현실세계 벗어난 내면 풍경
불안한 시대적 혼란 드러나

재현 회화가 자연 대체 현상
시와 그림 하나의 장르 융합

강가 수심 겨운 삼첩산/ 창공에 수많은 봉우리 쌓여 운연과 같아라.
산인가 구름인가 멀어서 알 수 없더니/ 안개 걷히고 구름 흩어지자 산은 옛 모습이네.
다만 보니 두 벼랑이 잿빛처럼 어두운데/ 끊어진 골짝 여러 갈래로 날아오는 폭포 있다오.
숲 감돌고 바위 감싸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니/ 골짝으로 내려 달려가 급히 흐르는 냇물 되었구나.
시내 평평하고 산 열려 산기슭이 끊기니/ 조그만 다리와 들판의 주점 산 앞에 의지해 있네.
행인 몇 사람 높은 나무 밖을 지나가고/ 작은 고깃배 하나 떠 있는 강물 하늘을 삼켰네.
사군은 어느 곳에서 이 그림을 얻었는가/ 붓끝 점검하여 맑고 고운 경치 역력히 그렸구나.
알지 못하겠네 인간의 어느 곳에 이런 경계 있는가/ 있다면 곧바로 가서 이경의 밭 사 두고 싶노라.
그대는 못 보았는가 무창과 울구의 빼어난 곳에/ 동파선생 오년을 머물렀다오.
봄바람 강물 흔드는데 하늘은 아득하고/ 여름이면 저녁 구름 비를 거두니 산 더욱 고와라.
가을이면 단풍에 나는 까마귀 물가에서 함께 자며/ 겨울이면 장송의 눈 취하여 자는 사람 놀라게 하네.
도화유수의 선경 인간 세상에 있으니/ 무릉이 어찌 반드시 신선 세계일까.
강산은 맑고 조용한데 나는 진토에 묻혔으니/ 비록 가는 길 있으나 찾을 인연 없다오.
그대에게 이 그림 돌려주며 세 번 탄식하니/ 산중의 친구들 응당 나를 부르는 귀래편 있으리라.

이 시는 ‘소동파집’ 4책 17권에 수록된 것으로, 왕정국이 소장하고 있는 왕선의 산수화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를 보고 소식이 쓴 시다.

이에 대해 왕선이 화시(和詩)를 쓰고 이어서 소식과 왕선이 다시금 시로 왕래하여 두 사람 사이의 시가 4편에 이른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처럼 깊이 교류하게 했을까? ‘동파시집’19권 ‘화왕진경’ 시의 서문에 소식은 그들 두 사람의 교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원풍 2년(1079) 내가 죄를 얻어 황주로 좌천되었는데 사마도위 왕선 또한 좌천되어 멀리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서로 소식을 알지 못한 지 7년 만에 내가 부름을 받고 조정의 관리에 임용되었는데, 왕선 또한 조정에 돌아왔다. 서로 궁궐 문 밖에서 만나 감탄한 나머지 시를 지어 서로 주었다. 왕선의 자는 진경(晉卿)이며 공신 전빈(全斌)의 후손이다.”

왕선(1048~1104)은 송의 개국공신인 왕전빈의 후손으로 영종의 딸 위국공주와 혼인하여 부마도위를 제수 받았다. 그는 소식, 황정견, 이공린 등과 밀접하게 교유했으나 신당이 득세하던 원풍 2년 소식과 그의 친구들은 신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오태시안(烏台詩案)’이다. 다음해 소식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촉국공주가 병사하자 소식의 시가 실린 시집 ‘전당집’을 편찬한 왕선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모든 직함과 지위를 박탈당했다.

소식은 하북성 황주로, 왕선은 균주로 폄적(지방으로 좌천되거나 귀양을 감)되었다가 원풍 7년에 다시 영주로 옮겼다. 또한 왕선의 그림을 소장했던 왕정국, 즉 왕공의 부친인 왕소는 광서성 빈주로 유배되었다.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는 1085년 이들이 폄적에서 풀려난 이후에 그려진 그림으로, 1088년 12월 15일, 소식은 왕선의 그림을 보고 감동하여 ‘서왕정국소장연강첩장도(書王定國所藏煙江疊嶂圖)’를 짓는다. 왕선은 다시 소식의 시에 화답하여 ‘화시(和詩)’를 짓고 그렇게 두 차례 시를 교환한다. ‘연강첩장도’가 이처럼 소식의 마음에 감흥을 주었던 것은 무엇보다 왕선의 그림이 보여준 탁월한 성취 때문이다. 안개 낀 강의 흐린 부분이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공간 구성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그 이전에 유행했던 거비식(巨碑式) 산수화는 거대한 산이 중앙에 위치하여 위풍당당하게 화면을 장악하면서 꽉 채운 구도였다.

북송 초기 커다란 화폭에 자연의 모습을 웅장하게 그려낸 대관산수화의 유행은 곽희의 죽음과 더불어 막을 내리고,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 새로운 화풍이 등장한다. 앞서 보았던 문동과 소식이 보여준 묵희(墨戱),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게 될 미불과 미우인의 독특한 산수화, 지금 보는 왕선의 ‘연강첩장도’는 북송 후기 새로운 산수화풍의 도래를 알리는 작품 중 하나이다.

북송 전반 화단의 주도적인 양식은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곽희의 거비식 산수화였다. 곽희 이후 다시금 청록산수가 유행했으며 대관산수 대신 소경산수(小景山水)가 많이 그려졌다. 왕선은 이 두 화풍에 기량을 발휘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연강첩장도’와 ‘어촌소설도(漁村小雪圖)‘는 오랫동안 왕선이 직접 그린 것인지 여부가 논란이 되어왔으나 최근 그의 진작으로 밝혀졌다. 이 그림들에는 북송 궁정화원의 풍격이 깃들어 있는 동시에, 당나라 화풍의 영향이 나타난다. 또한 소경(小景)의 서정적 표현방식을 추구하여 그림 속에 시적 정서를 표현한 점에서 소식이 말한 ‘화중유시(畫中有詩)’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연강(煙江)은 안개에 싸인 강, 첩장(疊)은 중첩되어 연결된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거대한 스케일의 산은 자그마한 봉우리와 화면을 가득 채운 물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부분의 경치를 주목한 그림을 ‘소경산수화’라고 부르는데, 북송 초기 대관산수화에서는 우뚝 솟은 주봉을 중심으로 주위의 봉우리들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면 왕선의 그림은 현실세계에서 벗어난 내면의 풍경을 그리고 있어 쓸쓸함과 불안, 북송 후기 정세의 우환을 감지할 수 있다.

왕선은 소식의 시에 화답하여 쓴 ‘화시’에서 “평생 동안 산수의 신비를 알지 못하다가 어느 날 아침 몸에 이르러서야 망연해지고 말았네.”라고 쓰고 있다. 왕선은 유배지에서 본 산수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개인적인 기억과 실제 산수가 만나 시적 정경을 이루고 있다. 안개가 드리워진 수면을 건너 마치 신기루처럼 솟아 오른 산의 모습은 사실적인 단단함보다는 마치 환상이나 꿈에서 보는 듯이 시간과 장소의 고립감을 전해준다. 그것은 왕선 자신이 폄적의 경험에서 느꼈던 심리적 거리감을 시각화한 것으로, 현실로부터의 이탈과 내면으로의 침잠이라는 새로운 과정들을 보여준다.

왕선은 화면의 반 이상을 수면으로 채워 유배기간 동안 경험했던 내면의 심경을 그려냈다. 이처럼 사적인 감상을 표현한 이 그림은 소식을 비롯한 동료들에게 같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며 수많은 시와 문장이 양산됐고 이후에 모작들을 낳게 됐는데 이런 반응은 그들 사이에 공유되었던 동질의 경험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선의 그림에 소식이 감응했던 지점은 그들 사이의 공통의 경험, 즉 머나먼 곳에 폄적되어 고독과 좌절을 경험했던 시간에 대한 기억이다. 소식의 시에 묘사된 풍경은 그가 직접 본 풍경도 아니고 왕선이 보았던 풍경도 아니다. 그것은 왕선의 그림에 묘사된 풍경이다. 

진(眞)은 왕선이 본 실제 경치가 아니라 왕선의 그림에 묘사된 경치, 즉 의경이다. 왕선이 보고 느끼고 재현한 그림 속의 경치가 소식의 경험에서는 진경(眞景)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하는 주관이 경험했을 느낌과 그의 인격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은 그와 유사한 경험과 인격을 공유하지 않는 자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느낌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정치적 시련 속에서의 담담함,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쓸쓸함, 그리고 산천의 아름다움에 감응하는 고고한 인격이 아니라면 왕선의 그림도, 소식의 글도 후대에까지 그토록 오랜 반향을 불러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실경의 재현인 회화가 중국인의 자연경험을 대체하거나 자연경험의 틀이 되었다. 산수풍경을 보고 ‘그림과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진’과 ‘가’의 전도현상을 나타낸다.

‘진(眞)’과 ‘가(假)’가 역전됨에 따라 감상 행위가 예술 창작과 일체가 된 제화시(題畵詩)가 발생하였다. 제화시는 당대에 두보(杜甫)에 의해 처음 나타났으며, 자신의 그림에 시를 쓴 자제시(自題詩)도 등장하였다. 주경현의 ‘당조명화록(唐朝名畵錄)’에는 왕유가 자제시를 썼다는 기록이 있으며 송말 원초가 되어서야 제화시가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조맹견, 조맹부, 전순거 등과 원말 사대가 가운데 예찬, 오진 등이 자제시(自題詩)와 제관(題款)에 능했다. 제화시는 시와 회화를 하나의 장르로 융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왕선의 그림에서 보듯이 그림이 서정성을 묘사하게 된 것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67호 / 2016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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