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살의 그리스 청년.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9월 어느 날 늦은 오후 자살을 하려고 강으로 나갔습니다. 몇 해 전까지는 그래도 사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조국을 침략한 나치독일에게 저항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지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철도역을 폭파하고,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려 지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지냈어도 그는 불의를 거부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굳은 마음 하나로 버텼습니다. 마침내 나치독일은 물러갔고 청년의 조국은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그리던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모든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 먹을 것을 주는 세상… 그러나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어… 가졌던 희망은 한낱 물거품이 되고… 환멸만이… 지금은 나도 환멸을 느끼는 사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선을 타고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구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4백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865년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흑인=노예’가 아니게 되었지만, 백인들의 뇌리에는 ‘흑인이란 도덕심도 없고, 수치심도 모르며, 아무데서나 성교를 해대는 동물 같은 존재이기에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식이 너무나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959년 10월28일 마흔 살의 백인 남자 존 하워드 그리핀은 남부 흑인의 자살이 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난 뒤 차별당하며 살아가는 자의 느낌이 어떤지 알고 싶어졌습니다.‘백인이 남부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태국은 불교국가입니다. 6천만 명이 넘은 전체 인구 가운데 약 95% 가까운 사람들이 불교신자입니다. 그리고 물가가 저렴하고 멋진 휴양지도 있어서 사람들을 기분 좋게 이완시킵니다. 그래서 수많은 각국의 여행객들은 사찰순례도 하고 해변가에서 여유를 부리거나 카오산 로드 같은 해방구에서 잠시 일탈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심이 깊은 나라 태국이 관광지로 환영받는 데에는 매춘이 큰 역할을 차지합니다. 태국에는 50만 명에서 약 100만 명의 매춘여성들이 있으며 아주 쉽게 성매매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 세계 남성들이 몰려든다고 합니다. 태국에서 이렇게 매춘이 ‘성업(!)’인 가장 큰 이유는 가난입니다. 농촌 가정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지 못하고 큰돈을 만지지 못합니다. 죽도록 일해도
버스를 타고 지나다 무심코 차창 밖을 내다보는데 참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인파’나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바라보면 뭐 그리 의미 있는 존재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중’이라는 묶음을 풀어서 한 개인 개인을 짚어보다가 그들의 묘한 존재감이 느껴졌고, 그 느낌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 목숨이 대체 왜 소중하다는 건가?”왜 소중하냐고?그건, 살아있으니까.너무 진부한 문답인가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그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는 목숨이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지구에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가장 귀한 존재이며 무조건 살려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
흑백 사진 속의 남자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더부룩한 이 남자는 촛불 한 자루를 켜놓고 서류인 듯 보이는 것을 읽고 있습니다. 눈은 긴장된 채 크게 열려 있는데, 진지하고 골똘하게 서류 읽기에 몰입해 있는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배경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두루마리가 한쪽 벽에 잔뜩 쌓여 있고 얼핏 보아도 뭔가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높이 쌓인 두루마리 위로는 희미하게 나뭇가지 그림이 그려진 벽이 보입니다. 20세기 초엽에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가 중국 돈황 막고굴에 들어가 3주간에 걸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문헌들을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이 낡은 흑백 사진 한 장만 보자면 이 젊은 남자의 몰입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중국의 입장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은 18,9세기 흑인노예들이 정착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풍광이 아름답고 여느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비옥한 곳인데다 다이아몬드 산지인 이 나라는 어쩌면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이권을 노리는 반군들의 잔인한 학살과 그에 맞선 정부군의 공격, 어지러운 정치판과 쿠데타로 이제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비극의 땅으로 전락했습니다. 업라인(수도 프리타운에서 그 나라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이나 풍속들을 일컫는 말) 사람들은 반군과 정부군에게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었습니다. 통신시설을 갖추지 못한 오지 사람들은 간간이 들려오는 총성에 불안해하면서도 삶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순식간에 반군들의 기습으로 평화롭던 마을은 그야말
뭄바이를 돌아다니다 잠시 들어간 커피전문점에는 여학생들 몇이 커피와 작은 케이크를 사먹으며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리창 밖에는 굶주린 기색의 소년이 가게 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해맑게 재잘거리는 고운 소녀들과 남루하기 짝이 없는 소년 사이에 앉아서 유리창 안쪽이 진짜 인도인지, 유리창 바깥이 진짜 인도인지 정말로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뭄바이의 세련된 커피전문점 바깥에 서 있던 남루한 소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 소설입니다. 12월25일 수녀원 정문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에게는 ‘람 모하마드 토마스’라는 심난한 이름이 붙여집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 흔적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종교백화점 인도답게 붙여진 이름이지만 정작
16세기 스위스 제네바를 거머쥔 칼뱅은 그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구교의 교황이나 황제보다 더 무시무시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였습니다. 그가 숨을 토해내면 온 도시가 회색빛으로 가라앉았고, 그가 도리질을 하면 광장의 화형대에서 시민들이 불태워졌습니다. 그러다 칼뱅의 종교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 어느 신학자가 산채로 화형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펜으로 다른 견해를 펼쳤을 뿐인데 하늘 아래 ‘자기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는 칼뱅은 종교권력의 힘으로 그를 살해하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서재의 문을 닫고 그 안에서 탄식했을 뿐” 아무도 앞에 나서지 못할 때 오직 한 사람, 카스텔리오만이 외쳤습니다. “한 인간을 불태워 죽인 일은 이념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살해한 것이다.”이
불황의 골이 깊다고들 말합니다.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상인들이 하소연합니다. 경기침체의 원인은 다각도에서 살필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딱 부러지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는데 이 책 의 저자가 단번에 깔끔하게 정리해주었습니다. “원래 불황이란 물건이 팔리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물건이 팔리지 않게 되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게 되었을까? 그것은 살 필요가 없고, 사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살 필요가 없고, 사고 싶은 것이 없을까? 그것은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25-126쪽) 절대적인 빈곤과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숨을 거두는 순간에 “지금 들어가야겠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말했고, 헨리 데이빗 소로는 임종 시에 그의 이모가 “죽기 전에 하느님과 화해해라”고 말하자 “내가 언제 하느님과 싸웠는데?”라며 반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탐욕과 위선에 대해 “끔찍하다, 끔찍해”라고 중얼거리며 숨을 거둔 조셉 콘래드의 주인공 커르츠의 말은 고(故) 장영희 교수가 영미 문학작품 속에서 가장 유명한 유언일 것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83쪽 요약인용) 저자인 고인은 문인들과 작품 속 주인공들의 마지막 말을 소개하고는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이 있는’ 삶, 사랑이 있는 삶을 나는 매일 쓸데없는 말,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 진실
몇 해 전 ‘낙태’와 관련한 한 세미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이 낙태의 실태와 그 폐해에 대한 다양한 사례 및 연구결과를 보고하더니 “타종교계는 낙태 불가 입장이다. 그러니 불교계도 입장을 정리해서 발표하길 바란다”라고 주문했습니다. 불교계의 입장이라... 세상 어느 종교가 생명을 경시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 낙태를 잘하는 일이라고 권장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하지만 설령 부처님이 낙태에 대해 옳지 않다고 규정했다고 해서 정작 이 문제에 봉착한 임산부에게 “경전에서 이렇게 말했으니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확인시켜 주신 분입니다. 즉, 자기 문제를 자기 입장에서 자기 머리와 가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한다.”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뮬러의 이 일갈(一喝)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부딪치거나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교를 갖고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막스 뮬러의 주장은 사실 쓸데없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건 종교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몇 해 전 지하철에서 일어난 일을 떠올려보면 막스 뮬러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내 옆자리에 앉은 어떤 여성이 말을 걸어왔을 때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 여성은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신앙을 갖고 계세요?”“네.” 무슨 이야기를 나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