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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군투팔리 석굴과 석굴암

인도 영향 속 신라불교 독창성이 빚은 걸작

석굴의 나라 인도에는 총 1200개 석굴이 있다. 그 중 4분의 3이 불교석굴이다. 한 곳에 적으면 10여개, 최대로 도시 외곽에 2백여개의 석굴이 집단으로 모여 있기도 하다. 아소카왕 시대에는 육사외도로 부르는 아지비카교 굴도 있었으나 일부 자인교 굴과 바라문 즉 힌두 굴이 그 나머지다. 석굴을 판다는 것은 말이 쉽지 수행자들이 당시 거의 맨손이나 다름없이 단지 작은 끌과 망치로 암벽을 긁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의 공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굴암, 중국과 연관성 없어


인도 대륙 중부 광활한 고원에 주로 분포하는 석굴은 학계에서 기후 상 몇 달간의 우기를 피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나 필자가 실제 다녀보니 40도를 넘는 무더위에도 굴속에 일단 들어가면 여간 시원한 것이 아니었고, 가족이나 연인들이 폐허 유적 석굴 속에서 소풍을 즐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피서 또한 중요하였을 것이다.

 

 

▲1. 군투팔리 석굴 입구 외관.

 


고생고생 끝에 찾아간 세계 최초의 불교석굴 군투팔리 석굴은 인도 불교 영역상 동남부인 안드라프라데시 주에 있다. 산언덕 긴 암벽을 따라 스님 거주굴은 수 십 개지만 예배굴은 단 하나 파졌다. 안에 당연히 부처님 몸체를 나타내는 스투파를 모시고 있다. 물론 공사상 덜 파낸 바위 덩어리가 바로 스투파다. 그러니 평지 스투파처럼 속에 사리를 묻을 수 없다. 스투파를 모신 예배당을 ‘차이탸 굴’, 번역하면 ‘탑원굴’이 된다. 석굴 정면에는 인도 석굴사원 외관 등록상표인 뾰족 아치가 조각되어 있다(그림1).

 

 

2. 군투팔리 예배굴 평면. 한 가운데 원형 스투파.  4. 스투파에서 올려다 본 돔 천정.

    앞에 전실.

 


인도 초가집의 박공지붕 뼈대 모양에서 유래한다. 주실은 정확히 둥근 스투파 외곽으로 돌아간 원형 평면이다(그림2). 원형 주실로 들어가기 바로 전에 좁지만 전실을 갖추고 있다. 좁은 전실은 이후 인도 석굴에서 본격적인 전실 베란다로 발전한다. 원형 주실 외벽에 집의 처마처럼 튀어나온 부분도 보인다(그림3). 자세히 보면 벽면 천정면에 온통 파낸 끌 자국 무늬가 이리저리 새겨져 있어 돌의 질감을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가 느껴진다.

 

 

▲3. 전실 공간.

 


주실 천정은 둥근 스투파가 공간상 확장된 둥근 돔 형태다(그림4). 필자는 스투파 꼭대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고귀함을 나타내는 양산이 없는 것은 멸실된 것이 아니라 돔 천정에 새긴 양산살 뼈대가 그대로 큰 양산으로서 덮기 때문이라 해석한다. 석굴의 암석 파내기 구조상 뼈대는 불필요하지만, 과거 원형 초가집의 나무 골조에서 따온 무늬만의 뼈대다.


이쯤에서 독자들도 자연스레 우리의 경주 석굴암을 떠올릴 것이라 본다. 석굴암보다 무려 천 년 앞선 원조 석굴암인 것이다. 가운데 둥근 스투파 대신 불상으로 대입해 넣으면 똑같아진다.


우리는 한국 불교를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당연시 여기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경주 석굴암은 중국 석굴 어디에도 비슷한 유례가 없다. 중국 석굴은 대부분 사각형 평면의 석굴이다. 천정도 군투팔리나 석굴암 같은 궁륭식 돔형은 없다. 중국 석굴은 불상을 보통 뒷벽에 붙여놓지 석굴암처럼 가운데에 두지 않는다.


국사에서 석굴암으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 신라의 독창성을 말한다. 맞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은 암벽을 파낸데 비해 석굴암은 돌을 정교하게 쌓아 돔을 만들고 흙을 덮어 인조 석굴을 만든 것이다. 석굴암은 인도 바탕에다 우리 독창성을 발휘한 작품이다. 인도 순례 승이나 인도 승이 필히 관련되었을 것이다. 친척 촌수를 캐면 인도와 사촌이지 중국과는 거의 남남이다. 필자가 밝혀나가겠지만 한국 불교에서 잃어버린 초기 삼국시대 불교는 인도와 직접 관련이 깊다. 당시 국제도시 경주는 지금도 인도 흔적이 즐비하다.

 

 

5. 석굴암 원래와 1963년 보수 후 모습. ㄷ 자 구부려졌던 전실이 반듯이 펴진 것에 주목.

 


여기서 인도 석굴과 비교하며 반세기전 석굴암 보수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자. 무엇보다 원형 주실 앞 원래 양쪽 ㄷ자로 구부러졌던 전실을 반듯하게 펴 변형시켜 버린 것이다(그림5). 식민시대 일본인들이 팔부중 조각 돌 하나를 잘못 복원한 것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막연한 추정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었다. 펴버린 사실상 이유는 별 근거 없이 석굴 앞에 목조 집을 덧붙여 짓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근래 일본인 복원 이전의 사진 증거가 발견되어 석굴암 전실이 군투팔리처럼 원래부터 구부러진 모습이라는 것이 명백해 졌다.


문화재 복원상 철칙은 근거가 확실할 때에만 손대라는 것이다. 멸실된 불국사 석가탑 꼭대기 부분을 그대로 두었으면 될 터인데, 복원이란 이름아래 후대의 실상사 탑을 모조 삽입하여 역사를 변조해 버렸다. 지금도 경주 유적에는 철학도 없이 고증했다고 하면서 현대판 창작이 복원이란 이름으로 판치고 있다.


탑돌이 위해 중앙에 불상 배치

 

 

6. 궁륭 돔 천정 동심원 방사형. 군투팔리 및 석굴암.

 


인간은 유한하지만 역사는 영원하다. 찬란한 신라 문명을 현대가 왜곡해서는 안 된다. 건축학계 책과 논문에서 왜곡한 석굴암 현재를 인정하지 않고 보수 전 원래도면을 사용한다. 불교계에서도 이제는 과거 잘못을 바로잡아 목조 집을 철거, 원상복구하여 신라의 원래 석굴암으로 되돌아가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석굴암 원형 평면은 인도 스투파의 원형굴로부터 온 것이다. 왜 불상을 중국처럼 뒷벽에 붙이지 않고 중앙에 모셨는가? 인도 스투파 예배는 ‘탑돌이’가 주다. 오른쪽으로 돈다는 한자 번역 우요(右繞) 프라닥쉬나(pradakshina) 길이 형성된다. 모호한 오른쪽이란 불교만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해가 떠서 지는 동-남-서 선회 방향을 말함이다. 인도 탑돌이가 그대로 석굴암의 ‘불상돌이’로 옮겨온 것이다. 석굴암에서 불상이 정중앙이 아니고 약간 뒤쪽으로 물러난 이유는 불상 앞 예배를 위해서다.

 

▲이희봉 교수
인도에서 스투파 돌이와 함께 스투파 앞 예배도 점차 중요하게 되어 석굴 원형 앞 공간이 늘어나 말굽형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음 호에서 인도 석굴 중 중부 데칸고원의 비교적 초기 석굴의 전개부터 보도록 한다.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hblee@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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