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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초기 본격 석굴 바자를 찾아

자연 벗 삼아 수행하는 한국의 암자 같아

뭄바이~뿌네 길목 위치
마을서 탁발 가능 거리
우람한 굴 규모에 감격
조성 때 조각 고스란히

 

바자 석굴은 B.C.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초기의 비교적 규모가 제법 큰 본격적 석굴이다.


바자 석굴은 급성장하는 인도 최대 도시, 영국 식민시대 이름 봄베이, 독립 후 원 이름을 되찾은 뭄바이 항에서 동쪽 대도시 뿌네로 가는 길에 있다. 인도 유일의 명실상부 고속도로, 마치 우리 서울~인천간 고속도로 같은데 다만 높은 재를 만나서 스키 대회전 같이 빙빙 돌아가는 것이 마치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구간과 비슷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서둘렀으나 출발지를 몰라서 시 외곽 시외버스 정류장→빅토리아 기차역→다시 중앙역→다시 외곽 버스정류장으로 대도시를 가로질러 이리저리 왔다갔다 헤매다가 겨우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2시간가량 달린 후 그냥 고속도로 노상에 내려준다. 계단을 내려가니 삼발이 오토릭샤가 대기하고 있어서 예의 그 복잡한 흥정을 하고나서 올라탔다. 로나블리라는 작은 마을 길 양쪽 산에 다음에 볼 카를리 석굴과 지금 보는 바자 석굴이 멀리 서로 마주보고 있다.


대부분의 인도 불교 석굴은 한참을 땀 흘리고 올라가서 산 중턱에 있다. 우리 절이 산 입구 아래 골짜기 풍수 터에 자리 잡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도를 닦으려고 어느 정도 속세와 떨어진 조용한 곳을 택하는데, 그렇다고 마을과 너무 멀면 밥 얻어 오는 탁발을 하기 곤란하다. 그러니 석굴은 마을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이 된다. 우리 큰 절의 암자들이 산을 한참 올라가 있는 것같이 인도 초기 석굴사원은 다름 아닌 수행 위주 우리의 암자이다. 정확히 석굴암의 입지도 바로 인도 석굴사원과 똑 같다.

 

 

▲1. 바자 석굴 전면. 예배굴 차이탸 굴 좌우로 거주굴 비하라 굴이 파여 있다.

 


좁은 산허리 바위 길을 한참 올라가니 멀리 절벽에 우람한 굴 전면이 보였다(그림1). 가슴이 벅차올랐다. 절벽 앞부분이 많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정교한 뾰족아치 조각이 그대로 남아있다. 꼭대기 3층 정도 높이에 인도 집 베란다의 목조 난간이 그대로 암벽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깊이 19m, 폭 8m, 높이 7.5m의 큰 굴이다.
누차 말한 것처럼 인도 석굴은 스투파 모신 예배굴 차이탸 굴 하나에 여러 개의 스님 거주굴 비하라 굴들로 구성된다. 차이탸 굴과 비하라 굴이 각각 초기에 어떻게 시작되어 마지막 완성형으로 발전해 나가는가를 차차 보기로 하고, 오늘은 개괄적으로만 훑어보기로 하자.

 

 

▲ 2. 스투파 모신 차이탸 굴.

 


차이탸 굴은 말굽평 평면으로 속 깊이 둥근 스투파를 모시고 있다(그림2). 물론 돌을 파낸 나머지 덩어리 스투파에 사리를 모셔 넣을 수는 없다. 굴 양쪽과 스투파를 빙 두른 모두 27개의 팔각기둥이 죽 열지어 있는 분위기가 마치 서양 성당 내부와 아주 흡사하다. 천정은 둥근 궁륭으로 물론 전부 돌을 파내어 만들었는데 아치 모양의 나무판자 뼈대가 죽 늘어서있다. 역학적 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전 나무 집 시절에서 따온 장식 모양일 뿐이다. 전체 천정, 기둥, 바닥, 스투파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인도 석굴은 건축이 아니라 거대한 조각이다.


스투파 모양은 산치 스투파와 같으나 위에 올라가서 상층 탑돌이를 할 크기는 아니므로 그냥 원통형 대좌 받침에다가 위에 반구 보다는 구에 더 가깝게 부처님 알, 필자 지칭 ‘불란(佛卵)’ 틀린 명칭 복발(覆鉢)을 모시고 있다. 스투파 꼭대기에 양산은 없어지고 다만 사각 집 모양의 ‘하미카’만 남아있다.

 

 

3. 바자 석굴 배치평면도. 예배 차이탸 굴과 거주 비하라 굴.

 


그림3 평면에는 거주굴이 세 개만 그려졌으나 실제로는 차이탸 굴 좌우로 암벽을 따라서 수십 개의 굴이 죽 연이어 파져있다. 바자 석굴 거주굴은 초기 상태라서 아직 형태가 정착되지 않아 제각각이다. 그림1의 차이탸 굴의 오른쪽 하층 굴, 즉 평면의 13굴처럼 독방 앞에 넓은 마당이 있는 형(그림4),

 

 

▲ 4. 거주 비하라 굴 독방들, 13굴

 


또 속복도 주위에 독방이 죽 있는 형, 그리고 앞으로 거주굴의 전형으로 정착될 앞에 전실이 있고 안마당 주변으로 독방이 있는 형 등 다양하다. 독방 문 입구 위에 군투팔리 석굴처럼 입구를 나타내는 뾰족아치 조각이 있다.
무엇보다 바자 석굴을 유명하게 만들고 또 초기 석굴이라 규정짓게 된 것은 19굴 전실의 독방 입구 벽면 좌우의 조각이다. 당시 인도 재래 바라문의 태양신 수리야와 번개우레신 인드라가 정교하게 조각되어있는 것이다(그림5). 왼쪽 수리야신은 네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부풀어 오른 밤의 괴물을 짓밟으며 달려 나간다. 고귀함을 나타내는 양산이 씌워지고 또 석굴암 조각에 보이는 파리 쫓는 총채를 들고 있다. 오른쪽 인드라신은 코끼리를 타고 아래 지상에 왕을 비롯하여 신성한 나무를 숭배하는 중생들 머리 위를 달린다.

 

 

▲ 5. 수리야 및 인드라 부조

 


여기서 우리가 그저 뜻 모르고 외우는 마술 주문 “수리수리 마하수리”는 범어로서 “햇님 햇님 위대한 햇님이여”로 새롭게 해석된다. 필자 학교의 인도 음악에 정통한 전인평 명예교수의 탁월한 해석이다. ‘수리’는 태양신, ‘마하’는 크다는 뜻, 대승불교는 곧 ‘마하야나’다. 하늘을 가로질러 떴다가 지는 햇님은 마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린다는 인도인들의 사고이다. 인도 동북부 코나라크의 유명한 수리야 사원에 가면 사원 기단은 온통 커다란 바퀴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있다. 수리야 신은 동북아시아 불교에서 일천(日天)으로 번역되었고 인드라 신은 우리에게 더 익숙한 제석천(帝釋天)으로 번역되었다.


힌두교의 전신인 베다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브라흐마교, 즉 바라문교와 초기불교와의 관계를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불교 바자 석굴에 느닷없이 바라문 두 신이 등장하는 것은 아직 초창기에 속하는 석가모니 불교가 대중에게 친근한 인도 재래 신의 권위를 빌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를 지배하던 바라문 여러 신들은 이후 불교로 들어와서 천(天)이라는 이름으로 부처님 아래로 재편성된다.


따라서 바라문 배경 속에서 세상에 나온 석가모니 불교는 이후 인도에서 천년을 번창하다가 그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힌두교에 흡수되어 인도대륙에서 소멸되고 만다. 한국불교에서 불교의 시작을 불교로만 설명하는 것은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드는 한계가 뚜렷하다.  바라문에서 불교가 나온 것은 사실이고 힌두교와 관계 속에서 불교가 설명되어야만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고 불교의 체면이 깎이는 일은 아니다.

 

 

▲ 6. 석굴에 피서 소풍 온 인도인들

 


▲이희봉 교수
무더위의 나라 인도의 과거 석굴 유적은 현재에도 훌륭한 피서 장소로 애용된다(그림6). 다음에는 바자 석굴 맞은편 산의 카를리, 인도 최대 불교석굴을 보도록 한다.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hblee@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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