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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선사들은 왜 시를 지었는가? - 하

기자명 명법 스님

터져 나오는 오도의 즐거움, 직관과 묵계의 언어로 표현

▲ 달마절로도강(達磨折蘆渡江). 김명국(金明國)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 조선 17세기 중엽, 족자 종이에 수묵 97.6 x 48.2cm, 국립중앙박물관.

지난 연재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선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묵계에 의해 전수되었다. 영취산에서 세존이 설법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자 가섭만이 미소로 화답했듯이 보리달마의 선법은 언어의 길이 아니라 언어 밖의 길을 통해 이어졌다.

불립문자 전통 무색할만큼
엄청난 양의 문헌 쏟아내

게송 단독으로 유통되면서
중국의 송찬 창작에 영향

당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
문인들 선시 창작에 매진

은유와 역설 담긴 선시는
선의 정신을 언어로 관통

그런데 보리달마로부터 4조 도신에 이르기까지 소규모의 신흥종교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선종이 5조 홍인에 이르면 제법 규모가 큰 수행그룹으로 발전한다. ‘육조단경’은 홍인 문하의 뛰어난 두 제자 신수와 혜능 사이에 있었던 대결이 결판나는 극적인 장면을 두 편의 게송으로 전달하고 있다. 게송은 단순히 흥취를 표현한 것도 아니고 사상을 설명한 것도 아닌데 그 두 사람의 내적 체험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

‘게송’이란 표현이 처음 나타나는 것도 왕유가 신회의 부탁을 받아 지은 ‘육조혜능선사비명 병서’라는 사실을 통해 보면, 묵계로 전해지던 선의 전통이 이 시기에 이르러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선종은 ‘불립문자’의 모토가 무색할 정도의 엄청난 양의 문헌을 쏟아냈다. 선시, 어록, 등록 등등 선이 갖는 독특한 개성의 문학형식이 천하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놀랍게도 교학 전통과 만나게 된다. 불교경전은 내용과 체제에 따라 12가지로 분류되는데, 그 가운데 Geya(祇夜)와 Gatha(伽陀)가 운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운문 형식의 발달은 무엇보다 암송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금강경’ 사구게와 같은 게송은 산문 뒤에 앞의 내용을 요약한 ‘기야’의 구조를 갖는다. 게송의 형식은 대부분 4구가 1게송이 되며 각 구마다 글자 수는 4자, 5자 또는 6자로 일정하지 않다. 압운이 잘 구성되었던 훌륭한 운문이었던 산스크리트 원전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압운까지 번역할 수 없어 글자 수만 맞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한역할 때 한시의 형식을 맞추려고 노력했으나 한시의 엄격한 사성 운율이나 압운 등의 형식을 갖추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중국에서 불교경전이 유통된 후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는데, 경전 전체를 읽지 않아도 경전의 내용을 압축한 게송만으로 의미를 잘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점차 게송을 경전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작품으로 낭송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전에서 발췌한 게송들이 유통되었지만 머지않아 중국인 승려에 의해 저술된 중국화한 송찬문학이 등장했다. 인도의 위대한 문학유산으로 간주되는 마명(馬鳴)의 ‘불소행찬(佛所行讚)’이 중국에도 수입되어 점차 중국인에 의한 송찬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 집회 의식에서 범패음악과 함께 부르는 송찬문이나 예경문 외에도, 개인적인 발원을 세운 발원문과 업장을 참회하는 참문 등의 개인적인 문학이 등장했다.

후대의 게송은 한시의 평측을 제대로 지키는 등 한시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중국식의 산문인 부(賦)나 사(辭)로도 만들어졌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신행되면서 불교문학 역시 형식이나 내용이 중국화 되었다.

선사들이 지은 게송은 형식적으로 불경의 게송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용면에서는 전혀 다르다. 규봉종밀은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교란 여러 불보살이 남기신 경론이며, 선이란 여러 선지식이 구게(句偈)를 진술한 것이다. 불경은 널리 펼쳐 대천세계 팔부대중을 널리 뒤덮는 반면, 선게는 간략함을 취해 사방 한 무리의 근기에 나아간다. 대중을 뒤덮으면 넓고도 넓어 기대기 어렵지만 근기에 나아가면 가리킴이 용이하다.

‘교외별전’의 전통 속에 있었던 선사들의 게송은 경전에 나오는 게송과 달리 게송 한 수마다 독자적인 의미와 구조를 지니고 있다. 후대의 게송은 점점 더 자유롭게 창작되었는데, 전통적인 게송 형식을 취한 것도 있고 민간에서 유통되는 속곡(俗曲)의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 또한 당나라 때 시의 창작이 성행하게 됨에 따라 승려들 중에도 시를 잘 짓는 이들이 늘어나자 그들의 시에 예전에 익혔던 근체시 형식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게송은 점점 더 시의 수준에 육박하게 되는데, 점차 형식화되면서 초기의 생동감을 잃은 경우도 있다.

중국시의 전성기인 당대는 선의 황금기이면서 선사들에 의해 게송과 선시가 활발하게 지어진 시기이다. 한시와 선시의 융성이 일치하는 현상이 우연한 일이었을까?

중국시의 발달사를 살펴보면 근체시라는 시 형식이 남북조시대에 완성된 이후 근대에까지 중국시의 전범으로 자리잡아왔다. 그런데 이 형식이 불경 역경사업의 부수 효과로 얻어진 음운학과 성운학의 발달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불교를 통한 인도문명의 수입은 그 종교적인 성격 때문에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불교가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은 다대하다. 그동안 간과되어 왔지만 한시, 원곡 등을 비롯한 중국문학에 끼친 불교의 영향도 매우 심원하다.

선이 중국시에 끼친 영향은 형식에 제한되지 않는다. 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깊은 영향을 남겼는데, 당나라 때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백거이(白居易)ㆍ유종원(柳宗元)ㆍ왕유(王維)ㆍ이상은(李商隱)에서부터 송대 수많은 문인사대부들에 이르기까지 선시를 창작하지 않은 문인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백화체 시어의 등장과 송대 이후 시에 나타나는 철리화 경향은 선시의 영향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당나라 때 선승(詩僧)으로 널리 알려진 승려로 한산(寒山)ㆍ습득(拾得)ㆍ풍간(豐干)ㆍ교연(皎然)이 있으며, 그 중 한산은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민간에 유통되어 널리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한산의 생졸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백(701~762)과 두보(712~770)가 활약하던 시대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천태산 한암(寒巖)에 은거하고 스스로 한산(寒山)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생각나는 대로 시를 지어 나무나 바위 아무 곳에나 남겼다.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高高峯頂上)/사방을 돌아보니 끝이 없구나(四顧極無邊).
혼자 앉았음에 아는 사람 없고(獨坐無人知)/외로운 달은 찬 샘물에 비쳐있다(孤月照寒泉).
샘물 속에는 달이 없으니(泉中且無月)/달은 원래 푸른 하늘에 있는 것(月自在靑天).
이 노래 한 곡조를 불러 보지만(吟此一曲歌)/노래는 결국 선이 아니로다(歌終不是禪).

한산은 당시 정점을 이루었던 근체시(近體詩)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근체시의 구체적 금기조건이 청신한 내용을 표현하는 데에 저해 요소가 될 경우, 그는 과감하게 자유로운 시형(詩形)과 백화를 사용했으며 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다. 근체시의 성률과 형식미를 추구했던 성당의 문학이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 새로운 경향으로 전환된다. 황소의 난 이후로 당나라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문장가와 시인들은 대부분 세상을 구하거나 세상을 풍자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구하는 것으로 되돌아갔다. 문학은 이제 세상을 구하거나 세상을 풍자하기를 포기하고 한 때의 즐거움, 한 때의 오락을 추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내면을 향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요청이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가 “자기를 구하는 것”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선시와 게송은 그러한 경향을 한 발짝 앞서 이끌었다.

그렇다면 모든 언어작용을 거부한 채 내면으로 침잠한 선사들이 왜 시를 창작했을까? 시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일상적인 언어를 거부한다.

헤겔의 ‘미학강의’에 따르면, 시는 내면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장르이다. 시는 세계의 본질, 사물의 진실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핵심은 실제로 언어적 사유를 통해서 파악되지 않는다. 시인만이 사태를 꿰뚫고 그 이면의 본질을 파악하는 눈을 가졌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가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고 말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즉 개연성의 차원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믿어지지 않는 실제 사건보다 실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지만 믿어지는 것”을 추구한다.

은유와 역설로 이루어진 시는 선의 정신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사물의 외관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은 오직 시인의 상상력과 창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헤겔이 강조했듯이 사물을 꿰뚫어보는 시인의 상상력과 영감은 비록 정신적인 사유의 형식이 아니라 직관과 감각으로 표현되지만 ‘사변적 사유와 근친성’을 갖는다.

깨달음의 세계는 사물들의 세계를 뛰어넘기 때문에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오도의 즐거움은 그 어떤 표현을 강구하게 되는데, 그것은 언어를 뛰어넘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은 일상성의 표현인 산문을 버리고 내면성의 장르인 시를 선택하여 그 깨달음의 독특함을 전달한다. 시인들이 영감과 상상력에 이끌리듯이 선사들은 오직 직관과 묵계로서 언어의 세계에 도달한다. 자유로운 정신의 생동성은 오로지 미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에 시와 게송은 선의 세계와 만나 더 깊은 내면성으로 다가간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49호 / 2016년 6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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