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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변화와 불변

기자명 명법 스님

찰나의 순간, 시공간 벗어난 단순함으로 변화 속 불변 이치 구현

▲ 소식의 작품 소상죽석도(瀟湘竹石圖) 일부.

문동의 묵죽도는 확실히 그 시대의 취미를 바꾸어놓았다. 사람들은 거대한 스케일의 대관산수화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으며 궁정의 벽을 장식했던 곽희의 그림들은 땅바닥에 버려져 걸레조각이 되었다. 소식은 문동의 묵죽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정확히 꿰뚫어보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대나무, 고목, 괴석 종류를 그림으로써 문동이 시도했던 것을 송대 문화의 중심으로 승격시켰다.

십장생의 하나인 바위는
불멸 상징하며 군자 비유

문인화 속 고목과 대나무
사물 넘어선 마음의 표상

그림 속 표현의 단순성은
단도직입의 돈오 그 자체

문인들 추구한 사물 이치
천지 이치이며 도의 모습

바위는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영원불멸의 상징이며, 비바람을 가리지 않는 의연한 자태로 인해 군자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북송(北宋)시대에 많이 그려졌는데 문인화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한다. 즉 북송의 문인들은 괴석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

괴석만을 단독으로 그린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식물이나 동물들과 함께 그린 것도 많다. 구멍이 뚫린 기괴한 형상의 돌을 그린 그림이다. 과석은 중국 남방의 태호석(太湖石)과는 다른 화북(華北)의 괴석을 말한다. 괴석을 다투어 완상했던 북송 때에 이 화제가 많이 그려졌다. 단독의 화제 이외에도 괴석은 고목(枯木), 총죽(叢竹), 인물에 붙여지기도 한다.

소식은 ‘석씨화원기’에서 “나 또한 고목과 총죽(叢竹)을 잘 그린다”고 자부할 정도로 이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으나, 현재 소식의 그림으로 알려진 그림은 ‘고목괴석도(枯木怪石圖)’와 ‘소상죽석도(瀟湘竹石圖)’ 2편이 전부이다.

‘고목괴석도’는 원래 곽선정(郭蟬正)의 집 벽에 걸린 ‘고목괴석도’를 보고 읊었던 자신의 제화시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괴석이 화면의 오른 쪽에 있고 괴석 오른쪽에 작은 총죽이 있으며, 괴석의 왼쪽에 한 그루의 등근 고목이 비스듬히 뻗어있다. 고목은 앙상한 가지만 남았으나 솟구치는 기세가 용솟음치는 듯하다.

소식이 문동의 대나무 그림을 설명할 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마음속에 대나무가 완성되면 번개처럼 손을 휘둘러 단번에 그려낸 그림으로, 화면의 구성이 단순할 뿐 아니라 붓질 또한 성글고 간단하여 고목과 바위의 대체적인 윤곽만 그리고 있다.

이 그림 속의 고목과 대나무, 바위는 자연경물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하고 오랫동안 곱씹어낸 것이다. 하지만 단지 마음에 품은 정감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철저한 관찰의 결과 얻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일찍이 미불은 소식이 그린 묵죽이 머리를 위로 세우고 올려보고, 마디가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소식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마디를 좋아하지 않으시나요?” 소식은 곧장 응답했다. “대나무가 자라날 때 어찌 마디져서 자라는 일이 있는가?” 소식의 대나무 그림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오랜 관찰을 토대로 그려진 것이다.

“대나무가 막 움터 나올 때는 그 싹이 한 치에 불과할 따름이지만 마디와 입은 고루 갖추어져 있다.……그러나 요즈음 대나무를 그리는 사람들은 대나무 마디마디를 이어놓은 것 같고 잎을 겹겹이 포개놓은 것 같이 그리니 어찌 참다운 대나무의 모습이겠는가? 그러므로 대나무를 그릴 사람은 먼저 반드시 가슴속에 대나무를 구체화시키고 붓을 들고 깊이 응시하다가 그리고자 하는 바를 찾으면 재빠르게 시작하여 붓을 휘둘러 곧장 달려 그 관찰하는 바를 쫓아야 한다.“竹之始生 一寸之萌耳 而節枝具焉…今畵者乃節節而爲之 葉葉而累之 豈復有竹乎 故畵竹者必先得成竹於胸中 執必熟視 乃見其所欲畵者 急起從之 振筆直逐 而追其所見”-蘇軾全集 권11, p.885.

그러므로 “산석(山石), 죽목(竹木), 수파(水波), 연운(煙雲)은 비록 상형(常形)은 없지만 상리(常理)가 있다”는 소식의 주장은 ‘격물치지’, 다시 말해 현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을 통해 터득한 원리로서, 그가 주장했듯이 “(이러한 이치는) 고인일사(高人逸士)가 아니면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소식의 그림으로 전해져오는 또 다른 한 점은 중국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상죽석도’이다. 두루마리 그림으로, 호남성 영릉현 서쪽의 소강, 상강의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정호와 멀리 연결되는 창망한 경치가 묘사되어 있다. 그림 전체는 소강과 상강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하여 먼 산과 안개 낀 물, 비바람과 가느다란 대나무, 가까운 물과 구름 낀 물, 돌과 먼 산, 대나무와 나무가 강렬하게 대비된다. 화면은 한 단계 한 단계 확장되면서 그림 속에서 만 리의 경치를 보는 것 같다.

이처럼 담담하면서 소쇄한 풍경은 실제 경치를 묘사한 것이기 보다 그 경치 속으로 들어가 고요해진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 이처럼 내적 형상을 표상하기 위하여 우선 외적인 감각을 차단하고 의식의 분별작용을 없애야 한다. 이 상태에서 의식은 가장 수동적인 상태에 있게 된다. 이처럼 현상 의식이 차단되었을 때 마음을 어떤 한 찰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그 감각 또는 의식은 가장 또렷하게 지각된다. 이처럼 순수한 지각을 ‘현량’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곧 마음의 경계이다.

이때 마음은 마치 거울이 형상을 반영하듯이 대상에 어떤 의식적 왜곡이나 좋고 나쁨 등의 감정도 가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게 된다. 또한 마음은 외물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맑고 담담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주관성은 대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외적 감각을 최소화하고 수동적인 상태, 즉 관조의 상태에서 떠오르는 형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마음의 단순성이 회화로 전이될 때 비형사적 재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음의 주관성은 대상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 현현하기 때문에 형상의 모사는 부정하지만 재현적 성격 자체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때 마음의 단순성은 그대로 회화의 단순성으로 전이될 수도 있다.

마음의 단순성과 그 표현의 단순성 사이의 관계는 중국 선종의 특수한 수행방법과도 연관된다. 그것은 바로 ‘돈오(頓悟)’이다. 중국적 선취는 번쇄하게 여러 단계의 수행을 거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의 근원을 포착하는 방법을 계발했다. 이런 단순성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시에도 영향을 미쳐 함축적인 시어를 구사하게 하였다. 선종의 이와 같은 선취는 중국인의 취미를 평담(平淡)으로 이끌었으며 그 결과 회화의 창작에서도 단순한 방법이 선호되었다. 이 단순성과 평범함은 일상성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운수급반시(運水及搬柴)’가 모두 ‘묘오(妙悟)’가 되는 초탈한 마음의 상태이며 단순한 형상은 무한성을 함축한 경지를 보여준다.

‘일(逸)’에 대한 미학적 추구 역시 마음의 단순성과 고상한 인격에 대한 숭상을 반영한다. 주경현이 기록한 세 사람의 일품화가는 그 그림이 ‘조화의 공에 부합(符造和之功)’할 뿐 아니라 ‘그 묘를 다하며(曲盡其妙)’ ‘완연히 신령스럽게 공교롭다(宛若神巧).’ 또한 그 사람됨도 모두 고인일사(高人逸士)이며 자유롭게 ‘강호 사이에서 소요하고(多游江湖間)’ ‘곤궁에 빠져도 거리끼지 않고(落托不拘檢)’ ‘높은 절개(高節)’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참된 성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그리므로 일품은 회화에 대한 미적 요구이며 비평 기준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성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정신적 초월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품은 곧 일격으로 전환된다. 송초 황휴복(黃休復)은 ‘익주명화록(益州名畵錄)’에서 비록 주경현의 4품의 명목을 연용하면서 ‘일격’을 가장 높이 평가했던 것은 회화의 정신성에 대한 요구가 예술 비평에 구체적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주희는 비록 소식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이 그림을 본 후 “고금의 기운을 살펴 오히려 그 사람됨을 생각하기에 충분하다”라고 말했으며, 미불(米芾·1051~1107)은 ‘화사(畫史)’에서 소식이 그린 고목에 대하여 “자첨이 만든 고목은 가지가 굽어지고 끝이 없으며 돌이 준경하며 기기괴괴함이 끝이 없다. 그의 흉중의 반울(盤鬱)과 같다”라고 평가했다.

소식이 추구한 사물의 이치는 곧 천지의 이치이며 동시에 변함없는 도의 모습이다. 따라서 고인일사가 자연의 사물을 통해 알아내는 것은 변화와 불변의 이치이며 그러한 탐구를 통해 터득한 것은 문인의 의기이며 인격이다.

실제로 중국회화는 형식의 단순화를 낳는 데 그치지 않고 분위기와 매체, 그리고 필법의 단순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마음의 단순성은 화면의 단순성으로 직접 전환될 뿐 아니라 실천 과정에서 마음의 단순성이 전달되는 방식이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매체를 통한 주관성의 표현이 예술 창작에서 중요한 관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상리(常理·변하지 않는 이치)는 변화 속에서의 불변을 의미한다. 그 영원성이 형상으로 표현되지 않듯이 그 변화 역시 형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 대상의 시간과 공간적 차원에서 벗어남으로써 근원적인 마음의 불생불멸이 현현되게 한다.

소식 화론의 전환기적 의미는 바로 ‘어떻게 상리(常理)를 감각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어떤 형식을 통해 삶의 역동성을 묘사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인 문제로 전환시킨 점에 있다.

명법 스님 

[1365호 / 2016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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