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읽기] 불쾌하기 짝이 없는 돈황 이야기
[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읽기] 불쾌하기 짝이 없는 돈황 이야기
  • 법보신문
  • 승인 2009.07.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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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 속의 남자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더부룩한 이 남자는 촛불 한 자루를 켜놓고 서류인 듯 보이는 것을 읽고 있습니다.
눈은 긴장된 채 크게 열려 있는데, 진지하고 골똘하게 서류 읽기에 몰입해 있는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배경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두루마리가 한쪽 벽에 잔뜩 쌓여 있고 얼핏 보아도 뭔가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높이 쌓인 두루마리 위로는 희미하게 나뭇가지 그림이 그려진 벽이 보입니다.

20세기 초엽에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가 중국 돈황 막고굴에 들어가 3주간에 걸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문헌들을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이 낡은 흑백 사진 한 장만 보자면 이 젊은 남자의 몰입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유쾌하지 못한 장면입니다. 그야말로 이 남자는 ‘물 건너온 귀신(洋鬼子)’이기 때문입니다.
모래도시 돈황의 막고굴에 숨겨져 있던 문헌들과 벽화들은 가장 먼저 영국 탐험가 스타인이 은화 몇 푼을 던져주고 가져갔고, 한문에 능통한 펠리오가 역시나 은화 몇 푼을 주고 중요한 문헌들 위주로 쏙쏙 빼갔으며, 뒤늦게 찾아온 미국과 일본의 탐험가들이 남은 것들을 닥치는 대로 거둬갔습니다.

그들의 은화 시주금을 받고 잠시나마 횡재한 기분에 사로잡혔을 사람은 굴을 관리하던 도사(道士) 왕원록(王元祿)입니다. 중국은 뒤늦게 ‘서양의 귀신’들이 자기들의 귀한 문화재를 빼돌리는 중임을 알아차리고 부랴부랴 돈황의 문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숱한 중국 관리들과 운반병들이 소매 속에 훔쳐내었는지 미지수입니다.

일본제국주의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의 작가 마쓰오카 유즈루의 <돈황 이야기>는 외국 탐험가들이 문맹인 데다 돈을 밝히는 중국인 왕도사를 어떻게 회유하고 설득하고 협박해서 돈황의 유물들을 빼내었는지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일본 내에서 돈황이나 서역과 관련해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뒤 반가운 마음에 읽기 시작한 나는 차츰 지독한 불쾌감에 사로잡혀 갔습니다.

이 소설의 요지는, 무지몽매한 중국인의 손에 저 보물이 남아 있었다가는 지금쯤 먼지조각이 되어버렸을 것이요, 불교와 동양문화에 대해 무자비한 서양인들의 손에 넘어가느니, 같은 문화권이요 불심 돈독한 젊은 일본인의 손에 넘어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인류역사를 위해서 가장 훌륭한 수순이 아니겠냐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약탈국들이 구차하고 뻔뻔한 자기변명을 더 이상 늘어놓지 않게 하려면 똑똑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것을 빼앗기고도 ‘니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아?’라는 손가락질을 후손들이 두고두고 받게 될 것이니까요.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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