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 선과 시는 어떻게 닮았는가?

기자명 명법 스님

논리적 사유보다 직관 중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 일치

▲ 진홍수, 서원아집도-6 (권), 41.7 x 429, 명, 고궁박물관.

선종이 남긴 수많은 전적들을 보면, 선과 문자의 관계는 복잡하며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문자를 부정했으며 다른 한편 문자를 긍정했다. 당나라 말기에서 오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국문명 전반은 침체일로를 걷는 가운데 시단 역시 쇠락했다. 그 와중에도 뛰어난 선시가 창작된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그것은 선의 흥기가 시의 창작을 크게 고무시킨 결과라고 짐작되는데, 선종의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모토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승들이 시를 창작하고 애호했다.

선종의 불립문자 전통에도
시로써 격외의 도리 드러내

상식 거슬러 도리 부합은
선과 시의 공통 추구사항

당말 시단 쇠락 아픔 딛고
송대, 선 흥기 선시 일어나

선시의 수사학적 특징들
송대 이후 예술에 큰 영향

“시승(詩僧)”이란 개념은 조사선이 크게 흥성한 중당시기부터 나타났다. 이 개념은 교연의 ‘수별양양시승소미(酬別襄陽詩僧少微)’라는 시에 처음 등장하는데, 시를 짓는 일은 여습(餘習), 즉 고쳐지지 않고 남아있는 습관이거나 불교 밖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본분사를 수행하면서도 시를 창작할 수 있고 그래서 시를 짓는 일은 참선수행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시를 짓는 습에 물들어 시작에 집착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그 경우 시격은 높지만 승격은 낮다고 비판받았다.

선시에 나타나는 특유의 풍격을 ‘소순기(蔬筍氣)’, ‘산함기(酸餡氣)’, ‘채기(菜氣)’, ‘발우기(缽盂氣)’ 또는 ‘납기(衲氣)’라고 하는데, 시승들의 시가 홍진(紅塵)의 속기(俗氣)를 떨쳐버린 초세속적이고 초공리적인 맑고 심원한 선승 특유의 풍격을 보여준다. 선시의 이러한 풍격은 당시 유명한 사찰이 모두 명산에 위치하고 있어 행각하면서 참학하는 것이 선승들의 일반적인 수행풍조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선종사원의 지리적 환경 및 실천 수행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농선(農禪) 등의 영향으로 자연은 선종의 실천수행과 깨달음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선종이 자연을 미적 대상으로 향수했던 것만은 아니다. 선시는 초세속적 이미지와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푸르고 푸른 대나무가 다 진여이며 울창한 누른 국화가 반야 아님이 없다”는 선적 깨달음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선종은 해탈에 대한 담론을 폐기시키지 않고 그것을 깨달음의 경험으로 변형시켰다. 순수 직관은 개념적 규정을 거부하고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어떠한 형상화도 거부하지만 동시에 모든 형상화에 길을 열어준다. 선종에서 주장한 ‘불립문자’는 바로 이 직관이 개념적 규정성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며 그럼에도 다시 ‘불립문자’를 주장했던 것은 이 직관이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때 언어는 개념적 규정을 초월하는 성격을 띠기 때문에 의미론적 관계를 거부하는 모순과 역설로서 나타나며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즉 언어는 직관을 형상화하기 때문에 의미론적 언어 사용을 배제하게 되는데 이런 언어의 이미지는 직관적이므로 시각적 청각적 현량(現量)의 즉자성이 강조되며 그 즉자성은 마음 자체를 반조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이미지들은 마음 자체에 대한 깨달음, 즉 ‘묘오(妙悟)’를 가져다준다. 의경은 언어를 통해 형상화되지만 언어의 경계를 초월하는 역설적인 것이며, ‘상외지상(象外之象)’ ‘언외지의(言外之意)’는 모두 이런 역설을 표시하는 개념들이다.

선은 비이성적 직각 체험, 순간적 돈오, 이심전심, 불립문자, 함축적·임기적 활참을 특징으로 하는 점에서 형상적 함축과 운율을 생명으로 하는 시학과 유사한 면이 많이 있다. 이런 유사성으로 인해 ‘시를 배우기를 선을 하듯이 하라(學詩如參禪)’는 주장과 시선일률론(詩禪一律論)이 제기되었다.

시와 선의 일치점은 많은 연구자들이 주목했던 주제인데, 황영무(黃永武)는 시와 선이 서로 같은 점이 직관과 별취, 상징적 언어, 쌍관어(雙關語), 비유법, 새로운 입장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현실을 초탈하려는 자세, 언외지지(言外之志), 묘오, 평범한 일상성의 중시, 정해진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에 있다고 보았다. 거짜우꽝은 시와 선의 일치점을, 구상면에서는 관조와 명상을 통해 이루어지고, 감상 면에서는 활참(活參)과 돈오(頓悟)를 중시하며, 표현 면에서는 자연스러움과 간결함, 함축미가 나타난다는 점을 들어 양자가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쩌우위제는 시선상통(詩禪相通)의 내재 기제를 가치취향의 비공리성, 사유방식의 비분석성, 언어표현의 비논리성, 주관성의 긍정과 표현으로 특징지었는데, 그는 가치취향의 비공리성을 논하면서 선에서는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난 자유를 추구하는데 이러한 비공리성이 시에서 세계를 비공리적인 심미대상으로 파악하는 태도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국내 연구자 중에서 박석은 시와 선의 일치점이 묘오와 언어의 함축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묘오는 직관적 사유방식을 통해 얻어지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현묘한 깨달음을 말하며, 언어의 함축미는 묘오를 표현하는 방식과 관련된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논의는 시와 선의 일치를 다각도로 이해하였는데, 송시의 수사학적 특징이 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선종의 공안이 상식에 반하면서 도리에 부합하는 것이듯이, 시인의 상식을 뒤집음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반상합도(反常合道)도 상상을 통해 기발한 정취에 몰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간곡한’ 감정을 가지게 하므로 재삼 음미하여도 여전히 여운을 남기게 된다. 당송시대 참선인의 시들은 이념을 담으면서도 시의 정취를 이룸으로써 사물을 표현하여 이치를, 사물을 빌어 이면의 뜻을, 유한으로써 무한을, 형이하로써 형이상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 선시는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정취로써 사람을 감동시킨다. 중국 청(淸)대 오교(吳喬)가 “동파가 말하기를 ‘시는 기취를 으뜸으로 삼고 상식에 반하면서 도리에 부합되는 것을 귀취(歸趣)로 삼는다’ 하니, 그 말이 가장 적절하다. 귀취가 없으면 어떻게 시라 말할 수 있겠는가. 상식에 반하면서도 도리에 부합되지 않으면 이는 정신없는 이야기이며, 상식에 반하지 않고 오로지 도리에 부합하면 그것은 곧 문장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선종은 논리적 사유보다 직관을 중시한 점에서 시의 특징과 일치한다. 선종의 언어 사용은 역설적이며 직관적이며 또한 함축적이다. 문자를 부정하면서도 문자를 사용하는 이율배반으로 인해 선가의 언어는 언어의 외연적 의미보다 언어가 일으키는 정서적 반응, 이미지적 반응 내지는 연상적 반응 등이 일으키는 내연적 의미가 더 중시되었다.

시 역시 하나로써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나타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이해하고 감동 받아 시구 밖에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시는 이치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정취를 가지고 있는 것이 고귀하다. 심덕잠(沈德潛)이 “시는 선리(禪理)와 선취(禪趣)가 있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지 선어(禪語)가 있다고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선의 이념을 담고 있으면서도 여운이 넘치는 시야말로 선취시를 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선시는 특히 송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송대 초기 약 60년간 백체(白體), 만당체(晩唐體), 서곤체(西崑體)가 시단을 장악했을 때 구승시(九僧詩)는 이 세 가지 시체를 중개했으며, 새로운 송시의 풍격을 일으키는 매개 역할을 했다. 구승시에 대한 기록이 처음 수록된 것은 구양수의 ‘육일시화(六日詩話)’이다. “국조의 승려가 시로 세상에 이름을 낸 사람이 아홉 사람이므로 당시 시집이 있어 ‘구승시(九僧詩)’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혜숭이며 나머지 여덟 사람은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 시집은 이미 없어져서 요즘 사람들은 이른바 ‘구승’이란 말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한탄할 일이다.”

구양수의 기록에 대하여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구양공이 ‘구승시집이 이미 없어졌다’고 말했는데, 원풍 원년 가을 내가 만안산(萬安山) 옥천사(玉泉寺)에 갔을 때 진사 민교여(閔交如)의 집에서 그것을 얻었다. 이른바 구승시란 검남희주(劍南希晝), 금화보섬(金華保暹), 남월문조(南越文兆), 천태행조(天台行肇), 옥주간장(沃州簡長), 귀성유봉(貴城惟鳳), 회남혜숭(淮南惠崇), 강남우소(江南宇昭), 아미회고(峨眉懷古)이다. 직소문관(直昭文官) 진충(陳充)이 묶어 서문을 썼으며 그 아름다움은 단지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여러 시구일 뿐이다.” 산림구학(山林丘壑)은 사원 도량과 승심(僧心)의 소재처였기 때문에 자연은 선승들의 시에 주된 제재가 되었으므로 구승시에 산(山), 수(水), 풍(風), 운(雲) 등의 글자가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감수성은 중국인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선종적 직관 방식은 당대(唐代) 이후 중국미학과 예술에 대하여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당시 예술이 지향하는 세계와 선이 지향하는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자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시선일치(詩禪一致)’의 주장과 ‘의경’ 개념을 발생시켰다. 그러므로 중당 이후 중국예술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종의 영향을 확인해보아야 한다. 

명법 스님 myeongbeop@gmail.com

 [1351호 / 2016년 7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