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간 매주 목요일 아침이 되면 무조건 휴가를 내고 영등포 쪽방촌으로 향하는 이가 있다. 바로 쪽방촌 ‘큰 형님’으로 불리우는 김윤석(심원) 마포경찰서 경감. 그는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든 골목길, 그 사이사이로 바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쪽방촌 한 편에 위치한 컨테이너로 만든 쪽방도우미봉사회 사무실로 향한다. 많은 이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동도 트기 전이지만 김 경감의 아침은 조금 이른 새벽 6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봉사자들과 함께 배식 준비에 나선다. 쪽방도우
거제도의 불자집안에서 태어난 김종순(80·보리행) 전 도림천 아름답게 가꾸기 운동본부장.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등에 업혀 사찰을 올랐다. 아버지는 유명한 선주였는데 할머니는 이를 모두 부처님 가피라 여겼다. 그는 법당에서 부처님께 연신 절하며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기억했고 가끔 따라하기도 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불교가 일상에, 그리고 가슴에 깊이 자리잡았다. 학창시절 그는 점차 불교를 잊었다. 학교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공부하기에 바빴다. 지식에 대한 목마름도
‘불교를 왜 믿어. 그저 우상숭배지….’민학기(현우, 68) 변호사에게 불교는 신에 대한 배반이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계 미션스쿨을 다닌 탓에 마음엔 기독교 교리가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었다. 유일신을 향한 믿음이 깊어질수록 ‘나의 종교가 선이면 남의 종교는 악’이라는 생각이 뚜렷해졌다.졸업 후 찾게 된 교회는 생각보다 정을 붙이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리 합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서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봤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제를 통해 신에게 기도하는 ‘고해성사’뿐이
‘엇, 이건 분명히 남한산성인데….’이기룡(해륜) 조계종 포교사단 전문운영위원은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광주시와 천주교수원교구가 “역사적인 명소 남한산성과 천진암 성지를 잇는 광주 순례길을 만들어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세계적 명소로 만들겠다”는 것. 위안부 역사관 ‘나눔의집’까지 가톨릭 성지 순례 코스로 들어가 있었다. 광주시장과 가톨릭 측 신부는 사진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쥔 채 환히 웃고 있었다. 이 포교사는 법보신문에 이 같은 내용을 전하며 사진과 기사를 보내왔다. “남한산성 성곽을 사찰이 둘러싸고 있었죠. 이
“열정을 한창 꽃 피울 20대에 집 떠나와 저 철조망에 서 있는 새싹들이 보이나? 저들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고달픈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장병들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고 나라를 지켜주는 감사함을 전달하는 게 우리가 평생해야 할 과제다. 지금의 시련이 추억과 경험으로 쌓여 사회에 무사히 진출해 큰 나무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라.”정순자(금강심·79) 상도동 보문사 신도회장의 귓가엔 군법당과 군병원 위문을 비롯해 간병인 봉사 등 군포교와 복지활동에 남다른 애정을 보인 정진 스님(1941~2002)의 일성이 생생하다. 1
파르라니 깎은 머리, 걸망 하나 짊어지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발걸음을 옮긴다. 속세의 인연들을 향해 돌아보지도 않는다.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홍성란(65. 보현화) 하나원 상임포교사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마치 어제 일인양 생생하다.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무장공비를 잡아야 하는 임무가 떨어졌었다고 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사람을 차마 죽이지 못하셨죠. 그 뒤로 바로 면직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 같이 홀가분해 보이셨죠. 그러곤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양한웅(64)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집행위원장이 삶을 대하는 자세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과 부귀영화도 인연 따라 왔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법. 약자들의 곁을 지키며 욕심도 조바심도 분노도 잠재우기 위한 굳은 다짐이다. 그저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길.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평정심을 되찾는다.양 집행위원장은 부모님의 지극한 기도정성으로 태어난 ‘모태불자’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절에 다니며 불교를 접했다. 사찰에서 뛰어놀고 스님들의 법문을 듣
미국종교학회(AAR·American Academy of Religion)는 전 세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종교학 학술단체다. 종교학회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정회원으로 등록된 연구자만 8000명에 이른다. 1963년까지 기독교를 연구하는 성서교육자협회(NABI, National Association of Biblical Instructors)로 불린 뿌리 깊은 기독교 신학 중심 단체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한국 출신 여성 불교학자가 수장으로 뽑혀, 최근 화제를 모았다. 주인공은 지난해 10월 당선된 박진영 아메
조계사 인근에 자리한 건물 3층.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진열된 장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중앙에는 스님들과의 차담을 위한 탁자가 놓여 있고 주위에는 다양한 치수의 승복들이 진열됐다. 승복은 부처님 제자로서 불법을 믿고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켠에 위치한 문을 열고 작업실로 들어서면 자, 실, 재봉틀 등 옷을 짓는 데 쓰이는 물건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윤승현 다운승복 대표는 직원들과 함께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윤 대표는 밝은 얼굴로 맞아줬다. “어떻게 승복을 짓게 됐냐고요? 모든 것이
가파른 산봉우리 가득한 곡운구곡(谷雲九曲)의 고장 강원도 화천. 용화산의 굽이진 길을 돌아 올라가자 탁 트인 풍광을 뒤로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부들과 큼직한 명상센터가 나타났다. 1만8000㎡에 달하는 부지에는 명상가와 예술가들이 머물 명상마을이 조성 중이다. 이곳에 위치한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처 ‘나봄명상예술원’은 2015년부터 명상캠프, 심리상담을 정기적으로 진행해오고 있다. 불자뿐 아니라 개신교·가톨릭 신자 등 명상을 배우러 오는 참가자는 매번 30여명이 넘는다.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자 인도·미얀마·한
‘포교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여러 겹의 주름과 검버섯이 얼굴에 자리 잡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인가. 여기 멀끔한 외모에 항상 청바지를 입고, 따뜻한 모닝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나나 무스쿠리의 음악과 함께 아침을 시작하는 이 남성. 바쁜 와중에도 육지를 제집 드나드는 듯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조계종 포교사단 역사상 최연소로 지역단을 이끄는 이명직 제주지역단장이다. 제주지역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 단장의 모습은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을 깬 ‘멋쟁이’ 포교사 그 자체였다.“불교는 노보살들이 믿는 종교, 포교사는 대부분 은퇴한 6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두근두근’대는 심장소리가 귀까지 전해졌다.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청주 여자교도소였다. 2009년 송수헌(건흥, 63) 충북불교단체협의회장이 그곳에 첫 발을 내디뎠다. 만약을 대비한 몸수색을 거친 후 겹겹의 철문을 지났다. 그러자 표정 없는 여성수감자들이 그를 맞았다. 저마다의 이유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희망도 용기도 없는 듯 절망만이 드리워있었다.한 여성수감자와 상담이 시작됐다. 그녀는 의지할 곳 없다고 호소
“인재불사에 조직의 사활을 걸고, 미래그룹 육성사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나가겠습니다. 대불청의 문화포교역량을 녹여내는 공공성 사업, 젊은 세대들의 고민을 공유하는 청년사업 등 공심을 기반으로 청년불자들과 정토세상 구현을 위해 함께 걷겠습니다.”2021년 2월7일 대불청 제74회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제31대 회장에 선출된 장정화 대한불교청년회장이 당선 당시 밝힌 포부다. 그는 100년이 넘는 대한불교청년회 역사의 첫 여성회장으로 당선 이후 청년포교 활성화를 발원하며 전국 곳곳을 누비고 있다. 서울본부를 비롯해 전라와 경상 지구, 최근
국립경주박물관이 MZ세대의 ‘힙한’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어두컴컴한 유리 진열장이 아니다. 호텔 로비를 연상케하는 환하고 세련된 장소. 유물은 진열장 바깥으로 나왔고, 큐레이터는 여기에 현대적 감성을 더한다. 연회색 배경 벽에 걸린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부터 노오란 보름달 위아래로 전시된 당나라 양식의 신라 흙인형들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반가운 건 지난해 11월 신설된 ‘불교사원실’. 국립박물관에 불교사원실이 따로 마련된 건 경주가 처음이다. 구층목탑이 있었던 황룡사를 비롯해 분황사, 사천왕사, 감은사, 흥륜사 등 신라 대표
“시끄럽다! 그만 좀 뛰어다녀라!”스님이 호령하면 허겁지겁 도망쳐 절 마당 향나무에 올라 숨었다. 잠시 뒤 스님이 자리를 뜨면 은근슬쩍 내려와 해맑게 뛰어놀았다. 잡히면 벌로 청소와 화두 수행을 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경내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 참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매일 새벽을 가르는 목탁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스님의 독경 소리를 동요처럼 따라 불렀다. 뛰어놀다 지치면 절에 찾아오는 불자들에게 동화 같은 불교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한적할 때면 할머니 품속에서 부처님 이야기 자장가 삼아 낮잠에 빠져들었다
“아들아 부처님 뵈러 가자.”고희(古稀)를 바라보지만 어릴 적 서정각 제12대 포교사단 서울지역단장(69.성수)을 부르던 어머니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어머니는 절에 가기 전이면 꼭 가마솥 한 가득 물을 끓여 목욕재계를 하셨다. 그리곤 어린 그에게 가장 깨끗한 옷을 골라 입힌 뒤 이렇게 말했다. 어린 그에게 부처님을 뵈러가자는 말은 그저 “놀러가자”라는 소리로 들렸을 뿐이다.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1950년대, 어머니는 흰 쌀 몇 되를 구해 머리에 이고 어린 서 단장의 손을 꼭 잡고 산 중턱 자그마한 암자에 올랐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지난밤 내내 감겨있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다. 고요함이 가득한 가운데 가족들이 잠에서 깰까 조심하며 이불을 정리한다. 그리고 집 한켠에 마련한 법당에 앉아 염불을 외기 시작한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외며 의식을 깨우고 오늘 하루도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하길 발원한다. 근무하는 학교로 출근하면 쉬는 시간 틈틈이 요약된 ‘법화경’을 사경한다.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획을 긋는다. 퇴근 후에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108배를 시작한다. 하심하는
코로나19 장기화와 오미크론 확산으로 사회 취약계층의 고립감과 어려움이 커질수록 진창호(보인, 50) (사)나누며하나되기 사무처장의 하루는 더 분주해진다.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취약계층에 꼭 필요한 생필품과 마스크, 손소독제 등 코로나19 예방물품을 후원받고 도움이 시급한 전국의 복지사각지대로 배달하는 연결고리에 그가 서있기 때문이다.항상 더 많이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앞서지만 “고맙습니다” “덕분에 다시 버틸 힘이 생겼습니다”라는 응원 한 마디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낸 하루를 보상받는 듯하다. 불제자로서 부처님 가
낭만을 노래하던 1970년대. 천문학과 학생들은 “같이 별 보러 가자”며 사랑을 고백했고, 산림학과를 다니던 70학번의 한 남학생은 ‘새하얀 자작나무 껍질’에 수줍은 마음을 끄적였다. 흐드러진 나뭇잎과 부드러운 숲 내음을 유독 좋아하던 그가, 가장 아끼던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자연을 사랑하던 이 소탈한 학생은 50여년 뒤 제30대 문화재위원장이 됐다. ‘소나무 박사’ ‘사찰숲 전문가’로 잘 알려진 산림학자 전영우 문화재위원장(71) 얘기다. 그는 취임 후 첫 인터뷰에서 눈을 반짝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문화‘재’가
유인섭 조계종자원봉사단 수신회 팀장이 세상에 태어나 다섯 번 해가 바뀔 무렵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세상물정에 눈을 뜨기도 전에 지독한 가난과 마주해야 했다. 배고픔은 어린 그가 감당하기에 힘든 고통이었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건 동네 기독교인들이었다. 쌀이고 반찬이고 때로는 용돈도 줬다. 배곯기 일쑤였던 그에게 교회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다.청년회 임원부터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어릴 적 나를 도와준 그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교회를 다니면 다닐수록 신앙심이 깊어