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 깨우는 기도 탑돌이탑 주위 난간이 수호역할한국불교는 의미 잊은 듯 ▲1. 산치 스투파의 아래 지면, 가운데 상층, 꼭대기의 3줄 난간. 지난 호 예고한 탑원굴 발전 과정을 보기위해서는 우선 인도 불탑 스투파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를 알아야겠고, 따라서 예배에 중요한 구조물 난간을 보아야겠다. 여태껏 본대로 둥그런 인도 스투파는 석가모니 유골, 즉 알을 속에 묻은 큰 바깥 항아리로서 ‘알’, 필자 작명 ‘불란(佛卵)’이라고 했다. 기존 불교 오욕의 명칭, 엎어놓은 밥그릇, 복발(覆鉢)이 결코 아니다. 탑파(塔婆)로 한자 음역된 스투파(stupa)는, 인도 싱할리어 ‘다고바(dagoba)’로 스리랑카를 비롯해
인도서 가장 큰 예배 석굴중앙 제일끝 스투파 조성적나라한 조각도 새겨져 ▲1. 카를리 석굴 유적에 붙여 지은 힌두 사원. 예배 행렬. 카를리 석굴은 지난번 본 바자 석굴의 마을 건너편 산 중턱에 있다. 오토릭샤에서 내려 계단을 한참 땀 흘리며 올라갔다. 석굴들이 속세와 떨어지려고 전부 산 중턱에 있다. 우리 석굴암도 지금은 승용차로 코앞까지 가지만 40여년전 고교 수학여행 때 불국사에서부터 가파른 산길을 한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산 중턱에 넓은 평지가 나오는데 먼발치 석굴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마치 돗데기 시장처럼 난리 법석이다. 무슨 일인가 다가 가보니 카를리 석굴 코앞에 가건물식
뭄바이~뿌네 길목 위치마을서 탁발 가능 거리우람한 굴 규모에 감격조성 때 조각 고스란히 바자 석굴은 B.C.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초기의 비교적 규모가 제법 큰 본격적 석굴이다. 바자 석굴은 급성장하는 인도 최대 도시, 영국 식민시대 이름 봄베이, 독립 후 원 이름을 되찾은 뭄바이 항에서 동쪽 대도시 뿌네로 가는 길에 있다. 인도 유일의 명실상부 고속도로, 마치 우리 서울~인천간 고속도로 같은데 다만 높은 재를 만나서 스키 대회전 같이 빙빙 돌아가는 것이 마치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과 비슷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서둘렀으나 출발지를 몰라서 시 외곽 시외버스 정류장→빅토리아 기차역→다시 중앙역→다시 외곽 버스정류장으로 대도시를 가로질러 이리저리 왔다갔다 헤매다가 겨우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거주굴은 한평 남짓홀로 수행하는 공간 우리 절의 원조는 인도 석굴사원이다. 석가모니 제자 출가자, 즉 상가들이 함께 모여 수행하며 우기의 비를 피해 또 혹서기의 무더위를 피해 영구 시설인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산치 같은 평지 사원은 스투파를 가운데 모시고 그 주위 사방에 집단 거주처를 만들었지만, 바위 절벽에 죽 판 석굴은 일렬로 배열될 수밖에 없다. 중간쯤에 스투파 모신 예배굴, 즉 차이탸 굴을 하나 파고 좌우로 거주굴 즉, 비하라들을 여러 개 줄줄이 팠다. 이번에는 우선 거주굴부터 보자. 비하라 굴 하나는 여러 개의 독방들로 구성된다. 작은 굴은 5~6 방, 큰 굴은 30여 방들로 구성된다. 독방 하나 크기는 딱 한 평 남짓이다. 우리 정부에서 수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건물 면적 단위에 평을 못
석굴의 나라 인도에는 총 1200개 석굴이 있다. 그 중 4분의 3이 불교석굴이다. 한 곳에 적으면 10여개, 최대로 도시 외곽에 2백여개의 석굴이 집단으로 모여 있기도 하다. 아소카왕 시대에는 육사외도로 부르는 아지비카교 굴도 있었으나 일부 자인교 굴과 바라문 즉 힌두 굴이 그 나머지다. 석굴을 판다는 것은 말이 쉽지 수행자들이 당시 거의 맨손이나 다름없이 단지 작은 끌과 망치로 암벽을 긁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의 공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굴암, 중국과 연관성 없어 인도 대륙 중부 광활한 고원에 주로 분포하는 석굴은 학계에서 기후 상 몇 달간의 우기를 피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나 필자가 실제 다녀보니 40도를 넘는 무더위에도 굴속에 일단 들어가면 여간 시원한 것이 아니었고, 가
인도는 석굴의 나라다. 물론 석굴사원 중심에는 지금까지의 인도 탑 스투파가 모셔진다. 자, 이제부터 불교 석굴사원 탐방 대장정 여행을 떠나보자. 행선지는 우선 인도 남부 불교 유적지다. 넓은 땅덩어리에서 불교 전파 영역상 남부라고 하지만 인도 지도를 보면 중부의 남쪽 끝에 불과하다. 나가르주나콘다, 아마르바티 유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도 최초의 불교석굴, 그리고 우리 석굴암의 원조 군투팔리 석굴을 보기 위해서다. 안내 20년차도 군투팔리 몰라 ▲1.군투팔리 여행 경로. 2007년 4월3일 새벽 6시45분 델리 중앙역 출발 하이더라바드 행 특급열차에 올랐다. 아침 기상 종에 맞춰놨지만 몇 차례 자다 깨다 밤잠을 완전 설쳤다.
우리가 절을 부르는 몇 개의 이름이 있다. 절을 ‘가람(伽藍)’이라고 한다. 그 유래는 승단 거주처 범어 ‘sangha-arama’의 한자 음역, ‘승가람마(僧伽藍摩)’에서 온 가운데 두 글자라고 잘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베다 시대 후기 브라흐만 즉 범(梵), 대 우주의 절대자 신에 대한 허례 제사보다 근본을 추구하고 체험을 중시하는 우파니샤드 시대에 접어들었다. 불교 잉태 배경이 된 시대정신이었다. 그 시기에, 출가한 자유사상가 사문(sramana, 沙門) 들이 많이 나타나 집단을 이루어 ‘상가(sangha)’라는 생활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불교가 인도에서 지배적 종교가 되면서 ‘상가’는 불교 공동체를 특별히 지칭하게 되었다. ‘아라마(arama)’는 ‘정원이 있는 즐거운 집’, 곧 두 단어를 합친 ‘상가
우리 탑 꼭대기를 ‘상륜부’라 부른다. 학술용어는 물론 전국 탑 문화재 안내판에 어김없이 그리 씌어있다. 바퀴 모양이라는 뜻이다. 유명한 불국사 석가탑 3층 위 꼭대기 상륜부는 오랜 세월 지나 파괴되어 신라의 모양을 전혀 알 수 없던 것을 1973년 복원 공사를 하며 남원 실상사 탑을 모방해 집어넣은, 지금도 횡행하는 엉터리 문화재 복원이다(그림1). 복사 원전으로서 실상사 탑 꼭대기를 보자. 인도 스투파의 축소된 모양이 석탑 위에 올라간다(그림2). 아래로부터 사각상자 ‘노반(露盤)’, 공 모양 ‘불란(佛卵, 오류명칭 복발)’, 꽃모양 ‘앙화(仰花)’와 그 위에 문제의 원반 바퀴 ‘보륜(寶輪)’ 네 개와 ‘보개(寶蓋)’, 그 위의 불꽃 모양
인도선 물 자체가 귀해 물항아리 대신 꽃 활용 스투파는 가득찬 항아리사리알 담는 알과 같아 인류 역사상 그림이 액자 속에 들어가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은 근래의 일이다. 서양화의 원조는 성당 벽화나 천정화였다. 마찬가지로 불교 절집은 사방 안팎 위아래에 그림이 가득하다. 답사를 다니다 간혹 마주치는 스님과 그림 얘기를 나누자면 “그런 건 몰라도 돼” 하는 퉁명스러운 답을 가끔 듣기도 한다. 그림은 문자 보다 더 효율적인 종교 교리를 나타내는 교육적인 수단인데, 안타깝게도 천년 이상의 우리 불교가 흘러내려오면서 원 뜻을 잃어버린 채 그림 문맹이 되고 말았다. 절집에 가면 항아리에 꽃이 가득한 그림을 자주 볼 수 있
껍질 깨져야 새생명 탄생깨달음 얻는 과정과 같아 알모양 용기 조성된 이유사리항아리, 자궁에 비견 ▲6. 연화병머리초 단청에서의 석류동과 항아리 민주점. 울진 불영사. 우리 사리는 대부분 항아리에 들어있다. 탑의 사리는 속 항아리에서부터 바깥 함까지 겹겹으로 고이 모셔져 있다. 금이나 은제 항아리, 혹은 녹색 유리 병(목이 좁고 긴 것을 병이라 한다) 속에 들어있다(그림1, 그림2). 모두 다 당시에는 최고로 귀한 물질이었다. 왜 항아리일까? 인도에서는 물이 귀하다. 몬순기(6~9월)의 여름 몇 달을 제외하고는 가뭄이 심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볼 석굴사원은 반드시 물 저장 수조가 필수다. 또 지하 우물의 깊이와
인도 원어 ‘안다’의 일본식 번역이 ‘복발’사리 묻은 곳에 대한 무례…오류 수정해야 1. 산치 스투파의 일본어 번역 그림. 위에서, 앞에서 본 그림. 오류의 원흉. 2. 탑 꼭대기의 복발. 남원 실상사 탑. 한국에서 탑 연구를 했다하는 책 첫머리에 반드시 들어가 는 그림이 바로 지금까지 본 산치 스투파의 도면이다.(그림1) 인도의 원전 영어권 도면을 근대학문 초기에 일본 학자 누군가가 한자로 번역해 넣은, 오류의 원흉 도면이다. 복발(覆鉢), 기단(基壇), 산개(傘蓋), 평두(平頭), 요도(繞道), 난순(欄栒), 간(竿) 등 쉽지 않은 한자어를 독자들은 일단 그림에서 숨은 글자 찾기를 해보기 바란다. 오류 원인은 두 가지,
▲산치 대 스투파. 울타리 난간으로 둘러싼 둥그런 반구형 돔. 동서남북 4방위의 탑문. 꼭대기에 유골함이 있고 양산으로 고귀함을 표시한다. 부처님이 돌아가셨다. 즉 열반에 드셨다. 제자들이 인도 전통 장례에 따라 장작불에 화장하고 남은 뼈와 재를 항아리에 수습하여 8개 부족이 나누어 가지고 가서 묻고 봉분을 만들었다. 최초 스투파 근본 8탑이다. 전설에 의하면 막강한 통일 군주 아소카왕이 다시 꺼내어 8만4천개로 나누어 전국 방방곡곡에 스투파를 널리 보급하였다.그 숫자를 액면 그대로 믿기보다는 ‘아주 많이’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산치 스투파는 유명한 아소카왕의 돌기둥이 있는 것으로 보아 B.C. 3세기에 처음 설립된 것이다. 산치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