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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송의 개국과 불교계의 변화

기자명 명법 스님

중국적 색채 강한 선종 중시…불교를 국가 통치에 이용

▲ 북송 말 한림학사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의 청명절 풍경을 그린 그림의 일부.

송이 개국하자 정치경제는 점차 안정되어 갔다. 태조의 우문(佑文)정책은 당나라 못지않은 문화적 번영을 가져왔다. 문화적으로는 이후 동아시아 문화의 원형이 된 사대부와 서민 중심의 문화를 이룩했으며 사상적으로도 신유학과 선종의 발전, 도교의 융성 등으로 전에 없는 활기와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당의 경제적 파탄의 원인이었던 토지제도가 개혁되고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송의 사대부와 서민문화가 싹틀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사대부, 정치주역으로 성장
신분 아닌 실력중시로 재편

불교의 쇠퇴기 평가는 잘못
사원·승려 당나라보다 증가

국가의 개입과 통제는 강화
도첩 등 세밀한 제도로 규제

폐불과 같은 강경수단 대신
승단의 힘 국가 정책에 이용

서역서 경전도입 원활치 않아
주류불교였던 선종 더욱 성장

교통과 상업의 발달로 도시가 번영했는데, 북송의 수도인 개봉은 이미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으며 남송의 수도 임안의 인구는 150만에 달했다. 당시 베니스와 파리의 인구가 거의 10만 정도였던 것과 비교해보면 송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봉, 임안 및 기타 대도시가 당나라 때 장안 못지않게 활발하고 개방적이었다는 점이다. 상업과 수공업, 오락산업이 번성했고 유ㆍ불ㆍ도 삼교의 활동과 종교적 기념일이 병존하였으며 지폐가 유통되었고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다량의 서적이 유통되었다. 이런 물적 기반을 토대로 수많은 전적들이 찬술되고 유통되었다.

모든 물자와 사람이 모여들어 ‘청명상하도’에 묘사된 것처럼 도시는 흥청거렸다. 생활이 넉넉한 사대부와 노동계층이 함께 거주하면서 늘 마주쳤고 관원, 상인, 향객과 유랑 예술인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돌아다니면서 대도시 시민문화를 농촌사회에 전파했다. 오늘날 명절을 보내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풍습은 송대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고향으로 귀향할 때 도시의 최신 유행을 함께 가지고 돌아갔다. 비록 적은 수의 상품이지만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되었고, 또한 널리 보급된 수로를 통해 쌀, 차, 비단 등의 상품을 수송하고 지방과 수도 또는 지방간의 무역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런 발전은 과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시와 지역을 소통시키고 문화적으로도 단일한 세계를 만들었다.

당시 송나라 수도 개봉의 저자거리를 묘사한 ‘청명상하도’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장면은 개방적이고 생동감 있는 송대 문화를 잘 보여준다. 그림 속에 갓을 쓴 고려인의 모습도 보여 고려와의 문화적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문화적 번영을 배경으로 사대부 계층이 정치와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과거제의 시행은 혈연과 신분이 아니라 실력이 중시되는 사회풍조를 만들어 당시 국가 전체에 문(文)을 중시하는 풍조가 성행하였다.

송대를 불교의 쇠퇴기라고 보는 견해는 최근 들어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송대는 불교의 융성기였으며 오히려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후반부터 송의 개국에 이르기까지 불교에 가해진 탄압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842~845년 사이의 불교 탄압으로 중국 전역에서 사찰과 성지가 폐쇄되고 사원전은 몰수되고 승려들이 환속 당했다. 불교는 당 무종의 회창법난(會昌法難·854년)과 후주 세종 때 일어났던 대규모의 불교탄압, 그리고 오대의 혼란을 거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안사의 난 이후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변화로 인하여 불교 전래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불교에 대한 비판이 종전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불교를 중국 문명의 필수요소로 여겼던 관념도 도전받았다.

하지만 송대 통치자들은 불교의 정치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불교를 일방적으로 배척하지 않고 통치에 적절히 이용했다. 휘종과 흠종을 제외한 역대 황제들은 유교만 존중한 것이 아니라 삼교병용정책을 추진했다. 태조, 태종, 진종은 ‘개보장(開寶藏)’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 등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역경원을 지어 역경 사업을 지원하고 사찰을 짓고 탑을 중수하는 데 아낌없이 지원했다. ‘송사(宋史)’ 태조기(太祖紀)에는 건덕(乾德) 4년(966) 행근(行勤) 등 157명의 승려를 서역으로 파견했으며 각자에게 3만전을 지급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정부가 유학생을 파견한 일은 불교사뿐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초유의 일이다. 그 때 보낸 유학생 수도 역대로 가장 많았다.

북송시대에 사원과 승려의 수는 당대보다 증가했다. 불교의 중심이 강북지역에서 오대의 민(閩)지역이었던 강남의 양절(兩浙), 복건(福建)으로 옮겨졌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오대의 전란 와중에 살아남았던 선종이 독보적인 지위를 얻었다. 천태(天台), 화엄(華嚴) 등의 교학도 송대에 존속했지만, 그것은 당대의 교설을 조술(祖述)하고 훈고적인 주석을 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정토교와 더불어 도교 등의 민간신앙에 습합된 불교신앙이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서민들 사이에 널리 침투하여 서민화가 된 불교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명대 이후 서민불교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당의 현종부터 시작되는 황제탄신절의 축수, 국기(國忌)의 행향(行香) 등이 국가적 연중행사로 정착되어, 사대부 관료는 그가 비록 배불론자라 할지라도 이 날은 불사(佛寺)와 도관(道觀)에 참배하고 재초(齋醮)의 문(文)을 바치고 불상 앞에 향을 피우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장송(葬送)과 선조의 추천(推薦) 의식도 대개 불교식으로 행해지는 등 불교는 도교와 함께 공적인 삶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일반 서민들의 사적인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였다. 그러나 남송 이후 국가적인 교단 규제책과 사대부의 불교비판으로 인하여 승단이 위축되고 승려의 수도 북송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황실의 지원이 황족 개인의 신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불교 정책은 항상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황제 독재를 확립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승려의 증가는 생산 인구의 상실을 의미했으며 승려의 과역(課役) 면제특권과 광대한 장원의 소유, 과도한 사탑의 건립은 국가재정을 좀먹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사원은 귀족들이 재산을 은닉하고 농민들이 국가의 지나친 노역을 피해 숨어들어가는 곳이며 관헌에 쫓기는 범죄자의 은거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위진남북조 이래 국가는 불교를 보호하는 한편, 승단의 팽창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구했다. 그 하나는 승려의 득도(得度)를 규제하는 도첩(度牒)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원의 창건을 금하는 조치였지만 당대까지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 부르는 강압적 폐불정책이 행해졌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복교 후에 오히려 그 세력이 증대된 것도 그만한 사회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송대에 들어서면서 불교 교단을 규제하는 제도가 정비되었는데, 칙액하사(勅額下賜·황제가 직접 쓴 편액을 하사) 제도와 도첩발행 제도에 대한 세밀한 규정이 만들어졌으며 승려들은 모두 중앙, 지방의 관청에 등록되고 등록되지 않는 자는 사암(私庵), 사도승(私度僧)으로서 강제로 환속 당했다. 신종(神宗)은 재정난을 타개하는 방책으로 공명도첩(空名度牒)을 팔기 시작했다. 이 정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교단에 대한 통제가 구석구석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송조의 불교 통제정책은 종전의 폐불 정책과 같이 강경수단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승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힘을 재정, 사회복지 등에 이용하는 현실적인 대책이며, 규제와 이용을 병행하여 그 세력을 축소시켜 가면서 불교 교단의 세력을 국가의 통제 아래 묶어두려고 했던 것이다.

당말 오대에 제도권 밖에서 성장했던 선종은 송대의 종교정책에 따라 점차 국가체제 속으로 편입되었다. 삼교융합은 학술 발전의 필연적 추세였을 뿐 아니라 통치계급의 절박한 요청이었다. 송대 정치, 경제 및 의식 형태 방면의 특징이 직접 간접 모두 불교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송대 황제는 당대 황제들이 외래 불교를 중시했던 것과 달리, 선종을 중시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무엇보다 서역으로부터의 불교 전적의 수입이 수·당대와 같지 않아서 밀교 계통 경전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송이 추구했던 문화적 방향에 이질적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서역 불교의 수입이 중국 불교 발전에 영향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송대 제왕은 외래 불교를 중시하던 데에서 본국의 불교, 특히 중국 불교의 주류인 선종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 경향은 북송 멸망 후에도 이어졌다.

남송의 정치 중심도 선종이 흥성했던 지역이었으며 선승을 저명한 대사원으로 불러 주지를 맡게 한 이외에도 항상 저명한 선사를 궁전에 초빙하여 선과 도를 논했다. 특히 효종황제는 선승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이처럼 송 왕조와 불교의 관계는 밀접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승려들을 동원하여 재정곤란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53호 / 2016년 7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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