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왕유의 시와 선 ②

기자명 명법 스님

시는 청정한 마음 깨닫는 장치…고난과 시비 벗어나는 새로운 돌파구

▲ 왕유, ‘강간설제도(江干雪霽圖)’, 당, 비단에 색, 28.8×117.2cm, 프리어 갤러리.

왕유의 시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그의 산수시이다. 자연경물은 수많은 시의 소재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중국에서 시는 도덕적 교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경물도 일종의 우의(寓意,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로 사용되었다. 사슴의 무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시경’의 저 유명한 시구, “유유녹명(呦呦鹿鳴)”은 신하에게 어진 임금이 연회를 베푸는 것을 비유하듯이 자연은 인간이 본받아야 할 도덕적 가르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은일 풍조로 ‘산수시’ 탄생
사령운·왕유가 대표적 인물

정치적 경력 평탄치 않고
독실한 불자라는 점 동일

사령운, 불전 번역에 관여
왕유, 남북종 선법에 정통

사령운 산수시, 묘사 치중
왕유, 고요한 깨달음 추구

자연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가 변화한 것은 위진남북조시대에 시작된 은일의 풍조 때문이다. 은일의 유행은 ‘산수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는데, 도연명(陶淵明, 365년~427년), 사령운(謝靈運, 385년~433년), 사조(謝朓, 464년~499년) 등이 ‘산수시’ 또는 ‘전원시’의 새로운 풍격을 열었으며 은일이 출세의 수단으로 전용된 당 왕조에 오면 위응물, 맹호연, 왕유 등 수많은 시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산수에 대한 그들의 남다른 취미는 이와 같이 그들 개개인의 정치적 상황이나 불교에 대한 신앙과 관계가 깊다. 사령운의 산수시가 험준한 산악을 등반한 그의 산행 경험에서 창작되었듯이 왕유의 산수자연을 대하는 태도 역시 종남산과 망천에서 지낸 생활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령운과 왕유의 정치적 경력은 평탄하지 않았으며 두 사람은 모두 불교를 깊이 믿고 따랐다.

하지만 여러 가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매우 다르다. 사령운의 자연에 대한 경험이 개인적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 떠난 모험과 같은 산행의 쾌감에 집중하는 반면, 왕유는 종남산이나 망천과 같이 평온하고 한적한 전원을 배경으로 관직과 겸행하는 은일 생활에서 경험하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산수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그들의 시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사령운의 산수시는 일종의 유람기에 가까운 것으로 산수를 유람하고 관찰한 바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지만 주관적 정취보다 객관적 형상의 묘사에 치우친다. 그의 시는 천지 상하를 살피고 사방을 둘러보는 자연 관상의 만족감이 나타나며 은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 정취가 표출되었으나 그것을 초탈적 경지 또는 진정한 은자로서 자부할 만한 환희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고독함만 곳곳에 묻어나고 있다.

사령운의 호방한 산수시가 끝내 울분을 삭이지 못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과 달리, 왕유의 시와 회화는 맑고 고요한 정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왕유의 산수시는 소식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표현할 정도로 순간의 장면을 생동적으로 포착하여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령운의 시에서 호방한 기상을 기르는 장소였던 산수자연은 왕유의 시에서는 내면적이고 정적인 공간으로 바뀐다. 

왕유와 사령운의 자연경험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사령운은 남본 ‘대반열반경’ 교정에 참여할 정도로 불전번역에 깊이 관여했으며 왕유는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불교수행을 했다. 왕유는 선종의 승려인 신회(神會), 원공(瑗公), 선선사(璿禪師), 원숭(元崇) 등과 교류가 있었으며 신회와는 오랜 기간 교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유는 신회의 부탁을 받아 육조혜능의 비문을 작성했는데, 이 비문은 혜능의 생애와 사상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그는 당시 중원에서 강력하게 번져가던 동산법문에 참여하여 선에 정통했으며 남북종 선법을 깊이 이해하고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접한 불교의 차이는 그들의 산수 경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왕유의 호선(好禪)은 현실적인 삶의 경계를 초월하여 마음의 공적함과 균형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유는 산수자연에서 공적하고 청정한 선취를 추구하여 맑고 담담한 심경에 도달했는데, 그의 시에는 주관의 감정이나 상념은 완전히 사라지고 객관만 고요하게 관조되고 있다. 놀랍게도 “오음은 귀를 멀게 하고 오색은 눈을 멀게 한다”고 하여 모든 감각적 지각이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노자’의 주장과 달리, 그의 시에 나타난 선명한 이미지는 맑고 고요한 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한가로운데 계수나무 꽃은 떨어지고(人閒桂花落)/밤은 고요하고 봄 산은 텅 비었네(夜靜春山空)/달 떠오르자 산새가 놀라(月出驚山鳥)/때때로 봄 시내에서 지저귀는구나(時鳴春澗中) -‘산새 지저귀는 계곡(鳥鳴澗)’, ‘王右丞集’, p.284.

‘산새 지저귀는 계곡(鳥鳴澗)’은 ‘이선입시(以禪入詩)’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첫 구절에서 마음의 한가로움과 꽃이 떨어지는 움직임을 대비시키고 있다. ‘한(閑)’은 마음에 번뇌가 사라진 무심의 상태를 일컫는데, 이처럼 한가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만 꽃이 떨어지는 찰나의 움직임이 포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찰나의 움직임은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시간의식이 정지된 동요하지 않는 마음의 적정함과 대비되어 있으나, 모두 마음의 고요함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한(閑)’과 ‘꽃잎의 떨어짐’은 바깥의 상태나 외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거울에 비춰지는 그림자처럼 모두 마음에 떠오르는 경계가 된다. 그래서 꽃이 떨어지는 평범한 한 찰나가 시간의 영원성과 불생불멸의 진여를 현시하는 계기로 전환된다. 왕유의 시에 나타나고 있는 ‘한(閑)’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과 같은 순간을 의미하고 있다. ‘한(閑)’은 시간에서의 시간성의 배제 또는 적어도 무중력적 시간 지속의 경험을, ‘공(空)’은 공간 속에서 공간의 초월의 경험을 전하는 개념으로 왕유의 시에서 즐겨 사용되었다.

왕유의 시에는 대립된 이미지가 많이 사용된다. 그것은 모두 순수 직관의 상태, 즉 현량의 경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의식의 분별 작용이 멈춘 상태에서 오직 감각 지각만이 생생하게 감지되기 때문에 소리와 색채, 동(動)과 정(靜)은 맑은 물에 투영되는 그림자처럼 모두 선명하고 또렷하게 지각된다.

왕유의 시는 잡다한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선명한 몇 가지 인상에만 집중함으로써 이러한 맑고 담박한 마음의 경계를 보여주는데 성공한다. 왕유의 시에 나타나는 회화성은 시어의 이미지가 대상의 형상과 색채를 묘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는 공간과 사물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시각화함으로써 시는 동시에 회화가 된다. 한(閑)·공(空)·장(長) 등의 시어는 공간을 무한으로 확장하면서 동시에 무화시킨다. 이와 같은 무화는 순수한 관조의 상태에서 얻어지는 체험이다.

바로 이와 같은 경계는 시인이 산수를 대할 때 느끼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마음에서 추구하는 도(道)이다. 시인이 산수자연을 관조할 때 느끼는 ‘공(空)·적(寂)·청(淸)·한(閑)·정(靜)’ 등의 느낌은 그의 마음의 반영이기 때문에, 그는 산수자연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불성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사령운 시대에 명산대천을 두루 노닐거나 대자연 속에서 마음껏 유람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취미와 크게 다른 것이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속에 내재하는 마음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왕유의 시에 묘사된 자연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선적 체험을 통해 얻어진 마음의 현현이며 마음의 경계이다. 자연을 공(空)으로 보는 불교적 관점은 세상의 명리와 물질적 욕구에 대해 담박해지고 번뇌와 집착을 끊게 해주며 세상을 벗어나 산수자연과 하나가 되게 하고 자연 속에서 정신적 위안을 찾도록 한다. 선취로 가득 찬 왕유의 산수시는 화의(畵意)와 시정(詩情), 그리고 선리(禪理)가 융합되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선종은 색공 관계를 떠나지 않고서 공을 깨닫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공관을 펼치고 다른 한편으로 색으로서 공을 증득하고 경을 빌어 마음을 관하는데, 여기서 색은 마음의 현상으로서 간주된다. 선종은 중국적 전통에서 동일한 자연을 대면하였지만 그것은 공관에 의거하여 만상을 순수 현상(色)으로 보았다. 이 체험은 ‘지금 여기’의 순수한 직관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상태에서 마음은 명철하고 공적해진다. 순수 현상으로서의 색은 마음의 직접적 현현이며 시간과 공간 규정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없는 곳이 없고 없는 때가 없다. 그것은 순간과 영원이 하나가 되는 체험이다. 산수는 유구하게 흘러가는 변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적정(寂靜)’의 상태에서 찰나적으로 직관된다. 참선자의 ‘휴식처’로서 ‘산수’는 직관의 대상이며 주체의 불성에 대한 자증이 된다.

왕유가 종남산과 망천별업에서 향을 사르고 홀로 좌선하면서 발견한 것은 바로 청정한 마음이다. 이제 시는 교화의 수단이 아니라 청정한 마음을 발견하고 깨닫는 장치로서, 은거와 시, 그리고 자연 속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인생의 고난과 속세의 시끄러움을 벗어나는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한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39호 / 2016년 4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