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하얘졌습니다. 법당과 요사채 기와지붕도, 마당 나무들도 소복소복 눈을 이고 섰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빨간 연등은 큼직한 산딸기를 빼닮았습니다. 도시에 내리는 눈은 천덕꾸러기라지만 산사의 눈은 다릅니다. 슬쩍 우리의 본래면목 보여주듯 티 없이 맑은 세상을 펼쳐냅니다.선어록에도 종종 눈이 등장합니다. 혜가 스님이 숭산의 달마대사를 찾아가 싹둑 팔을 잘라 내려놓은 날 펄펄 눈이 내렸다지요. 원나라 선승 허주 스님의 “눈이 천산(千山)을 덮었는데 왜 한 봉오리만 희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몽산 스님이 “별천지이지요”라는 답변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절에 다니는 불자라면 사홍서원(四弘誓願)이 익숙할 것이다. 불교 행사 대부분 삼귀의로 시작해 사홍서원으로 마무리한다. 한때 어느 단체에서는 사홍서원이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구체적인 서원으로 바꿔야 한다고 비판했다. 전 세계 70억 인류와 수많은 생명체를 아우르는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의구심은 당연할 수 있다. 또 찰나찰나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어찌 다 다스릴 것이며, 초기불교를 비롯해 부파·중관·유식·화엄·법화·밀교·
부산 금정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금정총림 범어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10대 화엄사찰 중 하나다. 근대기 한국 선의 중흥조 경허 스님이 머무르며 수많은 선지식을 양성했던 선찰대본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종사 여산정여(如山正如) 스님은 지난해 10월 말 범어사 산중총회에서 금정총림을 이끌 새로운 방장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됐고, 11월 1일 조계종 중앙종회 인준을 거쳤다.범어사에서 벽파 스님을 은사로 산문에 든 정여 스님은 지난 50여 년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아왔다. 스님은 순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사바세계라고 말한다. 괴로움과 힘겨움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고통의 바다에서 편히 쉴 수 있는 안전한 섬과 같다고 했다. 대전 정림동에 사는 김동우(48) 불자도 어려운 시기에 섬과 같은 불법을 만났다.지난해 겨울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장기의 한 부분이 굳어가는 병이 이미 깊어졌음을 발견했다. 병원에서는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오래전 폭우에 개미집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부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주변에 힘들어하는 분을 보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에게 법보시를 하는 것도 좋은 인연을 맺어주는 일이라 생각합니다.”수원시 권선구에 거주하는 이경희(지혜심·64) 불자가 법보신문을 교도소·군법당·병원법당·공공기관 등에 보내는 법보시 캠페인에 동참했다. 그는 “불교를 공부하면 자연스럽게 나를 낮추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며 “불자로서 늘 기도하고 나누고 배려하는 마음 자세를 잊지 않으려 한다”라고 말했다.맑은 미소의
‘부처님의 자비광명 맑고 그윽한 범종소리/ 위로는 천상에 이르고 아래로는 무간지옥까지 닿아/ 고해마다 한 중생의 희망의 빛이요/ 고통을 쉬게 하는 한줄기 감로수며/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수승한 법문이어라.’부처님이 탄생한 네팔 룸비니에 세상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북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참화가 잇따르는 가운데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 불자들의 간절한 서원이 담긴 종소리였다.서울 노원구 수락산 도안사가 주최하고 (사)108산사순례기도회와 네팔 룸비니 개발위원회가 공동주관한 평화를 기
스토리텔링은 재미와 정보 전달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하며, 관점 전환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낸다. 또 복잡한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하고, 등장인물의 경험과 가치를 공유하도록 한다.옛 불교인들은 스토리텔링이 사람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잡보장경’은 2200여년 전 성립된 경전으로 ‘현우경’ ‘찬집백연경’과 함께 불교설화 비유문학의 3대 걸작으로 불린다. 부처님 전생 이야기인 ‘
전국 선원에서 40안거를 지낸 수행자이면서 교학에도 밝아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을 지낸 하청연관(河淸然觀) 스님. 지난해 4월 ‘만선동귀집강의’ 편집 교정을 마칠 때까지도 스님의 세연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누구도 몰랐다. 병원을 찾았을 때 암은 퍼질 대로 퍼져 말기로 치닫고 있었다. 황망한 소식에 지인들은 항암치료를 권했으나 스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곡기를 끊고 물과 차만 마시다가 그해 6월15일 정토에 들었다.이 책은 스님이 마지막 생명을 불살라가며 완성한 유작이다. 생전 스님은 미륵불의 화현이라 추앙받던 당나라 영명연수 스
“법보신문은 정론과 직설을 중시하는 불교계의 중요한 언론이지요. 그렇기에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이 났습니다. 종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부대중의 의견을 수렴하고, 불자들이 가야 할 바른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지요. 1994년 개혁종단이 탄생할 때나 최근 가톨릭 교단에서 광화문 일대를 성지화하려는 계획을 저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이 최근 법보신문을 교도소·군법당·병원법당·공공기관 등에 보내는 법보시 캠페인에 동참했다. 김 위원은 법보신문과의 인연도 깊다. 2006년 5월
불교는 1700여년간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해오며 수많은 얘기를 만들어 냈다. 그 얘기들이 설화가 되고 문학이 되고 우리의 정서가 됐다. 불교문학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는 한결 풍성해지고 다채로운 색채를 지닐 수 있었다. 그런데 불교문학에 대한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불교문학이란 교리 해설이나 포교를 위한 기능적 담론에 불과하다는 편견 때문이다.이때 불교문학에 뛰어든 이가 김승호 동국대 명예교수다. 저자는 우연히 접한 승전(僧傳) 연구를 계기로 불교문학에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30여년간 연구를 이어오며 숱한 논
선원빈 국장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인간적으로는 더없이 너그럽지만 언론인으로서는 칼날처럼 매서웠다고 기억한다. 선 국장이 왕생한 다음해인 1994년 12월 출간된 ‘솔바람 소리를 듣던 사람 선원빈’(불지사)에서 지인들은 그를 이렇게 추억했다.“일생을 불교에 대한 애정으로 불교의 장래를 걱정했던 선원빈 거사는 천년 고찰을 지켜온 소나무처럼 열정과 냉철한 비판과 정확한 논리, 웅대한 안목으로 불교 언론을 이끌어온 수장이었다.”(전 직지사 주지 법등 스님) “내가 인연을 가졌던 인물을 회고해 보는 일이 가끔 있다. 그러면 경전(耕田, 선
‘이제 돌이켜보건대 23년 동안 오직 한 길만의 불교언론에의 길이 당신의 생애를 다한 길이었습니다. 어찌 그렇게도 심심산천에서 금방 내려온 순정입니까? 어찌 그렇게도 깊은 땅속에서 솟아난 단단한 뿌리를 가진 마을의 당산 나무였습니까? 그런 당신의 넉넉한 시절 인연을 어디 가서 찾아야 합니까? 나도 그렇고 우리 불교언론의 젊은 식구들 모두, 당신의 큰 눈동자 하나씩 받들어 눈물 가득히 서천의 여래 곁에 노니는 당신을 오래도록 추모할 따름입니다. 부디 잘 가소서. 선 국장 영가이시여!’(고은 시인의 추도사 중)1993년 10월29일 서
‘…법보신문은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삼천대천세계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고자 태어났다. 저 해와 같은 광명을 빌어 무량의 소리를 담은 목탁을 깎았다. 잠들지 않고 쉬지 않고 게으르지 않으며 굽힘이 없고 쓰러짐이 없고 부서짐이 없는 목탁을 만들었다. 둥그나 모나지 않고 곧으나 삐뚤어짐이 없으며 아무리 써도 닳지 않는 샘물처럼 넘치는 목탁을 빚었다.…’(월산 스님 창간사 일부)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은 법보신문 초대 발행인으로 명확한 불교언론의 방향을 제시했다. 스님이 직접 쓴 창간사는 원고지 7매 분량으로
김강유 (주)김영사 회장이 10월1일 왕생했다. 향년 76세.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35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0월3일 오전 8시다.1947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성균관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를 수료했다. 특히 1970년 가을 동국대 총장을 지낸 백성욱 박사를 찾아뵙고 사사한 것을 계기로 일생 불자의 길을 걸어왔다. 1976년 도서출판 김영사를 설립했으며, ‘행복한 공부’ ‘행복한 마음’ 등을 비롯해 2021년에는 백성욱 박사 전집(전 6권)을 펴내기도 했다.지난해 5월 재단법인 여시관을
성림당 월산 스님(聖林月山, 1913~1997)은 한국불교의 중흥을 이끈 고승이다. 금오태전 선사(金烏太田, 1896~1968)의 법을 이어 간화선을 진작시키고 선원과 강원을 개원해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법주사, 신흥사, 동화사, 불국사 등 교구본사 주지를 맡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혼탁해진 사찰을 일신해나갔다. 총무원장·종회의장·원로회의 의장 등 조계종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종단의 기틀을 세웠고 한국불교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이와 함께 스님의 뚜렷한 업적의 하나가 법보신문 창간이다.스님은 화두를 깨친 선의 종장이
1년 전, 조계종 제37대 총무원장에 취임한 진우 스님은 “진심(盡心)으로 소통하고, 신심(信心)으로 포교하며, 공심(公心)으로 불교중흥의 새 역사를 열겠다”며 “부처님의 제자로서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자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중들에게 약속했다.이후 매일 새벽 조계사에서 108배로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대통령에서 소외이웃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조언했으며 진심어린 위로를 건넸다. 스님은 권위를 내려놓되 위의를 잃지 않았고, 진중함을 고집하지 않되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도 좋을 삶의 지혜를 들려
백중을 일주일 앞둔 8월23일, 경기도 용인에 사는 장윤정(대일황·50) 불자는 그날도 ‘법화경’을 사경하고 있었다. 사경을 할 때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불보살님이 곁에서 지켜주는 것 같았다. 직접 사업체를 운영하고, 집안일에 횡성 성덕사 총무 업무까지 담당하고 있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지만 어떻게든 1년 안에 ‘법화경’ 사경을 회향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일정한 시간을 내기 어려웠기에 직장과 집에서 짬짬이 대학 노트에 정성껏 경전을 썼다.그렇게 1년여 만에 ‘법화경’ 사경을 회향할 수 있었고 남은 대학 노트 뒷부분에 옴마니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스님은 1500여년 중국 선종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임제 스님이 고함[喝]으로, 덕산 스님이 몽둥이[棒]로 사람들의 무명을 타파했다면 조주 스님은 언구로 죽이고 살리는 살활자재(殺活自在)의 묘용을 발휘한 선사로 유명하다.‘고불(古佛)’로 불렸던 조주 스님은 “원래의 부처(元古佛)도 진짜 부처(眞古佛)인 조주 스님에게 고개 숙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선의 경지가 출중했다. 지금도 선방 수좌들의 바랑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공안집인 ‘벽암록’ 100칙 중 조주 스님 관련 공안이 12칙이 실려
박창환 금강대 불교학부 교수가 9월2일 별세했다. 향년 56세. 빈소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연세대 강남장례식장 3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9월4일 오전 6시, 장지는 경남 함양 선영이다.박 교수는 아비달마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문헌학자였다. 불교원전 언어인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한문을 비롯해 영어, 일어, 독어, 불어에도 능한 그는 불교문헌 연구의 기본기를 탄탄히 갖춘 학자였다.198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박 교수가 처음부터 불교학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동서양 철학을 두루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불교로 관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화가 나면 공격성을 보이고 말을 함부로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에요.”아이의 반항에 당황스러운 것은 이 엄마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는 왜 그렇게 행동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 법륜 스님은 그 원인이 부모노릇을 포기하고 학부모 노릇에 치중하는 엄마아빠에 있다고 직격한다. 아이가 공부 잘하고 모두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데 급급해 아이를 무한 경쟁으로 내몬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식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